1), 南湖先生碑銘(남호선생 한림공 김용,1413~1457 비명)
2). 翰林公昭穆( 한림공 김용 가계)
3). 望美堂公帳籍(망미당공 김복원,1465~1543 호적)
南湖先生碑銘
남호선생비명(한림공 김용,1413~1457)
原文 : 1871年 辛未譜
解釋 : 2005. 7. 26. 金順大
公諱勇字子敬號南湖繼出金官駕洛國首露王之後 祖湑 入本朝爲義興縣監 考克一不就終于家以聞 命旌閭 贈南臺持平司憲府執義 佔畢齋金先生題目處士門 且公德業文章炳烺當世實爲百世之師 其姪馹孫之節義從孫大有之崇德豈非先生之家訓所及乎爲世所重而烟村崔先生德之恒與論詩史湥許之因爲道義之交
공의 휘는 용이고 자는 자경이며 호는 남호로서 금관가락국의 수로왕의 후예이다. 조부는 서(湑)이며 우리 조선에 들어와 의흥현감을 지냈다. 부친 극일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별세하여 소문을 듣고 정려를 세웠으며 남대지평 사헌부집의를 증직받았는데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처사문이라 이름붙였다. 또 공의 덕업과 문장이 그 시대에 빛나서 영원한 스승이 되었다. 그(용)의 조카인 일손의 절의와 종손자(從孫)인 대유의 숭고한 덕은 어찌 선생의 가훈이 미치는 바가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소중하게 되어 연촌최선생덕지[1]와 항상 같이 시와 역사에 대해 토론하며 이로 인하여 도의로서 사귀었다.
[1]최덕지(崔德之, 1384~1455).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참의 담(霮)의 아들이다.
公登文科又擢賢良科行翰林廉潔寬厚爲時第一 端廟朝癸酉特拜資憲大夫吏曺判書 翌年甲戌辭仕歸鄕遂移居洪州隱於山林築壇於家北朝朝登賀終身不衰
공은 문과에 급제하고 현량과에 뽑히어 한림을 지냈다. 청렴하고 깨끗하며 너그럽고 온후하여 그 당시에 제일이었다. 단종 때 계유(1453)년에 특별히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 갑술(1454)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홍주로 이사가서 산과 숲에 은거하면서, 집의 북쪽에 단을 쌓고 아침마다 올라가 <조정에> 하례를 드리는 일을 종신토록 그만두지 않았다.
噫公知足而知之卒於景泰八年丁丑享年五十五 貞夫人南陽洪氏吏曺判書大提學文良公汝方之女 生四男漢孫位正郞 春孫中進士 泳孫爲別提 貴孫爲宣傳 皆顯于世漢孫生應馨號修齋壬午中司馬經術才行卓越乎世與靜菴趙先生南溟曺先生友善事聞除蔭參奉 顯廟朝 贈承政院都承旨其德不厚能若是乎
아! 공은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았고 경태 8년 정축(1457)년 향년 5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인은 남양홍씨로서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문양공 여방의 따님이다. 4남을 낳으셨는데 한손은 벼슬이 정랑이고 춘손은 진사이며 영손은 별제를 지냈고 귀손은 선전관이 되어 모두 세상에 드러났다. 한손(1429~1488)은 응형(1447~1507)을 낳았으니 호는 수재로서 임오(1462)년에 사마가 되어 경서에 능통하고 재주가 뛰어나고 탁월하여 정암조선생[2]과 남명조선생[3]을 친구로서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4] 음사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며 현종 때 승정원도승지를 증직받았으나 그 덕이 두텁게 미치지 못한 것이 이와 같았다.
[1]영락11년癸巳(1413)생으로 45세가 맞다. 55세라면 1403년생이 되어 1406년생인 건과 1410년생인 맹의 형님이 되니 모순이다.
[2]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3]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다.
[4] 친구로 지내기에는 나이차이가 많음.
後生咸知節孝之有是子南湖之有是父修齋之有是祖也 卓乎欽哉先生之德業也 節孝之子濯纓之叔父三足堂之從祖修齋之祖父而綿綿遺德非世人所及矣
후생들이 모두 알기를 절효(휘극일)에게는 이 아들(휘용)이 있었고, 남호(휘용)에게는 그의 부친(휘극일)이 있었으며, 수재(휘응형)에게는 조부(휘용)가 되어 선생(휘용)의 덕업을 흠모하고 있다. <휘용은> 절효의 아들이고 탁영(휘일손)의 숙부이며 삼족당(휘대유)의 작은 할아버지로서 끊임없이 덕이 전해져 세상 사람들에게 미치지 않는가.
修齋之於余非徒一代之交曾有世世之淵源也 今要余言索銘其祖之墓淺見薄識敢不足撰先賢之德行而誼厚言感不避辭薄記而書
수재(응형)는 나하고는 한 세대라도 관련 있거나 들어본 적이 없으나 세대의 근원이다. 지금 나에게 그의 조상묘의 비명을 요청해와, 본 것이 얇고 아는 것이 적어 감히 선현의 덕행을 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으나 정의(情誼)가 두텁고 말씀에 감동되어 감히 파하여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적으로나마 쓴다.
崇禎紀元後再丁巳正月二十九日嘉善大夫禮曺參判兼同知經 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藝文館提學 尹鳳朝撰
숭정 기원후재정사(1737년) 1월 29일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동지 경연 의금부춘추관 성균관사 예문관제학 윤봉조[1] 지음
[1]윤봉조(尹鳳朝, 1680~176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직장 명원(明遠)의 아들이다.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 敎兼經 筵參贊官春秋館事修撰官金鎭尙書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사 수찬관 김진상이 내용을 씀
[1]김진상(金鎭商, 1684~175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 할아버지는 참판 익훈(益勳), 아버지는 만채(萬埰)이다.
提學洪樂明篆
제학 홍낙명이 비문의 제목 글을 씀
[1]홍낙명(洪樂命, 1722~178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자순(子順), 호는 신재(新齋).
翰林公昭穆
한림공(김 용) 가계
翰林公子諱漢孫舊譜中漏蹟故翰林公昭穆 公孫諱應馨爲系穆矣
한림공의 아드님은 휘한손으로 구보에서 누락되어 있으나, 한림공의 가계로서 공의 손자인 휘응형은 공의 계목(홀수 후손, 즉 3세)이다.
公十二代孫鎭龜氏家世傳文獻攷覽則翰林公曾孫諱福遠帳籍中翰林公子諱漢孫孫諱應馨的實昭詳此蹟卽當時目下奉行之文獻也
공의 12대손 진구씨 집에 대대로 전해오는 문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림공의 증손인 휘복원의 호적(帳籍)중에 한림공의 아드님인 휘한손과 손자인 휘응형이 정확하게 실제로 소상히 실려 있으니, 이 자취는 당시에 바로 받들어지던 문헌이다.
譜牒後日追先之文獻也 則譜牒雖久遠之文獻於當時帳籍莫詳而 其時墓誌及嗣板函中當無左於帳籍故 今日譜所諸宗含淚而從帳籍懸錄焉
보첩은 후일에 선조를 추모하는 문헌이다. 즉 보첩은 비록 오래된 문헌이나 당시의 호적이 상세하지 못하고, 그 시기의 묘지나 대를 잇는 후손이 보관하고 있는 것 중에 호적이 없거나 잘못되어 있으면, 오늘날 보첩을 간행하는 모든 종친들이 눈물을 머금고 호적에 기록된 것만을 따를 수밖에 없다.
望美堂公帳籍
망미당공(김복원,1465~1543) 호적
嘉靖十年甲午正月 日
가정10년 갑오(1534) 1월 일
洪州府戶籍單子
홍주부 호적단자
考辛卯戶口成籍帳內綠楊面雲南里第一統第二戶前郡守金福遠年七十乙酉生本金海父參奉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應馨 祖通政大夫行鍾城府使 贈嘉善大夫戶曺參判漢孫 曾祖中訓大夫行翰林資憲大夫行吏曺判書勇 外祖參奉朴命河本咸陽 故妻宋氏籍礪山父佐郞文吾 祖進士瑊 曾祖郡守炯林 外祖縣監李聃齡本全州 率子幼學軸年二十一甲戌生婦朴氏歲二十二癸酉生籍潘南次子幼學軒年十八丁丑生婦趙氏歲十九丙子生籍咸安賤口不錄
신묘(1531)년의 호구를 조사한 호적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록양면 운남리 제1통 제2호에 전군수 김복원이 사는데 나이는 70이고 을유(1465)생이며 본(本)은 김해이다. 부친은 참봉을 지내고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를 증직받은 응형 이며, 조부는 통정대부 행종성부사로서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증직받은 한손이며, 증조부는 중훈대부 행한림과 자헌대부 행이조판서를 지낸 용이다. 외조부는 참봉을 지낸 박명하이고 본(本)은 함양이다. <김복원의> 사별한 처는 여산송씨로서 친정 부친은 좌랑을 지낸 송문오이고, 친정 조부는 진사를 지낸 송감이고, 친정 증조부는 군수를 지낸 송형림이며, 처의 친정 외조부는 현감을 지낸 이담령으로서 본(本)은 전주이다. <김복원의> 아들은 유학 축(1514~1592)으로서 나이는 21세이고 갑술생이며 <축의> 부인은 박씨로서 나이는 22세이고 계유생(1513)으로 박남박씨이다. 둘째아들은 유학 헌(1517~1593)으로서 나이는 18세이고 정축생이며 그의 부인은 조씨로서 19세이며 병자생(1516)이고 함안조씨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