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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8) 2025. 3. 9
스데반의 순교
사도행전7:54-60
<지난 시간 요약 – 스데반의 책망>
유대인들에 의해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고발된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보기에, 자신이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세의 예언을 무시하고, 하나님 성전 자체를 우상화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수단으로 전락시킨 장본인들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직설적으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였습니다.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그들은 목이 곧아서 교만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의인이요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그들의 죄를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52절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이스라엘 조상들은 의인이 오시라고 예고한 선지자들을 죽였지만, 지금 너희는 선지자들이 예고한 바로 그분을 잡아 죽였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의 반응>
스데반의 변증과 책망을 들은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54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잘못을 깨닫게 되면,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존 웨슬리의 ‘선행 은총’). 도덕적 양심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잘못을 깨달으면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대개 두 종류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실 똑같은 일이 오순절 직후, 베드로가 예수님을 전할 때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2:36)하고 설교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마음에 찔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행2: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뭐라고 권면해 주었습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행2:38)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베드로의 말에 따라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의 수가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된 배경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았을 때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새 생명이 탄생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와 반대로 자기 허물을 지적받았을 때 오히려 자기 잘못을 지적한 사람(메신저)을 미워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원수처럼 여기면서,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라고 하며 오히려 잘못한 사람이 화를 냅니다.
오늘 본문의 산헤드린 공의회의 구성원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음에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궁금증이 하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그날 3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은 같았지만, 왜 분노에 차 ‘이를 갈았을까요?’
사실 내용을 보면 스데반의 설교는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우선 말하는 사람이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더군다나 사도가 아니었고 소위 일곱 집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권위가 떨어집니다. 더군다나 듣는 사람들은 대부분 정통 히브리파 유대인들입니다. 아무래도 해외에 거주하다가 온 스데반이 자기들을 가르친다고 느껴지니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2) 그런데 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듣는 사람이 달았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데 일조한 잘못이 있지만, 주동자들은 아니기에 큰 잘못은 없습니다. 회개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스데반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는 권력자들입니다. 대부분 유대교의 지도자들이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음모를 꾸민 사람들입니다. 주동자들입니다. 죄가 큽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는 분노하여 도리어 박해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스데반의 반응>
아마도 스데반은 자신을 향하여 그들이 ‘이를 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반응은?
55~56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이때 당시, 스데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문장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했다는 것이 누가의 증언입니다.
‘성령 충만’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데반은 바로 이 순간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 -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대개 사람들은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좋아지면 기뻐하고, 조금만 환경이 나빠지면 좌절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스데반은 지금 죽음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성령 충만했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행동에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났습니다.
스데반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습니다.
3차원에서 이해할 말씀이 아니라 4차원의 세계에서 이해해야 할 말씀입니다.
단지 육신의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스데반이 우러러본 하늘이 어떤 하늘인지를 알려줍니다. ‘sky’가 아니라 ‘heaven’이었습니다. 단지 육신의 눈만 들어 들어 하늘을 본 것이 아니라,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단어가 있는데, 바로 하늘을 ‘주목하여’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목하다’는 말은 의지적인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권면 -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도 4차원의 단어입니다. 곧 하나님을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신비체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56).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실존 체험’(신비체험)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영안이 열려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 자신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6)고 입 밖으로 자신의 신비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스스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위해 자꾸 땅(주변)을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동서남북으로 꽉 막힌 현실을 보면서 실망과 좌절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의 생명을 지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기상황을 만나도, 동서남북이 꽉 막힌 현실을 만나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려있는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4차원의 세계).
사도 바울의 간증 - 고후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그런데 열려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위’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안(믿음의 눈)을 열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분노하는 사람들>
스데반의 신비체험 고백을 들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57~58절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산헤드린 재판정에는 많은 참관인들이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손짓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달려들었습니다. 이 행동은 스데반의 간증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붙잡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처형할 때 반드시 이렇게 ‘성 밖으로 끌어내서 돌로 쳐 죽였습니다(레24:14 ’진 밖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성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에서 못 박아 죽였고, 스데반도 성 밖으로 끌고 나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죄인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죄인을 고발한 증인들이 가장 먼저 돌로 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기도 보면 증인들이 돌로 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매수한 거짓 증인들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스데반을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치기 전에 옷을 벗어서 사울(훗날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옷이 돌로 치는 행위에 방해가 되기에). 스데반이 논쟁을 벌인 ‘자유민들의 회당’에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었던 사울도 출석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행6:9).
거
짓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 그곳에 모인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앞쪽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곳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직접 나가서 돌로 친 것이 아니라, 뒤에서 조종하는 실세였습니다.
그런데 언뜻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의 산헤드린에게는 ‘사형 선고’는 할 수 있어도 ‘사형 집행권’은 없었습니다. ‘사형 집행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이는 행위는 로마의 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불법적인 행태였습니다. 당시 로마 총독부와 산헤드린 사이의 부적절하고 불의한 유착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이렇게 해서 기독교 최초의 순교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59~60절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남긴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간청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 가운데 나온 말입니다.
둘째로, 그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크게 외쳤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개념은 인간 안에 없는 개념입니다.
나를 돌로 치고 죽이려 드는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는 개념이 ‘원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정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죽은 것입니다. 복된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스데반이 남긴 최후의 말들은 어디서 많이 듣던 아주 익숙한 내용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가상칠언의 내용과 아주 비슷합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두 말씀은 모두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은 아마도 두 책이 모두 같은 저자인 누가에 의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순서는 바뀌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 예수님과 가장 비슷하게 산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면, 예수님과 가장 비슷하게 죽은 사람은 스데반 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표현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우리의 몸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성당이나 교회를 방문하면, 우리나라와 다른 것이 있습니다. 교회 마당에 무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건물 안에 관이 있습니다.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은 대부분 무덤이 동네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기독교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곳에는 무덤을 가까이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 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무덤을 가까이 둡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마지막은 같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영광의 신비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기에 가까이 교회와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문화일수록 무덤을 멀리 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도 됩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항상 생각하면 우리는 한순간도 가볍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데반의 마지막 죽는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지막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요?
사람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게 될까요? 아니면 스데반처럼 ‘용서’하고 ‘신뢰’하게 될까요?
그 모습은 갑작스럽게 연출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살아온 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음과 용서의 삶을 연습하여, 마지막이 은혜롭고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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