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기타 둘러 메고
베이비부머인 우리는 모두 통기타 세대다. 통기타 , 청바지 그리고 산뜻한 생맥주는 우리의 대명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젊은 시절, 1960년 중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통기타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부상해 젊은이의 문화적 코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세상은 험난했지만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 분화된 통기타는 기존 가수들과는 별개로 그들 스스로 기타코드에 맞춰 부르고 즐겼고 시대에 앞장섰다.
대중적이면서도 시대를 통탄한 통기타 선율에 묻어난 의지와 의식은 종래에 이르러 한 시대를 가르는 큰 변천을 야기하고 발현하였기에 나는 이를 청춘 혁명이라 말하고 싶고 통기타 문화라고 당당히 선 그어 말을 하고 싶다.
연암 박지원과 그의 친구들이 원각사 밑에 모여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1760년대 소위 말하는 백탑파의 기세와 그에 연이은 꼭 100년 후 근대 국가·사회 건설을 지향하던 부르주아 개혁사상, 이를테면 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와 중인 출신의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일명 유대치)들의 출현을 단순한 우연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의 발현은 서얼도 등용하는 정조대왕의 문예부흥에서 비롯했다.
그리고 또 묘하게시리 100년 후 종로에는 세시봉이라는 통기타 그룹이 대거 등장하며 통기타를 매개로 또 다른 문예부흥이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파급되며 전과 다르게 큰 결실을 맺는다. 이 일련의 역사적 전개와 과정은 간단히 말하여 문화적 충돌과 자극에서 비롯한 자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청과 외세(천주교)의 자극을 받고 개화코자 하였으며 자각한 선비들은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실학이라는 학문으로 호령하였으나 끝내 전제시대를 벗어나지를 못했다.
하지만 통기타는 달랐다. 수직적 존립에서 수평으로 자유와 자율 그리고 민주화는 통기타의 음률을 타고 비로소 다양한 패턴과 의식적 양상으로 재생산되며 일파만파 퍼져 젊은이들에게 큰 희망과 더불어 민주화의 꽃을 피워냈다. 나와 친구들은 까까머리에 무슨 낭만을 안다고 당시 청춘 들이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던 강촌 청평유원지를 통기타 걸쳐메고 향했다. 돌아올 때 기차안에서소란을 피운다고 통기타를 뺏기고 영등포 역까지 끌려갔지만. 그 만큼 통기타는 파급력이 대단했다.
그렇다면 통기타 문화는 어디서 자극 받은 것일까. 개항 이후 이 땅에서 새로운 문화는 언제나 미국을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라는 외피를 쓰고 들어왔다. 한국의 양악사 역시 실은 유럽 클래식음악의 도입사이고 그 중요한 부분이 '기독교음악사'이고 보면 그 말이 과장되진 않다.'엔카'가 그 원류라고 논란이 되고 있는 트로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미국으로부터다. 실제 통기타음악으로 불릴 미국음악을 소개한 곳이 YMCA이었고, 통기타음악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인 젊은이의 문화를 이끌어낸 곳은 YWCA이었다.
1965년 4월, YMCA의 청년부에서 '싱얼롱 Y'라는 모임을 만들면서 이 나라의 통기타 문화는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당시 유신시대를 풍미했던 음악인, '대한노래부르기중앙회' 대표 전석환씨가 있었다. 그 당시는 대학가에 한일국교정상화반대 데모가 한창이던 시절로 모든 학교가 휴교상태에 있었다. 학교에서 풀려난 젊은 대학생들은 그 젊음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여 당구장이나 대폿집 등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고 그 당시 붐을 이루던 음악감상실에 틀어박혀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때에 미군장교클럽에서 일주일에 서너 번씩 노래를 지도하던 전석환이 미군 TV프로인 '싱어롱 마치'라는 마치 밀러 합창단이 출연하는 프로에서 힌트를 얻어 시작했다. 그 당시 유행하던 「The Young Ones」 와 같은 팝송을 중심으로 하여 민요, 가곡, 흑인영가에서 찬송가에 이르기까지 건전한 가사와 곡 을 가진 노래를 골라 보급하였다. 시대는 늘 변하며 어느 조류가 생기는 법이고 시대갈등은 늘 생긴다지만 그 시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일본 엥카에서 미국 팝으로 변모하는 과정이었으며 울고 짜는 노랫말에서 비틀고 풍자하고 파격적인 선률을 구사하며 동적으로 변모하는 선풍을 몰아 사회적으로도 일대 개혁을 가져왔다. 자각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목마른 자유, 희망찬 세상에 대한 열망. 그들은 모든 면에서 과감했다. 미니스커트 규제와 통금시간 제한,무릎 위 20cm 미니스커트 단속.미니스커트의 기준인 무릎 위 20cm를 확인하기 위해 대나무 자를 들고 다니며 치마 길이를 단속했다
모든 연인을 신데렐라로 만들었던 그 시절, 밤 12시 야간 통행금지! ‘사랑은 통금 사이렌을 타고!’ 통금시간 나눈 연인들의 진한 키스! 밤 11시 반에는 예비 사이렌, 밤 12시가 되면 온 동네에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렸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거리를 통행하다 방범대원에게 잡히면 파출소 유치장에 끌려갔다. 그래도 젊음은 낭만이고 즐거움이다. 나는 술마시다 안양 역전 파출소에 지정 단골이 되기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포크송을 부르던 그 때 그 시절!‘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통기타와 함께 한 낭만과 추억!기타는 친근해서 무조건 좋았다. “통기타, 청바지, 맥주로 통하던 청년문화의 산실은 바로 ‘쎄시봉’이었다. ‘쎄시봉’의 친구들로 불리는 한국 포크음악계의 거인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는 통기타 뮤지션 1세대로 불리며 청년문화를 이끌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건재하다.
그 시절에는 대학 축제나 해변가 주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청춘들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쎄시봉’에서 ‘청개구리의 집’을 거쳐 ‘쉘부르’로 이어지는 통기타음악의 흐름은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로 무장하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른바 ‘대마초 파동’과 함께 ‘금지곡 시대’를 맞으면서 청년문화는 양쪽에서 동시에 협공을 받았다. 대학가 내에서는 지나친 상업주의로 내몰았고 기성세대는 퇴폐문화로 몰았다.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술 마시고 노래하며 대마초를 피우는 부도덕한 세태로 이분화 시켜버렸다. 이러한 기성세대와의 갈등은 체제와 반체제 논란으로까지 이어졌다. 금지곡의 시대, 나는 목소리로 거부감을 나타낸 듯 느껴지는 한대수가 그 대표가 아닌가 싶다. 찔러대는 발성, 거침없는 노랫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질펀한 엔카를 단번에 일소하며 순수하고 색다른 질감으로 젊은이들을 자극했다. 가사도 전 국민을 상대한 것이 아니었다. 통기타의 선률은 소박했다.
청바지 입고 한 석달만 연습하면 나도 흉내 낼 개방적인 그런 대중성,기타 생산량이 당시 엄청스레 늘어났다. 나도 당시 봉고인가 타악기를 사러 세운상가를 가보고 유복성을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젊은 것들이 철이 없어! 시국이 어쩐지도 모르고 말이야. 희피족을 따라 한다며, 죄다 반전시위나 일삼는 족속들 말이야. 거기에 남녀가 어울려 고고를 춘다며. 졸지에 풍기문란과 퇴폐로 전락하고 만 운명. 박정권은 아마 4 19 의거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청년문화는 경계대상 1호였다. 당시 청년문화론이라는 한완상의 글이나 김지하나 황지우 시를 몰래 베껴 나누어 읽곤 했을 때다. 야유회 간다고 짊어진 통기타를 압수했다. 유신 정권들어 더욱 강화되더니 75년 5월 월남이 패망하자 긴급조치9호의 시대가 되자 그 수위는 절정에 이른다. 방송규제, 철저한 심의 규제를 햇고 허튼 말 이를테면 물가가 높다라든지 빈부격차가 심하다든지 하는 말은 국론을 분열하는 내용으로 철퇴를 맞았다.
그쯤 잘 살아보세의 새마을이 줄기타게 등장하고 초가집도 사라졌다. 그리고 금지곡, 이상하게 젊은이들 희트곡은 거의 금지가 됐다. 대표적인 노래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가 아닌가. 3선개헌을 말하는 데 거짓말이야 하니 가만 둘리가 없었다. 75년 12월 기어코 쑥밭이 되고 만다. 대마초 파동. 다양한 대중문화가 다시 그 이전단계로 돌아가는 듯, 쨍하고 해뜰 날과 오동잎 한 잎 두 잎이 여세를 몰고 국민 건전가요가 등장한다.
그럴수록 청년들은 대중문학을 등지고 팝송에 귀 기울이고 심취했다. 향토 방위의 노래, 승공의 노래. 자유 비판, 심지어 낭만도 재단하던 시절, 그런다고 누가 시킨다고 대중문화는 바뀌지 않는다. 결국 부르고 부르지 않고는 전적으로 대중들에게 달려 있다. 오히려 금지하고 제한한 사회 풍속은 더 큰 자극으로 반항되어 큰 몫을 얻는다. 바로 민주화다. 그렇다고 음악이 시들해진 것도 아니다.
대마초가수들의 활동이 대거 규제되던 1970년대 후반, <시인의 마을>의 정태춘과 <아니 벌써>의 삼형제 포크록 그룹 산울림 등의 등장과 때를 같이 해 대학가요제가 시작되며 또 다른 대안으로 청년문화를 이어간다. 1977년 ‘순수, 열정, 창의’라는 슬로건과 함께 출발한 대학가요제를 시작으로 해변가요제(이후 젊은이의 가요제로 변경), 강변가요제, 전국대학가요경연대회 등이 이어지며 이를 통해 많은 노래들과 스타들이 탄생했다.
더불어 쉘부르 출신 통기타 가수들은 80년대 발라드 시대를 여는 등 가요계 전면으로 부상했다. 90년대 ‘미사리 라이브 카페 붐’을 주도하기도 했던 쉘부르는 현재 전국 30 여개 지역에서 라이브 위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1980년대 뉴에이지, 크로스오버 등 세계적인 조류에 발맞춰 통기타 음악도 여러 장르와 접목, ‘포크의 다양화’가 펼쳐진다. “80년대는 방송과 음반 중심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6.29 선언’과 함께 월북작가의 노래를 포함한 금지곡들이 대거 해제되었고 때를 같이 해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가 민중가요를 대중화시키며 밀리언셀러 시대를 연다. 순수음악과 결합한 이동원, 박인수의 <향수>가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더하던 80년대 말, LP레코드의 아날로그 음원이 디지털 CD로 교체되는 등의 변화와 더불어 테크노 음악시대가 펼쳐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외한인 사람이 자료를 모아 겨우 글 한 편을 썼지만 이 분야 워낙 전문가들도 많고 통기타 문화를 단순히 평가한다는 것은 정말 무리다. 하지만 통기타는 단순한 기타 줄 몇줄에 메인 선률이 아니다. 굳이 거창하게 '통기타문화'라고 감히 말하는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련다. 그 시대를 산 젊은이라면 다 아는 노래, 아침이슬, 이 노래는 음반으로는 3,000장도 팔리지 않았다는 데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 된다.
이 곡은 오랫동안 금지가 되었다. 그런데 87년 시민항쟁 때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이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딱 2곡밖에 없었다. 학생도 나오고,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도 나오고, 지나가던 아줌마도 나와 섰는데, 이들이 모여서 다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딱 2곡밖에 없었다. 하나는 애국가였고, 나머지 한 곡은 바로 이 노래, 아침이슬이었다. 의미를 담은 노래는 처한 환경을 극복하는 힘과 최면을 갖는다.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장례식에 백 만 명의 시민이 신촌 로타리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꽉 채웠을 때,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던 것은 시민들이 운구를 하고 천천히 걸어가며 끝없이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간 것이었다. 서로 거리가 너무 멀어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들꽃들이 시들지 않는 양 ‘아침 이슬’이 돌림노래처럼 저 멀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그 거리를 가득 채웠다. 들불처럼 일어난 그 장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이 노래는 누구든 부른다. 산업현장에서도 거리에서도 애국적인 일을 앞두고도. 언젠가 청와대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TV로도 보았다. 이 노래는 유행곡이 아니다. 인간이 거룩해지고 성스러워져야 할 때 스스로 엄숙해지자고 부르는 희망의 노래이며 민주의 장엄한 행진곡이다. 이 정도라 하면 통기타 문화라고 할만 하지 않은가.
베이비부머여! 우리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우며 살아왔다.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어차피 힘든 세상,이 풍진 세상을 우리 함께 헤쳐 나가자. 그 시절처럼 청순한 마음 속 통기타 하나씩 둘러 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