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글글 569번의 '나의 방'을 다시 고쳐 썼습니다. 여러 선배님들이 관심 어린 댓글을 많이 달아 주셨는데, 아무래도 미진한 곳이 많아서 다시 고쳐 보았으니, 한번 더 읽어주시고 부족한 점을 가차없이 지적해 주세요.***
나의 방
이 화 용
예기치 않은 만남에 우리는 낯설어 한다. 그러나 곧 그 만남에서 아주 오래 된 기억의 한 조각을 되살려 낸다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그 꽃잎들이 그랬다.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변한 문고판 책갈피를 넘기다가 눈에 띈, 갈색으로 바래버린 얇다란 철쭉 꽃잎, 그리고 목련 꽃잎. 마치 고분 속에서 수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어느 반가 여인의 미라처럼 생경했다. 나는 아마도 화사한 그 빛깔, 그 감촉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을까? 곧 말라 떨어져서 소멸해 버릴 꽃잎이 너무 아쉬워서 였을까? 그 시절 나의 모습을 다시 찾을 길이 없다. 나를 찾아 깊이 침잠하던 ‘나의 방’을 이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처음 ‘나의 방’을 가진 것은 중학교 3 학년, 열다섯 살 때이다. 삼선동 계단 위의 집에서 정릉에 근사한 집을 짓고 이사를 하면서 나의 방이 생겼다. 남향으로 탁 트인 커다란 창문이 마음에 들었으나 모든 것이 위축되어 있었던 때라서 그런지 처음 본 나의 방은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기쁨보다 앞섰다. 게다가 이사 온 이튿날 금빛으로 도색된 철제 다리가 빛나는 의자와 함께 새 책상이 방으로 배달이 되고나니, 공부에 별 뜻이 없던 나는 부모님 보기가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이 방에서 사춘기를 지냈고 대학생이 됐고 스물여덟이 될 때까지 살았다.
고만고만한 터울의 사남매가 한 방에서 자고나면 별 일도 아닌 걸로 다투고, 금세 해해거리며 같이 장난치고 지내던 삼선동 계단 위의 집에선 가족들 누구도 내 방이란 꿈도 꾸지 못했다. 제일 큰 안방에서는 우리 사 남매가 뒤엉켜 같이 자고, 아침이 되면 이부자리를 개어서 다락에 얹고 온 식구가 옹기종기 둘러 앉아 머리를 맞대고 아침을 먹는다. 서재를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쓰시고, 건넌방에서는 할머니와 ‘봉순언니’, 그리고 늘 드나들던 객식구가 함께 잤다. 모든 것은 늘 ‘함께’ 였다. 같이 잠들고 같이 깨어나고, 같이 밥 먹고, 놀고, 숙제하고, 나만의 것은 없었다. 심지어 양말도 속옷도 학용품도 공동의 것, 우리의 것이었다.
나의 방이 생기면서 그 방에서 전혜린을 알았고, 그녀가 번역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다. 슈타인 박사의 사랑을 끝내 물리치고 자아를 찾아 가는 ‘니나’의 건조한 목소리가 늘 나를 따라 다녔다. 나의 방이 생기면서 나에게는 비밀이 생기기 시작했다. 식구들 누구도 내 방에 들어와서 나를 탐색하는 일을 없었지만 나는 무엇인가를 ‘나의 방’ 구석구석에 감추기 시작했다. 나만의 비밀, 나 혼자만의 것을 갖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것들은 ― 일기장, 수학 책 아래 펴 놓고 끼적대던 낙서장, 편지글들, 책꽂이 선반 밑면에 새겨놓은 상상 속의 연인인 ‘綠’이란 글자는 지금도 내 가슴속에 선명하다. 매일 아침 나는 이들을 허겁지겁 어디엔가 깊숙이 숨겨 놓고야 안심이 되어 학교로 향하곤 했다.
철마다 마당에 피고 지는 꽃잎들을 책갈피에 끼워 놓는 일도 그 방에서 시작되었다. 따스한 봄기운에 방금 봉오리를 터뜨린 목련꽃잎이 심술궂은 꽃샘추위에 땅에 떨어지면, 금세 그 순결한 꽃잎이 누렇게 변해 버리는 것이 너무도 허망했었나 보다. 땅에 떨어진 꽃잎들을 주워서 책갈피에 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피어나는 철쭉, 산도화도…. 나는 그 방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라 심하게 허둥댔다. 나를 찾아 가는 여행이었다.
결혼을 하면서 나의 방은 없어졌다. 그리고 우리 방이 생겼다. 모든 것은 남편과 함께였다. 나의 방에서의 은밀했던 나만의 세계는 이제 남편과 함께 잠자고 깨어나서 밥 먹고, TV 보고 신문 보는 우리의 방으로 바뀌었으나 나는 나의 방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가 좋았다. 신혼 때 그는 이른 새벽에 출근했다가 별을 보고 퇴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적다고 늘 안달했고, 같이 있을 때에는 늘 몸의 어느 한 쪽을 그에게 걸치거나, 붙어 앉아 있을 만큼 ‘나’가 아닌 ‘우리’였다.
아이들이 태어나자 아이가 모든 것의 우선이 되었다. ‘나’는 없어졌다. 세월에 밀려 나를 잃어버린 것인지, 스스로 놓아 버린 것인지. 그러나 아이들도 역시 성장하면서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방’이 생기고 그들의 방에서 자아를 찾아간다, 내가 그랬듯이.
이제 나는 늙어가고 있다. 아이들이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혼자 남을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이 떠난 후의 고독을 기다린다. 고독이 주는 자유로움을 기대한다. 그래서 다시 ‘나의 방’ 속으로 침잠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그 방은 이제 성숙을 위한 방이 아니다. 그 방은 간직할 수 있는 것과 흘려보내야 하는 것을 알아가는 방이 될 것이다. 곧 다가 올 늙음과 아름다운 소멸을 준비하는 방이 되어야 하겠지. 나는 다시 ‘나의 방’에서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야겠다.
생명을 받아 태어나서 성장하고, 번식하고 쇠락하며 소멸하는 삶의 법칙에서 40 년의 세월 동안 깊이 잠들었던 꽃잎이 세상 속으로 나온 것처럼 나는 다시 ‘나의 방’을 찾아야 할까 보다. 그 때처럼 허둥대지 않고 아름답게 늙어가기 위해서…. (2009. 8. 14매)
첫댓글 마지막에 나의 방의 의미를 잘 풀어낸 것 같습니다.<곧 다가 올 늙음과 ..... . 나는 다시 '나의 방'에서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야겠다.> 그리고 말미에 '... 아름답게 늙어가기...'를 좀 다르게 표현하면 어떨런지, '나이들기'라든가 .
아름답게 나이들기....훨씬 표현이 부드럽군요. 사실 '늙어가고...', '늙어 가기...'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뜻은 맞지만, '늙다'라는 어휘는 여간 고민이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바우님의 '나이 들기'가 훨씬 완곡한 표현이 되겠군요. 고민 좀 더 해볼께요. 감사합니다. 18:29
내 방과 내 삶을 서로 바꾸어 가면서 아주 잘 풀어나가셨군요. 한가지 트집을 잡자면 아이들이 태어난 후 갑자기 삶이 너무 튀어 나와버렸고 방 얘기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가 없어졌다'는 말에 덧붙여 내 방도 어떻게 되었다는, 어쩌면 사족같은 얘기를 덧붙이는 것은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나의 방은 없어졌다'는 이미 그 윗 문단에 나와서 다시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나의 방'이란 주거하는 '방'인 동시에 '자아'를 뜻하는데, 그 의미가 좀 불분명하게 표현 되었나 봅니다. 좀 더 고민해야되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제 글에 많이 관심 가져주심도 너무 감사하고요...
人生은 결국 혼자왔다가 혼자간다 더군요. 40년 세월 잊고 살으셨다가 다시 찾은 '나의 방' 그 방에서 진정 간직할 수 있는 것과 흘려보내야 하는 것을 알아가는 인생 후반을 꾸미시옵소서. 조용히 성찰하시는 철학이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어떤 모습으로 나이들어 가느냐가 지금껏 살아 온 생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아!!!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지요.
누렇게 변한 문고판 책갈피에서 40년 동안 잠들었다가 깨어난 빛바랜 꽃잎들! 아주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찾아내는 저력을 느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 꽃잎들이 거기에 있을줄이야... 잠시 멍~~~ 했었죠. 40년의 세월이 책갈피 속에 있었습니다 ...... 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첫 문단의 두번째 문장 ''그러나 ~ 면...'을 빼고, 두번째 문단과 곧장 연결하면 깔끔할 것 같아요. 끝에서 두번째 문단에서 '혼자남을 외로움'에 고개를 갸웃합니다. 현재는 '우리'였던 남편이 안계신가요? 계시다면 좀 성급하지 않았나 싶네요. '혼자 남을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 부분만 없다면 그 문단이 매끄럽고 멋집니다. 둘이 살아도 나만의 방은 가질 수 있으니까요. 제가 너무 꼼꼼하지요? 그런데 두레박님은 글을 끌고나가는 힘이 참 좋아요. 배우고 싶습니다. 참, 글씨체가 '바탕체' 같군요. '바탕'으로 해보시면 어떨지? 부호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서요.
선생님이 주신 말씀 급히 보았습니다. 이따 저녁때 집에 가서 다시 꼼꼼이 보고 고민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짧은 두 문장으로 된 한 문단에서 '그러나'로 앞의 얘기를 뒤집은 것이 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요. 뒷 문장은 책갈피 속의 바랜 꽃잎은 제가 이 글(다시 자아를 찾고 싶다는) 글을 쓰게 된 모티브이므로 얘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나가기 위함이었어요. 그리고 '혼자 남을 외로움'---남편이 제 곁에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다만 아이들은 이미 조금씩 자신의 방을 찾아 가고 있고, 언젠가는 자신의 굳건한 방을 갖게 되겠지요......'바탕'으로 고쳤더니 속이 다 후련해지네요. 왜 부호가 그리 넓게 들어가나 참 거북했었어요. 선생님의 여러가지 말씀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가 왜 그리 썼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눈이 아프셔서 보시기가 괴로우셨을텐데 세심하게 지적해 주심에 너무 감사합니다.
두레박님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사합니다. 글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것이고, 남의 말은 참고사항입니다. 다른 글방에서 더러 느끼는 일인데 감상을 말하면, 원글을 살짝 고쳐놓고 시치미를 딱 떼는 분도 ... ㅎㅎ~ 그래도 우리 회원들은 작은 것이라도 지적한 부분을 고치면 꼭 답글을 주는 따뜻함이 있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