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창과 반굴은 왜 죽었을까
- 정만진 교육위원의 <학부모를 위한 교육학> 28 / 내일신문 팔공신문
사다함은 대가야를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운다. 사다함의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킨다. 왕은 사다함의 공로를 인정하여 밭과 포로 300인을 하사한다. 사다함은 밭은 부하들에게 나눠주고, 포로들은 모두 풀어준다. 그의 나이 15∼16세 때의 일이다. 그러나 사다함은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 무관랑이 병사하자 이를 슬퍼하여 거듭 통곡하다가 불과 7일만에 숨을 거둔다.
김유신의 5만 군대와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격전을 치른다. 군사는 김유신쪽이 10배나 많지만 전투마다 승리는 계백의 몫이 된다. 당나라 원정대장 소정방과 사비성 아래에서 군사를 합치기로 한 작전 기일 때문에 김유신은 곤경에 처한다. 이때 김유신의 동생 김흠운 장군의 아들 반굴이 단신으로 백제 군영 속으로 뛰어든다. 반굴은 바로 전사한다. 다시 김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도 백제군 진영으로 돌진한다. 계백은 사로잡힌 관창이 너무 어린 것을 보고 그를 산 채로 묶어 신라 군영으로 돌려보낸다. 관창은 살아서 돌아온 것은 화랑의 치욕이라며 재차 백제 군대를 향해 뛰어든다. 결국 계백은 관창의 목을 베어 신라군 진영으로 보낸다. 두 화랑의 분골쇄신을 목격한 신라 군사들은 마침내 충의 백배하여 백제의 5천 결사대를 격파하고, 계백도 전사한다.
사다함의 죽음은 허망하다. 15대 풍월주(신라 화랑 전체의 대표) 김유신의 한참 선배되는 5대 풍월주 사다함이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7일만에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사실은 그가 지나치게 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나 의아하게 한다. 또, 김흠운, 김품일 두 장군이 아들들에게 백제군사 속으로 돌진하여 화랑답게 죽으라고 격려하는 대목도 납득하기 어려운 지나친 처사로 보인다. 어찌 사람이 제 아들을 즉사의 구렁으로 몰아넣을 수 있으며, 아무리 화랑이라지만 반굴과 관창 또한 걸출한 무예도 없으면서 어찌 막무가내로 생명을 버린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화랑의 세속오계가 충(사군이충), 효(사친이효), 신(교우이신), 용(임전무퇴)의 유교정신만이 아니라 살생유택의 불교정신도 함유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신라는 불교국가였고, 신라사람들은 조국을 부처님이 현생하기에 아주 적합한 이상국가로 굳건히 세우겠다는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는 뜻이다. 신라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신라 땅이 불국정토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 땅을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쳤고, 외적을 쫓아내고 굴복시키기 위해 임전무퇴의 용기로 싸웠다는 말이다. 이미 불국정토에 살고 있어 사는것과 죽는것이 하나인데 무에 죽음을 두려워할 것인가. 친구가 죽었으니 나도 따라 죽을 수 있고, 불국정토를 더럽히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목숨도 가벼이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 '황산벌'을 본 관객 중에는 더러 흥분을 하기도 한다. "반굴과 관창의 충성심을 우스꽝스러운 희화의 대상으로 삼다니, 역사를 이 모양으로 왜곡해도 되는 거야?" 물론 그렇다. 영화는 김흠운, 김품일 두 장군이 아들들에게 죽음의 전장터로 나가라고 독려하는 장면을 관객의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황산벌'은 역사교과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에서 관객의 그러한 비판은 온당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사다함, 반굴, 관창의 죽음이 친구에 대한 우정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차원을 넘어 자기네 나라를 지상천국으로 만들려한 신라인들의 자부심의 소산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정신이 삼국 중 가장 약한 신라를 통일의 주인공으로 우뚝 세웠음도 인정해야 한다. 내 나라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큼 행복한 국민이 어디 있겠으며, 국민의 정신을 그렇게 만든 나라만큼 교육에 성공한 국가는 또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