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81)>
- 병자호란(1)
정묘년의 치욕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조는 자기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승하여 명나라의 승인까지 받게 되자,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는지 후금에 대한 복수와 배척의 뜻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이 진정으로 정묘년 치욕을 갚고자 한다면, 왕실이나 종친, 훈신들 나아가 양반들이 가진 갖가지 특전을 버리고 재정을 확충한 다음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를 장만하는 한편 군대를 모아 훈련을 시키는 등 야무진 각오와 준비를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조와 중신들은 “소중화” 라는 관념과 대의에만 빠져 숨 가쁘게 돌아가는 주변정세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물론이요 실질적인 준비도 전혀 없이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문화 사대주의 사상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뼛속까지 떼놈을 상전으로 모시겠다는 것이지요~
지금도 소중화를 부르짓는 인간들이 많습니다. 6.25가 지난지 꼴랑 몇 년이나 되었다고~ 한심한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입니다.
그건 글코~ 어쨌든 후금은 이 즈음 중국 공략을 잠시 멈추고 서쪽과 몽고족 정벌에 나서 큰 성과를 거두었고, 드디어 홍타이 지는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1636년(인조14년)후금 사신 용골대가 사신으로 와 홍타이지가 황제로 오르는 일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자, 조선은 강력히 반발하며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소중화”를 외치는 조선이 오랑캐의 황제 등극을 동의할 수는 없었겠지요. 다음은 인조가 반포한 척화 교서의 일부입니다.
-정묘년의 변을 당해 임시로 기미할 것을 허락했는데 오랑캐들의 요구는 끝이 없더니, 요즘은 더욱 창궐하여 감히 참람된 칭호를 가지고 의논한다 하니, 어찌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있는것 이겠는가
-이에 존망의 형세를 헤아리지 않고 한결 같이 결단해 그들을 물리쳤으니, 충의로운 선비는 있는 책략을 다하고 용감한 사람들은 종군을 자원해 나라 은혜에 보답하라.
조선이 위와 같이 척화의 변을 토하고 있던 그때, 후금은 조선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라 이름을 청으로하는 황제국을 세웠고, 황제 자리에 오른 홍타 이지(청태종)는 명나라를 본격적으로 치기에 앞서 친명 배금을 노골화한 조선을 확실히 복속시켜 배후 후환을 없애겠다는 전략적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기어이 청나라가 대군으로 조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이 들려 오자, 조정은 조금전까지의 의기는 어디로 갔는지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청은 1636년(인조 14년, 병자년) 12월 3일, 3만의 군사만을 보냈던 정묘년과 달리 10만의 정예병을 보내 직접 한양을 치러 내려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진군 도상에 있는 성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으므로 진격 속도가 놀라웠고, 인조 일행은 늘 하던 대로 짐을싸 강화로 도망을 가고자 했으나, 이미 청군은 불광동 근처에까지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정말로, 레알~ 한 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조선입니다~ 에휴
<조선왕조실록(82)>
- 병자호란(2)
청군의 급속 남진으로 인해 강화로 가지 못한 인조 일행은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는데, 곧 청군이 쫒아 와 눈보라치는 남한산성을 에워 쌌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선 조정은 죽기로 싸워야 한다는 의견과 화친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 가운데 청군과 굴욕적인 물밑 교섭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 진영을 찾은 조선측
대표 박난영의 목이 잘리기도 했습니다)
남한산성 안의 조정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갈팡질팡 하던중 청 태종이 직접 남한 산성까지 내려 오게 되니, 조정은 작은 계책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없는 중대한 국면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바뀐 1637년 1월1일, 이 와중에도 조선 조정은 모두 꿇어 앉아 중화대국 명나라 황제의 만수 무강을 위한 망궐례를 올렸고, 이날 청태종은 청군진에 도착해 높은 곳에 올라 조선 망궐례 의식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눈보라가 몹시도 휘날리던 1637년 1월 17일, 청태종은 드디어 다음과 같은 글을 인조에게 보내 왔습니다.
- 정녕 그대가 살고 싶거든 빨리 성에서 나와 귀순하고, 죽고 싶거든 또한 속히 일전을 벌이도록 하라.
조선 조정은 화친 의견을 펴 온 최명길이 답서를 했는데, 신하들은 “왕이 성을 나가고도 임금이 보전된 경우는 없습니다. 그때 후회해도 소용 없을 것 입니다”라고 하며 최명길을 강하게 비난하였습니다.
(그럼 어쩌라고!)
결국 왕이 성을 나가는 것만은 면하게 해 달라는 내용이 담긴 최명길 초안의 국서가 청군에 보내졌고,
청군에서는 “황제가 이미 이곳에 온 이상 조선 국왕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더불어 척화 주장 신하 몇을 묶어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밝혔습니다.
조선 조정이 이 문제로 또 다시 갑론 을박을 벌이고 있던 때에 용골대가 최후 통첩을 했습니다.
- 황제께서 내일 돌아 갈 예정이니, 우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면 다신 사신을 보내지 마라. 추후에 남는 것은 조선의 멸망 뿐이다.
그러면서 용골대는 봉림대군과 비빈 등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어 쑥대밭이 되었으며 (살아 남은 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봉림대군과 인조의 비빈 등을 청태종의 동생 도르곤이 잡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결국 조선 조정은 모두 울며 불며 다음과 같이 인조에게 간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성에서 나가면 보존될 확률이 반반이지만, 나가지 않을 시엔 열이면 열 망하고 말 것 이옵니다. 전하!
삼전도의 굴욕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83)>
- 병자호란(3)
나라를 완전히 멸하겠다는 최후 통첩에, 조선 조정은 1월27일 청태종에게 마지막 국서를 보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뜻을 분명히 밝히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조선의 국서를 받은 청태종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해 주었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라. 그 은혜를 생각해 자자손손
신의를 어기지 않는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청과 조선은 군신의 예로 대하고 명과 단교한다.
-장자 등을 인질로 삼는다. (등등등등...)
삼전도 항복식을 거행할 단을 쌓은 청은 몸을 결박하고 관을 끌고 나오는 만주식 예를 면제해 주겠다는 큰 인심(!)을 썼고, 다만 죄인인 국왕이 정문인 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등 몇 가지 항복식과 관계된 요구사항을 전달하였습니다.
1637년 1월 30일, 마침내 인조는 통곡하는 백성들을 뒤로 한 채 정문이 아닌 서문을 통해 남한 산성을 나서 송파구 삼전동에 위치한 삼전도에 이르렀습니다.
인조는 “천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며, 청나라식 항복의 예인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번 땅에 머리를 소리가 나도록 부딪혀 조아리는 의식)의 예를 올리며, 항복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항복식을 마친 인조는 용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으로 돌아 왔습니다. 도성 거리엔 청나라 그리고 함께 온 몽고 병사들이 넘쳤고, 가옥은 불 타고 있었으며,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습니다.
청태종이 돌아 가자 곧 인조의 큰 아들 소현세자, 둘째 봉림대군 등도 통곡 속에 인질로 청나라로 떠났습니다.
또한 삼전도에 청태종 공덕을 찬양하고 항복을 기념하는 거대한 비가 세워졌고, 척화신으로 끌려간 윤집, 오달제, 홍익한 (3학사)는 목이 잘리어 나갔습니다.
또, 청군이 포로로 끌고 간 조선인이 수만에 이르렀습니다 (수만에서 수십만이라는 기록까지 있음)
그런데 이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오더라도 조선은 이들을 잡아 다시 보내야만 했고, 따라서 이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속환, 즉 돈을 주고 사오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붙잡혀 간 사람을 데려 오는 속환 금액은 갈수록 천정 부지로 뛰어 돈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시도를 하지 못 했고, 더 한 문제는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온 부녀자들의 문제였습니다.
자기 부인도 지키지 못한 주제에, 조선 사대부들은 돌아온 부인의 몸이 더렵혀 졌다는 이유로 나라에 이혼을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인조는 사대부들의 이혼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이런저런 다른 이유를 달아 어렵게 돌아온 부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보다 못 한 조정에서 이 여인들로 하여금 냇물(홍제천)에 몸을 씻게 하고 그들의 정절을 회복시켜 주는 의식을 거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시대 여인들의 수난사는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할 지경이라 하겠습니다.
(젠장인지 된장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