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전 일본에 조선의 도예를 전래하고, 조선 도공의 예술혼을 이어온 심수관가(家)를 조명하는 글이 동아일보에 1998년 6월 15일자∼7월 9일자(총 13회)까지 연재 된 적이 있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백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과 중국밖에 없었을 정도로 백자 제조법은 당시에 최첨단 하이테크였다.
하지만 일본이 임진ㆍ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조선도공을 납치, 백자제조기술을 강제로 입수하고 백자제조에 성공하자 도자기 생산 주도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태평양전쟁 개전과 종전교섭을 맡았던 도고 시게노리(東鄕武德; 1882∼1950) 전 일본 외상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에서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 직계 후손이며, 5살까지 박무덕(朴武德)이란 이름을 쓴 한국계란 사실은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가고시마 출신인 도고는 어린 시절 심수관 이웃에 살았다고 한다.
19세기말 일본인의 차별에 견디다못한 그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이 도고(東鄕)라는 사족 족보를 사들여 개명했다.
동경대 독문학부를 졸업한 도고는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주독일대사와 주소련대사를 거쳤다.
그는 태평양전쟁과 대동아공영권에 부정적이었으며 종전 직전 일왕과 각료들에게 포츠담 선언 수락을 설득, 일본을 위기에서 구한 양심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도고의 쌍둥이 손자인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는 현재 외무성 조약국장으로 재직중이고 또 다른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는 워싱턴 포스트 일본 특파원으로 1993년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를 펴냈다.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에서 서북쪽으로 약 50㎞ 떨어진, 2002년 월드컵 개최지 중 한 곳이기도 한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 히다카(日高)시에는 고구려신사인 고려신사(高麗神社, 고마진쟈)에서 관리책임자인 궁사(宮司, 규시)로 있는 고려징웅(高麗澄雄, 고마 스미오) 씨가 살고 있다.
고구려의 왕족인 약광(若光)을 모시고 있는, 1999년 현재 72세의 고려징웅 씨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재위: 642∼668)의 후손으로, 약광왕자의 59세손(孫)이다.
고려역에서 3㎞ 정도 가면 보장왕의 막내아들인 약광의 무덤이 있는 성천원(聖天院, 세이텐인)과 그의 사당인 고려신사(高麗神社)가 나온다.
고구려가 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본 열도로 건너갔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선진 기술자들이어서 황무지 개척이나 토기, 농기구, 금은장식, 무기 등의 제조에도 기술이 뛰어났고 해안 지방에서는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그 후 약광이 나이가 들어 죽자 유민들은 이 비운의 왕자를 기려 고려신사를 지었고 다른 지방으로 흘러들어간 고구려 유민들도 그 지방에 고구려와 관계가 있는 신사를 지어 추모했다고 한다.
고려징웅 씨의 선조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평양을 한창 공격하던 서기 666년의 일이었다. 그때만해도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왕래가 자유로왔다.
668년 나라가 망하자 왕족과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 지금의 도쿄 근교 무사시노(武藏野) 지방에 터전을 잡고 황무지를 개간해「작은 고구려」를 이루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이곳에 모여든 사람은 1천7백99명이었다.
이 마을의 지도자가 고려(高麗)란 성(姓)의 창시자인 약광(若光)이었고, 그가 바로 보장왕의 막내아들이었다.
서기 716년 당시 일본정부는 이곳에 고려군(高麗郡)을 신설하고 고려약광(高麗若光)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면서 군(郡)을 통괄하도록 했다.
고려군은 명치(明治)유신 때인 1897년(명치 29년)에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되어「고려군(高麗郡)」이 라는 공식명칭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이곳은 옛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신사(神社)를 지키고 족보까지 전수해 오고 있는데 명치(明治)기에 이르기까지 고려(高麗)라는 성(姓)씨는 일본에서 고려징웅 가족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종가에서만 고려(高麗)성씨를 쓰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고려향(高麗鄕)이라고 부르는 고려촌(高麗村, 고마촌) 사람들은 두 가지 전통을 꼭 지켰다. 장자에게 가문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려촌 내 사람들끼리만 결혼이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동경만 인근 오이소(大磯ㆍ어서오시오라는 남한(南韓)의 방언에서 유래)해안으로 상륙하여 사이타마에 정착, 고려촌을 이루어 살아왔던 것이다.
다음은 고려징웅 씨가 한 말이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 "처음 만들어진 족보는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이 족보는 7백여 년 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족보 첫머리에는 불의의 화재로 소실된 고구려 유품목록과 이를 애석해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1259년 화재로 고려(高麗, 고마)일가의 가계도와 각종 고구려 보물이 소실되자 흩어져 살던 고려 일족이 모여 다시 가계도를 작성했다.
이 때 복구작업에 참여한 성씨들이 고마이(高麗井), 아라이(新井), 아타라시(新), 혼조(本所), 간다(神田), 나카야마(中山), 가토(加藤), 요시카와(吉川), 후쿠이즈미(福泉), 오카노보리(丘登), 오노(大野), 시바키(芝木) 등이 참여한 점으로 미루어 이들 성씨도 고구려 후손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신사 측은 "직계만 고려라는 성을 쓸 수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손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약광이래 5백여년간 고구려인끼리만 혼인하면서 혈통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고려신사(高麗神社)에 하루 최대 17만명이 참배할 때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