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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26
강제 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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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한 플랜테이션에서 주민들이 강제 노역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일본은 작년부터 '사도 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 유네스코 자문 기관인 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에서 등재 '보류' 권고를 내렸다고 합니다. 이코모스는 '광산 채굴의 모든 기간에 걸친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해설·전시 전략을 개발하고 현장에 설치하라'고 권고했다고 해요. 일본 정부는 사도 광산의 세계 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대상 기간을 16~19세기 중반으로 제한해 신청했는데, 20세기 벌어진 조선인 강제 노역 논란을 피하기 위해 그랬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사도 광산은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있는 금속 광산이에요. 에도 시대(1603~1868)에는 금 광산으로 유명했다가, 태평양전쟁 기간(1941~1945)에는 구리·철·아연 등 전쟁에 필요한 금속을 확보하는 광산으로 쓰였어요. 과거 사도 광산에서 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어요. 에도 시대에 사도 광산에서 일했던 일본인 노동자들도 중노동에 시달리다 병에 걸리고 매몰 사고를 당하기도 했대요.
결국 일본은 사도 광산에 일본인 노동자를 대체할 인력이 필요해지자 식민지 조선에서 1000명 이상을 강제로 끌고가 일을 시켰어요. 여기서 일했던 조선인들은 폐에 먼지가 쌓이는 진폐증에 걸려 평생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오늘은 사도 광산에서 벌어진 일 같은 역사 속 강제 노역 사건들을 살펴볼게요.
플랜테이션 농업에 동원된 인도네시아인들
제국주의 시대에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등 서구 유럽 국가들은 아시아와 태평양에 큰 관심을 가졌어요. 고가의 향신료 등이 풍부한 이 지역을 차지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이 중 네덜란드는 향신료, 사탕수수, 커피 등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초기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향신료의 무역을 독점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자신들이 차지한 지역 이외에 있는 향신료 나무들을 모두 베었어요. 또 높은 향신료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차지한 지역 내에서도 나무들을 베어버렸죠.
18세기부터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설탕과 커피, 차 등을 재배하는 플랜테이션(대규모 농장)을 만들어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했어요. 당시 자바섬의 설탕과 커피가 세계 공급량의 4분의 3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해요. 이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사탕수수와 커피 등을 재배하게 함으로써 이뤄낸 결과였어요.
강제로 플랜테이션 농업에 동원된 인도네시아 주민들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정한 수확량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 했어요. 자기 땅이 있는 농민들은 토지 5분의 1 이상을 상품작물 재배를 해야 했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식민 정부의 플랜테이션 농업에 동원돼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어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정한 수확량을 맞추지 못하면 집단적으로 처벌된다는 위협을 받았다고 해요.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탕수수와 커피를 더 많이 재배하기 위해 자바섬의 열대우림을 개간합니다. 결국 농민들은 자신들이 먹고살 식량을 재배할 여력이 없어지고 땅도 부족해지면서 엄청난 기근과 빈곤에 시달리게 됩니다. 주민들은 열대기후 속에서 장시간 일하면서 탈진으로 쓰러지거나 사망하기도 했어요. 반면 네덜란드는 여기에서 막대한 이윤을 챙겨 경제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죠.
노예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의 강제 노역
아프리카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이 가장 심각한 곳이었어요. 아프리카 각 국가를 식민지로 만든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무역으로 팔아 이익을 챙겼고, 팔려간 아프리카인들은 대부분 사탕수수와 목화, 코코아 등을 재배하는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됩니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많이 팔려갔다고 해요.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은 무덥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하루 17시간씩 고된 노동에 시달렸어요. 이들의 강제 노역으로 설탕 가격이 하락하면서 유럽인들은 더욱 쉽게 달콤한 설탕을 맛볼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설탕 소비가 급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팔려간 아프리카인들도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강제 노역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어요. 19세기 초 미국 남부의 경제는 농업이 토대였어요. 담배와 목화를 주로 재배했는데요. 1793년 조면기(목화씨를 빼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면화 생산량이 100배 이상 늘어나게 됩니다. 이에 미국 남부 농장 주인들은 목화 농장에서 일할 값싼 노동력을 원하게 됐고,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인들을 더 많이 사들이게 돼요.
흑인 노예들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광대한 목화 농장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온종일 일했어요. 참다못해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잡힐 경우 끔찍한 처벌을 받았어요. 이들이 도망가는 걸 막기 위해 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의 발에 쇠사슬을 채운 채 일을 시키기도 하고, 몸에 낙인을 찍기도 했어요. 이러한 아프리카인들의 강제 노역으로 목화는 담배를 제치고 미국 남부 농업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작물이 되게 됩니다.
1850년에는 '도망 노예법'이 만들어졌어요. 이 법은 노예 소유주가 미국 북부 지방으로 도망간 노예를 잡아오는 것을 허용했어요. 심지어 노예가 도망치게 도와준 사람도 처벌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이 법으로 인해 도망친 아프리카인들은 언제 다시 붙잡혀 지옥 같은 목화 농장으로 끌려갈지 모를 처지가 되었습니다. 힘겹게 얻어낸 자유를 하루아침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죠.
물론 미국 내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사고파는 일, 이들을 강제 노역에 부리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어요. 도망 노예법이 만들어지는 걸 보고 미국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는 노예제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이 책은 출간 첫해에 미국에서만 30만부 이상 팔리며 노예제의 부당함에 대한 공감대를 일으켰어요. 링컨 대통령은 이 책을 '노예해방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책'으로 평가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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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한 목화 농장에 노예로 팔려가 고된 노동에 시달린 아프리카인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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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제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책 '톰 아저씨의 오두막' 표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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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광산 갱 내부 모습. /교도통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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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 기획·구성=오주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