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당히 진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평등한 세상을 원했고 노력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는 지극히 교과서적인 가치관을 가졌으면서도 열정이 넘쳤던 학생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 봄방학하는 날이면 나눠주던 상급학년용 교과서들을 앞자리에서 뒤로 반 보내고 뒷자리부터 앞으로 반을 보낸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과목별로 노끈에 묶여 교실로 배달된 책들 중 맨 위에 있던 책과 맨 아래에 깔려있던 책에 노끈으로 묶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전혀 새책을 받은 기분이 들지않기 때문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빳빳하고 깨끗한 새 책을 받을 때 키가 좀 크다고 뒤에 앉게 된 친구들은 심지어 겉장이 더럽혀져 있거나 파손된 책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한 과목을 그렇게 나눠줬더니 이번에는 맨앞과 맨뒤의 학생들만 질이 떨어진 책을 받았다. 그래서 방법을 달리하여 두 번째 교과서는 앞에서 두번째 줄부터, 세 번째 교과서는 세 번째 줄부터 나눠주어 모두가 한 권 정도만 안 좋고 나머지는 깨끗한 책을 받아갈 수 있게 했었다. 참 황당했던 발상이었는지 중학교 동창 사이에는 간간히 동창모임의 안주꺼리 추억이 된 에피소드였다.
그럼에도 내 중학교 동창들에게는 나는 미스테리한 존재이다. 그들은 내가 화난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아마 없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는 호기심 많고 실험정신은 투철했으되 나의 얘기를 친구들과 나눈 경험이 거의 없다. 쉬는 시간마다 주변에 모인 친구들과 UFO 얘기를 했고 10대 불가사의에 대해 얘기했으며 세계2차대전 전후의 독일에 대해 얘기했다. 제인에어를 얘기했고 To sir with love 가사를 외웠고 Love never says I'm sorry의 러브스토리 대사를 얘기했으나 내 대화에서는 내가 없었다. 하루는 친구가 내게 와서 묻기를 "너는 화가 나거나 초조한 적이 없느냐? 찡그린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몇 년의 공백기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육아를 겸하며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우선 미국가기전 사원으로 지냈던 2년의 직장 생활은 대학원 연구실과 유사했었으므로 과장급으로 입사한 새로운 직장에서의 사원,대리급의 팀원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다. 가방끈은 길지만 사회생활이 전무해보이는 촌뜨기같은 상사를 일부 팀원은 무시했어서 파트장은 자주 잔소리처럼 멘토링을 해주었다. 아침 저녁으로 주차장에서 만나 같이 출퇴근하면서, 팀원에게 지시할 때는 내 자리로 불러 나는 앉아서 팀원은 서서 듣게 하란다. 그러다보면 지시하는 자와 지시받는 자의 위계질서를 팀원이 느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맨 안쪽에 낮았으므로 회의 다녀오다가 입구의 팀원에게 전달하고 내 자리로 왔었으니 많은 시간 나는 서서 말하고 팀원들은 앉아서 들었을 터였다. 그게 답답해 보였는지 다양한 충고를 해 주었다. 그래도 사실 나는 그 충고들대로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회사에서 나는 자신의 경험을 나에게 얘기해주는 많은 멘토를 만났다.
오늘 예전에 같이 제품을 개발했던 동료이면서 내가 멘토로 삼은 분과 만나 잠시 차 한잔 했다. 14년지기이면서 대부분은 내 고민을 들어줬던 분으로 아마 우리의 입장이 역전되어 내가 그 분의 얘기를 들어준 것은 14년의 기간 중 채 2년이 안 될 것이다. 한 때 우리는 그 분이 속한 조직의 다음 임원은 그 분이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젠 50대 중반을 바라보는 이제는 수석 십몇년차의 노장수석으로 남아계신다. 그 분은 자회사의 임원으로 있는 옛동료를 며칠 전 만난 얘기를 했다. 자회사의 옛 동료가 회장일가가 참석하는 회의를 대표이사 대신 들어가서 어떤 마음으로 보소했고 심지어는 예상 질문에 대한 보충 자료와 기발한 답변을 회장일가의 어떤 기대치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하고 준비했는지 등등. 발표와 질의 응답이 끝난 후 회장일가의 기립 박수와 개인 명함을 받은 그 분은 그 달로 바로 임원 승진을 했다고 한다. 개인 명함의 후속타로 그룹 Headquarter로부터 어느 계열사든 원하는 곳을 말하면 자회사가 아닌 계열사의 임원으로 발령줄 것을 약속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회사의 창립멤버로서 그 회사의 대표직이 오히려 꿈이라고 했다. 대신 그 때까지는 지금 가끔 요청 들어오는 자기 인생살이의 강연자로 살 수 있는 좀 더 여유롭고 쟈유로로운 삶을 선택했다.
처음이었다. 내 동료이자 멘토였던 이 분이 누군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얘기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전까지는 마치 신선과 대화를 하듯 세상살이에 초연한 멘토였기 때문에 대화를 하다보면 머리속이 정화되고 상쾌해지는 느낌을 주던 멘토였다. 그는 자회사의 임원인 옛동료의 얘기를 하며 많이 수줍어해했다. 멋쩍자고 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의 삶을 알고 싶어하는 본능을 가지고 산다고 믿는다. 아마 내가 조직이 바뀔 때마다 계속 멘토를 구하는 이유 또한 같은 본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잘 모르겠고 헷갈리는데 남들은 이럴 때 어떤 판단을 하는지 의견을 구하는 행위가 바로 남의 삶 엿보기 1호 행위이다. 따라서 이 분의 관심은 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호기심이다.
SNS가 유행인 것은 물론 공유되는 정보의 유용함때문일 수도 있으나 누군가의 삶이 공유되기 때문일 수 있다. 공유되는 남의 일상은 달콤하고 짜릿한 것이다. 같은 취향을 발견하여 열광하고 지극히 다른 취향 내지는 역겨운 정보를 접하여 찡그리면서도 팔로우한다. 가랑하는 이들과 자주 만날 수 없을 때 그들의 근황을 접하고는 반가워할 수 있다.
심지어는 신문이나 잡지의 가쉽기사를 통해 나와는 만난적도 없고 만날 일도, 만날 기회도 없는 어느 유명인의 말초신경자극하는 이야기에 나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소설이 즐거운 것도 같은 이유다. 에세이가 재미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우리는 매일 다양한 매체와 관계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접한다. 이렇게 접한 경험이 다시 내 삶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나의 가치관이 되고 나의 선택이 된다.
가끔 남들은 어떻게 사나 궁금하지만 못 물어보는 마음 약한 이들을 만난다. 그 때마다 궁금하면 내게는 물어보셔도 된다고 나는 말한다. 오지랍넓게 뭐가 옳고 뭐가 그르다는 판단만 대신 해주지 않는다면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나의 미국인 친구들 스타일의 관심이 고프다. 내가 논문을 한창 쓰던 시기에 군대특례때문에 먼저 귀국해 직장다니던 남편과 많이 다투었었다. 항상 생글거리던 내 얼굴이 어두웠었는지 6명 모임 친구들이 모두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그 여름에 피츠버그로 출장온 남편을 만나고 와서도 별 말이 없던 내가 걱정이 되던 친구들은 가을 학기 초입, 한 친구의 집들이에서 내가 아기를 임신했다고 얘기를 하는 순간 모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먼저 묻지않고 기다려줬고 혹시나 나혼자 아파할까봐 그 여름동안 그들은 교대로 내 연구실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해 주었었다. 신기한 것은 그들끼리도 서로 내 이야기를 묻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마음속으로 나를 걱정해주었고 나의 임신소식에 비로소 밖으로 표현해주었다. 그 때 배웠다. 관심을 어떻게 갖고 어떻게 표현해야하는지. 그래도 다른이의 삶에 관심을 가져주는 세상이 고맙고 기껍다.
첫댓글 관심이란 질문 대신 기댈수 있는 어깨를 빌려주는 것... 맞나요? 어디서 들은것 같아서. 관심이 아니라 사랑인가?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