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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아이들>을 찾아 나서다
봄이라고 하기 엔 이른 감이 있는 2월말 오전에 <책과 아이들>을 찾았다. 부산시 연제구 거제동 주택가에 위치한 그곳은 찾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건물을 배경으로 주변 풍경을 몇 컷 찍고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는 따뜻한 남쪽을 상징하는 종려나무와 동백꽃들이 빨갛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담장을 호위하며 서있는 키 큰 소나무들이 이 장소에 쌓인 시간의 켜를 가늠케 한다.
<책과 아이들> 대표인 강정아/김영수 부부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하루하루 숨가쁘게 살아가는 긴장된 나의 모습과 달리, 편안하고 여유로운 얼굴이 먼저 다가온다. 이곳을 운영하는데 왜 바쁘지 않겠냐마는 얼굴에서 풍기는 여유는 부러웠다. 두 분은 <책과 아이들>을 운영하게 된 이유를 간단히 설명한다.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책을 제공하고, 책과 관련한 다양한 활동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국아동문학에 평생을 바친 이오덕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책과 아이들>은 서점이다. 이곳 활동이 확대되면서 회원과 주민들이 문화활동을 운영하기 위해 <평심마을 문화원>이 3년 전부터 활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외부자의 눈에는 둘 다 <책과 아이들>로 보인다.
<책과 아이들>의 내력을 들어 보았다. 결혼 후 강정아 대표는 전업주부로, 남편은 대기업 사원으로 경기도 수원에서 생활하던 중, 강 대표가 1994년부터 어린이도서연구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연구회는 1977년 부산에서 조직된 양서협동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양서협동조합은 얼마 전 부산에서 다시 부활되기는 하였지만, 1979년 부마항쟁의 배후로 지목받아 해산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이 서울로 진출하여 1980년 5월 좋은 책 읽기 모임으로 어린이도서연구회를 다시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항공교통이 발달하지 않던 1970년대는 부산이 일본 문화가 상륙하는 입구였다. 그때 일본에서 유행하던 독서교육 문화가 부산에 뿌리를 내리고, 일정 정도의 숙성 과정을 거쳐 서울로 상경했다. 지방의 힘이 이런데 있다.
1997년 부산으로 내려온 강대표는 대기업을 그만둔 남편과 함께 좋은 책을 선택하고 제공할 수 있는 서점이 없는 것을 알고, 서점 운영을 시작하였다. 우선 필요한 공간을 살림집이 가까운 곳에 세를 얻어 마련하고 서점과 육아공동체를 함께 운영하였다. 서점은 12평이었다. 당시 부산에서도 육아공동체 운동이 막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육아공동체로 출발하여 마을공동체로 확대 발전한 곳도 있다. <책과 아이들>은 서점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이들 단체들과 차이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일반 서점들과도 다른 특징을 가졌다. 서점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아이를 키우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대표의 철학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또 읽게 하고,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을 스스로 고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도 교육과 육아활동이다. 이러한 철학에 공감한 회원의 증가로 공간이 협소해지자 2001년에는 부산교육대학 근처로 이전하였다가, 2009년 현재의 공간에 정착하게 되었다.
공간이 중요하다
강대표가 <책과 아이들>을 운영해 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 공간이었다. 책이 있으면 책을 읽을 공간이 있어야 하고, 공간이 있어야 사람이 만날 수 있고, 사람이 만나야 소통하는 아이들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곧 공간이 사람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출발 당시 12평과 비교하면 지금은 엄청난 변화이다. 넓은 마당을 보유한 5층 건물을 마련하는 데 두 대표는 모든 것을 투자했다. 그래서 마이너스통장에 빚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또 다른 반려자가 되어 있다. 돈은 돌아야 된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
방문자에게 가장 자랑하고 싶은 게 공간이란다. 1층에는 서점과 구름빵, 2층에는 유치원생이나 초등생들이 단체로 와서 시를 노래하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읽어주는 그램책 감상, 단편영화를 보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책을 읽는 공간, 친구들끼리 책을 읽는 공간, 청소년들의 독서모임이 이루어지는 공간 등 여러 종류의 방들이 있다. 5층에는 널직한 갤러리가 있다.
공간이 어떻게 사람을 키우는지 궁금했다. 1층 구름빵을 예를 들어준다. 구름빵은 사랑방 같은 곳이다. 강대표는 일찍부터 사랑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수원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할 때 자기 집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놓고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놀 수 있는 사랑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책과 아이들> 사랑방인 구름빵에서는 아이들이 모여 책을 읽기도 하고, 북콘서트도 하고, 축제를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강연을 듣기도 하고, 연극을 하기도 한다. 구름빵은 사람들이 모여 문화를 만드는 공간이다. 강대표는 이 공간이 또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리라 믿는다.
이런 행사는 이들 부부대표가 준비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적당히 벌고 잘살기>라는 북콘서트가 진행되었다. 준비는 모두 여기에서 활동하는 고등학생들이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학생들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저자나 주인공들과 만나고 싶어지면, 스스로 기획하고 섭외하고 준비를 한다. 부부대표의 역할은 공간을 빌려주고, 아이들의 질문에 경험을 나누어 주는 역할이다. 이 정도면 청소년을 제대로 키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공간 저 공간을 다니면서 받은 색다름은 군데군데 전시된 책들이었다. 전문가 초청강연이 기획되면, 관련 책은 연령대별로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게 각 방 곳곳에 펼쳐 두어진다. 두 대표가 공간을 꾸미는데 고민했던 흔적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독서지도에 있어 직접지도보다 환경조성이 어른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책방 내에서도 공간구성과 배치에 늘 신경을 씁니다. 귀엽고 이쁜 인테리어가 아니고 ‘책방이 곧 책이다’는 생각으로 환경구성을 합니다. 강대표가 생각하는 공간의 의미이다.
좋은 책 고르기
아이들에게 읽힐 좋은 책을 고르는 일은 중요하다. 이 일은 아이들을 위한 일일뿐만 아니라 책과 관련한 작가, 출판사, 편집자 등 전문가를 키우는 소비자 운동이기도 하였다. 강대표가 이 사업을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 아동도서는 대형출판사가 독점한 전집류 일색이었다. 값싼 양질의 단행본이 거의 없었다. 당시 강대표가 전집류보다 단행본을 찾아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단행본에는 작가가 있고, 평론가들의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정한 질이 보장되었다. 반면 대형 전집류는 유명 출판사 이름으로 출판되다 보니까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책들이 많았다. 상업주의가 숨어 있었다. 전집류는 독서교육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비싸게 산 책을 억지로 읽히려는 엄마의 욕심이 아이의 독서의욕을 꺾기 때문이다. 강대표는 좋은 책을 일일이 찾아 나섰다.
강대표가 책을 선정하는 기준은 분명하다. 훌륭한 외국그림책에 맞대응해 우리 그림책 비중을 높였다. 우리 옛이야기를 찾아서 제공하였다. 한때 만화그리스로마신화, 해리포터 등 외국만화가 아동도서 시장에서 큰돈을 벌 때, 이런 책을 갖다 팔지 않았다. 오히려 강대표는 자극적인 만화가 아니라서 소비자에게 배재되고 알려져 있지 않은 훌륭한 삽화와 번역서를 찾아 추천하였다. 정말 아이들이 읽기에 무엇이 좋은 책인지를 먼저 찾아 소비자에게 추천하는 작업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돈 벌이에 눈을 감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서점은 1, 2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꽤 많은 책들이 꽂혀있지만, 그렇다고 일반 상업 서점과 비교하면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서점에 전시된 책은 <책과 아이들>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어차피 모든 책을 갖출 수 없을 바에야 여기만의 특색을 보여 주자는 게 부부대표의 생각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책이 생태와 탈핵관련 책, 이 서점의 철학을 담고 있는 이오덕 선생님, 권정생 선생님의 책, 수시로 진행되는 작가와의 만남 프로그램과 관련한 책, 어린이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도서, 청소년 인문학교실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이 읽는 도서 등이 이 서점의 주류로 취급되고 있다. 강대표는 서가가 곧 <책과 아이들>의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책을 주문하면서 서가의 책을 채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서점을 이용하는 고객은 대체로 3세부터 고등학생까지라고 한다. 유아들이 엄마와 함께 책을 고르기 위해서 서점이 필요하다. 서점은 단순히 책만 사는 곳이 아니다. 이책 저책 비교하면서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서점이 지니는 더 중요한 가치라고 강대표는 생각한다.
책읽기와 인문학
아이들이 어떻게 책과 사람과 어울리는지는 여기서 진행되는 독특한 프로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행 프로그램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고, 몇 가지 유형들을 소개한다.
외부 아이들인 주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한반아이들이 오는 서점나들이’ 프로그램이 있다. 이 용어는 여기서 처음 만들어 여러 곳으로 확산되었다. 학교의 같은 반 친구들이 함께 서점 나들이를 한다는 뜻이다. 숫자가 많아서 아이들이 그다지 집중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슨 특징이 있다는 걸까. 오늘날 부모들이 바쁘다 보니 서점 구경을 해 본 아이들이 적다. 그래서 한반이 움직이기 때문에 누락되는 아이들 없이 모두 경험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곳에 오면 책을 고르는 것은 물론이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도 듣고, 읽어주는 책을 함께 감상하며, 영화도 보고, 갤러리 전시도 본다. 이 프로그램은 이야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해서 책의 가치를 알게 한다.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이곳을 찾는 출발점이다.
유아들은 부모와 함께 책을 읽는다. 어른은 가능한 아이들에게 질문을 자제하도록 지도받는다. 아이들이 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이 터져 나올 때 준비된 어른은 귀가 열린다.
초등생들은 특정한 주제를 선정하여 책을 읽고 스스로 책의 전시를 기획하고, 홍보 포스터를 만들기까지 전 과정을 연결해서 진행하기도 한다. 2층 벽에 고구려 관련 포스터가 걸려있어 어떤 활동이냐고 물어 보았다. 초등학생들이 생활사박물관을 읽는 과정에서 그 내용을 전시 소개하기로 기획하고, 고구려 관련 그림과 책을 모으고 포스터를 직접 그려 스캔해서 인쇄하고, 5층 갤러리에서 책과 그림을 전시하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일정 기간을 단위로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여 책을 읽고, 결과 발표와 글 모음집을 제작한다. 지난 해에는 6개 팀이 기생충, 심리학, 반지의 제왕, 독도, 웹툰, 하이타니 겐지로 등 6개 주제로 책을 읽었다. 이와 관련한 강연, 독립영화 상영, 영상발표, 주제발표를 하기도 하였다.
<책과 아이들>에서 책 읽기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강연도 듣게 하고, 발췌를 하게하고, 자기 글도 쓰게 한다. 그리고 더 확대해 연극이나 전시회까지 기획하기도 한다. 강대표는 이 과정이 아이들에게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무척 자란다고 한다. 가치관도 변하고, 지속적으로 집중하는 힘도 커지면서, 결국 인간으로 성장하는 힘을 키운다. 강대표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이런 것이다.
전망과 과제
강대표는 <책과 아이들>과 주변의 관계가 좀 더 확대되기를 희망한다. 현재는 회원제로 운영되지만 언젠가는 지역과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이를 위한 시도로 연만들기나 떡만들기, 동네할아버지 이야기 듣기 등을 마을 전문가를 초대해 진행하고 있다. 나아가 지역에서 출판되는 좋은 책을 발굴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러 오는 강사들을 지역에서 모시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 때문에 고민도 적지 않다. <책과 아이들>은 서점에서 팔리는 책의 수익금, 프로그램의 이용 비용 등으로 운영된다. 부족분은 대표 부부와 선생님들의 희생으로 채운다. 책을 판매한다는 사실에 간혹 수익을 남기는 영리단체로 오인 받기도 한다. 운영자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부분이다.
청소년들은 물론 아이들이 시간이 없다. 학교와 학원을 다녀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책을 읽히고 이에 따른 프로그램을 스스로 기획하게 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시간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안타깝다.
이번 <책과 아이들> 탐방은 일상의 공간에서 인문학 활동을 수행하는 단체를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 또한 이곳이 지역 인문학 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