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리처드 도너 감독의 <컨스피러시>라는 영화 때문이었다.
원제목이 '음모 이론(Conspiracy Theory)'인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컨스피러시> 포스터 주인공 제리 플레쳐(멜 깁슨)는 뉴욕의 택시 운전수. 하지만 이는 생계를
위한 것이고 주된 일과는 신문 내용을 분석하여 음모를 찾아내는 일이다.
찾아낸 음모는 자신이 타이핑하여 <음모 이론>이라는 잡지로 만들어
소수의 정기 구독자에게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괴한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가 찾아낸 음모 중 하나가 실제로 그 괴한들의 집단이 계획하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온 제리는 평소 짝사랑하던 법무성 변호사 앨리스 슈튼(줄리아 로버츠)에게 도움을 청한다.
제리 플레쳐가 뒷자리 승객에게 들려주는 음모론은 다양하다. "뉴욕의 수돗물에는 불소가 섞여 있는데 이는 충치 예방 목적이 아니라 수돗물을 먹는 뉴욕 시민들(주로 유색인)의 의지력과 사고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라든가, "오클라호마주 연방 정부 청사를 폭파한 민병대는 유엔이 미국을 정복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일을 저질렀다"라는 것 등.
이 무렵 제리 플레쳐가 예전에 그 괴집단의 살인 병기로 세뇌되었던 사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낸다. 살인을 위한 꼭두각시로 조정되어 살해하도록 지령받은 인물은 바로 슈튼의 아버지였던 연방법원 판사. 그러나 그는 도리어 판사의 신뢰와 도움으로 잃었던 기억을 점차 되찾는다. 제리가 세뇌 당했다는 것을 믿어주고 이를 폭로하려던 판사는 결국 괴한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딸을 돌봐줄 것을 제리에게 부탁한다. 기억을 되찾아 가는 제리가 오히려 앨리스를 '그들'이라고 불리는 괴집단으로부터 보호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 중에서 제리 플레쳐는 광적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사 모은다. 서점에 들어가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눈에 띄기만 하면 모두 사 모으는데, 그를 조정하는 '그들'은 이 책의 소재를 추적하여 제리를 쫓아다닌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음모론을 다룬 영화에 등장한 것이 단순한 시나리오 작가의 상상력은 아니었다. 1980년 미국 뉴욕에서 한 청년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비틀즈의 멤버 존 레넌. 그의 아들은 살인범 마크 데이빗 체프먼은 지령에 따라 인형처럼 움직이는 꼭두각시일뿐 실제로는 CIA가 배후에 있다고 주장을 해 관심을 모았다. 마크 데이빗 체프먼은 사건 직후 살해 현장에서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체포될 때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지난 2월 초 SBS-TV의 '호기심 천국'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CIA가 만든 살인 병기 꼭두각시에 대한 내용을 방영한 바 있다. CIA는 'MK 울트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전문 킬러 양성을 했고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스왈드나 존 레논의 암살범 마크 데이빗 체프먼도 이 프로그램으로 양성된 살인 로봇이었다는 것이다.
또 호기심 천국에서는 꼭두각시 프로그램을 입력 당했다고 주장하는 로널드 코헨이라는 사람의 말도 인용했다. 그는 '감금 상태에서 LSD 등 여러 종류의 환각제를 엄청나게 투여당했고, 명령에 따라 아무나 암살하고도 동정심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행동을 금세 잊어버린다'고 증언했다.
미국의 작가 알렉스 콘스탄틴에 의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의 내용에 살인을 유인하는 말이 써 있으며 꼭두각시를 프로그래밍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한 것같다고 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다른 암살 사건에서도 발견되었고, 따라서 그 책이 암살 프로그램과 관련되었을 것이 라고 본다는 것이다.
실제 <호밀밭의 파수꾼>(문예출판사 펴냄)의 줄거리는 음모나 암살을 연상케 하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미국 최대의 출판사 램덤하우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소설'과 미국 여대생이 뽑은 '20세기 100대 소설'에 꼽힌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음모에 대한 기억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요즘 우리나라를 한창 떠들썩하게 만드는 교육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주인공 홀든은 키가 190cm나 되는, '허우대 멀쩡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며 뉴욕의 부잣집 아들이다. 아버지는 재벌 회사 고문 변호사로 아들의 교육을 돈과 권위 의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진실을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없다. 실망스러운 학교 생활, 거짓과 허위로 가득 찬 주변 환경에 실망하여 공부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다. 영어를 제외한 다른 모든 과목에서 낙제 점수를 받고 결국 퇴학을 당한다. 처음 당하는 일도 아니다. 벌써 네 번째 퇴학이다.
그러나 의외로 홀든은 불량 학생이 아니다. 그는 허위와 불성실을 가장 싫어하는, 민감한 감수성과 결벽증을 가진 학생이다. 학교나 아버지로 상징되는 가정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혼탁한 현실로 다가오고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홀든은 크리스마스 사흘 전 토요일에 학교 기숙사에서 뛰쳐나온다. 그러나 그는 가정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뉴욕 거리를 헤맨다. 그 사흘 동안 데이트 상대였던 소녀들, 동급생의 어머니, 선생, 출세한 졸업생, 영화 배우, 유명한 피아니스트, 사기꾼, 창녀, 변태성욕자, 택시 기사 등을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홀든을 위로하기는커녕 더욱 우울하고 절망으로 치닫게 한다. 그는 서부로 도피하겠다고 결심하지만 도피 직전 만난 여동생의 순진무구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결국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고 그것들은 수용하기 시작한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바, 선진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그래서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가 자녀를 보내고 싶어하는 미국의 학교에도 왕따, 학교 폭력, 성적 불량에 의한 낙제, 극단의 조치인 퇴학, 더럽고 불량하기 짝이 없는 기숙사 룸메이트, 잘난 척하는 선배들, 학생의 감정이나 상황은 무시한 채 훈계만 늘어놓는 '밥맛'인 교사, 학교 상황은 전혀 모르고 자기 자식이 최고인 줄 아는 동급생의 엄마 등 우리를 우울케하는 비교육적 요인은 다 존재한다. 거기에 학교에서의 총격 사건은 거의 몇 달에 한번 꼴로 일어나고 마약과 창녀, 변태 성욕자 등의 유혹이 우리나라에서보다 훨씬 접근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미국을, 캐나다를, 뉴질랜드를 동경한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미래와 행복을 접어두고 온 가족이 이민가거나 가족이 별거를 하더라도 그 나라들에서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음모 이론'과 'MK 울트라 프로젝트'의 꼭두각시와 <호밀밭의 파수꾼>, 그리고 우리의 교육. 어떤 상관 관계를 찾을 수 있겠는가? 사실 암살 지령 방법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선택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소한 영화 <컨스피러시>과 <호밀밭의 파수꾼>는 절망스러운 현실에서의 해결책으로 같은 처방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 즉효약은 우리가 아주 흔하게 생각하고 누구나 쉽게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뢰와 사랑'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이 여동생 피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몇 천 명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 주는 거지. 애들 이란 달릴 때는 자기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어쩌면 우리의 아이들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바보같은 생각'이라고 무시하고 교수로, 외교관으로, 의사로 만들겠다고 닦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떼어내 멀리멀리 쫓아 보내버리는지도 모른다. 이런 행위가 자녀를 스스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뜻대로 조정되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내는 것과 다를 바 있을까?
문득 우리의 교육 문제를 조기 유학 등 '회피와 개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에 앞서 '신뢰와 사랑'으로 극복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그러나 부모가 생각하는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는 안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길 간절히 원하는 자녀 입장에서 본 '신뢰와 사랑'이 상당 부분의 교육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나의 기대는 너무 낙관적인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