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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자료>
◈제1강 : 김범석 질병관리본부 공중보건의
에어컨 하나
타는 듯한 여름의 열기가 밤까지 이어지던 그날 새벽 3시. 한 통의 전화가 울렸다.
이곳 국립 소록도병원에서는 당직이어도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새벽 3시에 전화를 하는 일은 드문 편이다. 마을 환자들도 아주 아파도 새벽에 간호들 괴롭히면 안 된다고 해서 조금 참았다가 아침에 오는 편이다. 간호사들도 조금 참았다가 5시,6시가 되어 한꺼번에 보고를 하곤 한다. 새벽 3시에 오는 콜은 아주 급한 콜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덥고 열대야가 이어져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었는데, 잠이 든 지도 얼마 안 되어 새벽 3시에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싶어 그런 건 아니었는데 단잠을 깨우는 콜 인지라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마을에 사는 박상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박상원 할아버지. 부인인 이희자 할머니께서 외래 오실 때 같이 오셔서 어렴풋이 얼굴이 기억나던 할아버지였다. 그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단다. 엄밀하게는 돌아가신 채로 발견된 것이었다. 환자분이 병동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돌아가신 경우에는 당직 의사가 마을로 가서 사체 검안을 하고 사망선언을 하게 되어 있어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관사를 나섰다.
소록도병원은 섬 전체가 병원이다. 여의도의 1.5배 되는 섬 전체가 병원이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한센병 환자들은 섬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입원하는 셈이 된다. 지금은 640여명의 환자들이 입원해있지만, 해방 직전 한때는 6000여명이 입원해있었다고 하니, 베드 수로 따지면 아산병원, 삼성의료원 저리 가라 하는 큰 병원이다.
하지만 여기의 입원 개념은 사회에서의 입원개념과 조금 다르다. 마을이라고 하는 일반 생활 구역이 별도로 있고, 우리가 보아왔던 베드가 있고 병동, 스테이션이 있는 병원은 따로 있다. 환자가 입원하게 되면 마을에 배정을 받게 되고, 일반 가정집 같은 구조의 마을에서 생활을 하면서 외래방문도 하고, 필요하면 병원 속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지금은 한센병 자체는 전염성이 없어 문제가 되지 않고, 환자들의 평균 연령이 74세이다 보니 당뇨 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들을 주로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내과가 가장 일이 많고 환자도 많아서 나는 매일 외래, 내시경, 초음파는 기본이고, 내 이름으로 입원되어있는 50여명의 병동 환자 회진까지 돈다.
그래서 평소에 마을 방문은 잘 하지 못했다. 다른 공보의 선생님들은 마을 방문 즉 왕진을 종종 가곤 하는데, 나는 도저히 시간이 없어 엄두를 못 내었다. 사실 마을에는 진짜 아파도 말 한마디 못하고 외래에 갈 기력이 없어 끙끙거리면서 참고 지내는 환자분들이 많다. 이런 환자분들은 우리가 찾아가 주면 정말 고마워한다. 그런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마을에까진 찾아가진 못하고, 오는 환자들도 감당 못해 절절 매곤 했다.
새벽 3시에 엠뷸런스를 타고 마을에 가는데, 골목골목에 지팡이 짚고 새벽 기도 가는 환자들이 보였다. 어두컴컴한 새벽에 교회에 가는 환자들.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길을 가다가 넘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걱정도 잠시. 그들은 맹인이었었다. 이곳 환자들은 교회에 참 열심히 다닌다. 새벽기도 가다가 혹시라도 넘어지면 뼈 부러져서 안 된다고 새벽기도 가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서는 어딘가 있을 자신을 버린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인류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신앙 말고는 이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서일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다가 이윽고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했다. 모기 때문인지 방문은 닫혀져 있었다.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방안의 풍경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역한 냄새가 코를 습격했다.
똥 오줌이 뒤섞여 나는 냄새에 땀냄새, 상한 음식물 냄새, 바퀴벌레 냄새까지…
할아버지의 집은 나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방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 사사삭 바퀴벌레들이 들어가는 소리에 귀가 거슬렸다. 손가락만한 슈퍼바퀴벌레에서부터 손톱만한 짜잔한 바퀴벌레까지 순식간에 이불과 장롱 밑으로 숨어 들어갔다. 오늘 부식으로 나왔던 빵은 부스러기가 되어 방안에 흩어져 있었고, 그 주위로 개미떼들이 일렬로 줄을 맞추어 모여들고 있었다.
방 안에는 20년은 넘어 보이는 금성 선풍기가 털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는데, 환기가 안되어 새벽 3시에도 찜통 그 자체였다. 후끈하니 습기와 열기가 올라오는데 역한 냄새가 나는 증기 사우나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그 찜통 속에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채 누워있었다. 할머니 혼자 옆에서 ‘아이구 이를 어째, 아이구 이를 어째’ 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셨다. 근육이 굳은 걸 보니 아마도 돌아 가신지 몇 시간 지난 것 같았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잠이 들었다가 새벽예배 보려고 영감을 흔들어 깨우니 움직이질 않아 전화를 했다고 한다. 할머니 말로는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 몸 상태가 안 좋았다고 했다. 입맛이 없다며 밥도 안 드시고, 축 쳐져서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에 누워만 있었다고 했다.
정확한 사망원인이야 부검을 해보기 전에 알 수 없겠지만, 이 더운 찜통 날씨에 고온으로 인한 탈수현상과 식욕부진으로 인한 영양결핍, 체온조절 장애, 의식이 흐려지면서 흡인성 폐렴 등 여러 상황이 겹치면서 돌아가신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쉽게 말해 더위 먹어서 돌아가신 것이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사망선언을 하고 표정 없는 할아버지의 얼굴과 하얗게 막이 끼어있는 눈동자를 다시 한 번 들여다 보았다. 죽어서야 천형의 몸뚱이를 벗어버릴 수 있었던 할아버지. 지긋지긋한 몸뚱이를 벗어버려서 좋은 것인지, 할머니를 두고 가서 안타까운 것인지, 얼굴이 문드러져 있는 탓에 영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앞이 안 보이는 할머니에게는 할아버지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 고생 안하고 주무시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신 거라 오히려 다행일지 모른다고 주님께서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거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씁쓸했다.
새벽 4시. 사망진단서를 쓰고 관사로 다시 돌아왔다.
방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었다. 수면 리듬이 깨진 탓도 더위 때문도 아니었다. 누워서 잠을 청하는데, 안방에 설치되어있는 에어컨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기에 무더위가 오기 전에 미리 미리 장만한다고 올해 처음 산 에어컨. 그 에어컨 하나가 없어서 여름에 죽어나가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그 에어컨 속에서 시원한 여름을 보내는 젊은 의사가 있었다.
잠은 안 오는데 에어컨을 켤 수가 없었다. 에어컨 하나가 그렇게 사치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도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자식 낳은 죄
“그게 나를 왜 이 세상에 낳았냐고 할 때 억장이 무너졌제…”
이씨 할머니의 눈방울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내 속을 어찌 알겠어. 아무도 모를꺼야……”
이씨 할머니에게는 섬 바깥에 사는 아들이 있다. 올해 마흔 전후라는 그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할머니 길게 탄식을 늘어 놓았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너무 딱하고 안되었어. 나는 내가 병에 걸렸으니까 요렇게 산다고 해도, 그놈은 무슨 죄로 문둥이 부모 만나가지고, 사회에서 그렇게 푸대접 받으며 사냔 말이지. 그러고 보면 그놈 말이 틀린 건 아니여. 그렇게 고생만 시킬 거 왜 낳았나 몰라 싶기도 해.”
이씨 할머니는 받은 돈을 전부 바깥에 있는 아들에게 준다. 할머니는 노인 수당과 장애 수당 등으로 한 달에 30여 만원 정도 고정 수입이 있는데, 그 돈을 거의 한 푼도 안 쓰고 통장에 차곡차곡 모은다. 기본적인 의식주는 병원에서 해결해 주니 자기는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웃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돈 한 푼 안 쓰는 그런 이씨 할머니를 노랭이라고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같이 어울려서 밥을 먹을 때도 있고, 나누어 먹을 때도 있기 마련인데, 할머니는 통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10번을 얻어먹으면 적어도 한 두 번은 자기가 사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할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꼭 얻어 먹은 만큼 돌려 내지 않더라도 각자의 형편 따라서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가 들어가면 되는 것인데, 10번 다 얻어먹기만 하고 생전 자기 돈은 쓰지 않는다면 아무리 인간성이 좋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다른 환자들과 그다지 썩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다.
“어렸을 때 그 조그만 주둥이에 따뜻한 밥 한 숟갈 넣어주지 못했던 것이 한이 되서 그래.”
남들이 뭐라 하던 말던 그렇게 해서 악착같이 모은 돈은 전부 아들에게 준다.
아들은 1년에 두 번 정도 어머니를 찾아온다고 하는데, 섬에 오면 그 동안 할머니가 꼬박꼬박 모아놓은 돈을 쏙쏙 가지고 간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돈을 받아가면, 그 돈으로 자기 먹고 싶은 것 외식도 하고, 집안의 가전제품도 사고, 옷도 사 입는다고 한다. 잘은 몰라도 아들로서 이씨 할머니에게 그다지 살갑게 굴지는 않는 듯싶다. 할머니는 그런 아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뭐라 하던 말던, 나라에서 나오는 돈을 한푼 안 쓰고 차곡차곡 모은다.
“할머니 저승 갈 때 돈 가져가는 거 아니쟎아요? 할머니, 그 돈 가지고 좋은 옷 도 사 입고, 맛난 거 사 드시고 할머니를 위해서도 좀 써보세요.”
“나는 좋은 옷 안 입어도 되야. 늙어가지고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그래도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면 이제는 좀 돈도 써보면서 재미나게 살아봐야 하 지 않아요?”
“그놈만 잘 되면 되지… 나야 뭐…”
할머니는 자식 낳은 죄, 자식을 미감아로 만든 죄, 어렸을 때 따뜻한 밥한 숟가락 입에 넣어주지 못한 죄로 오늘도 그렇게 아들을 위해 돈을 모은다. 그것이 할머니가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방법이다.
혹자는 다른 방법으로 사랑해 줄 수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병이 옮을까봐 아들을 제대로 안아 줄 수도 없었던 유년기의 시간들과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편견을 피해 다녀야만 했던 청소년기의 시간들을 지나면서 이씨 할머니는 아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어미 품으로부터 자식을 얼른 떼어 놓는 것이 한센인의 자식 사랑법이라고 느꼈던 듯 싶다. 지금도 할머니는 한센병이라는 자신의 병 때문에 아들 근처에는 가까이도 안 가는 것이 진정 아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혹시라도 아들의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까봐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할머니는 자신이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돈을 모아서 보내주는 일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가끔 잊어버릴 때쯤이면 섬에 와서 할머니가 그렇게 모은 돈을 쏙 쏙 빼내간다.
한센병 환자가 자식을 낳은 죄로 오늘도 할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교회에 가서는 아들 하는 일 잘되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할 것이다.
하느님! 이들의 죄를 진정 사하여 주실 날은 언제입니까.
부록- 한센병 자료실
1) 한센병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한센병은 나균(M.leprae)이라는 세균의 의해 발생하는 만성 감염병입니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Mycobacterium leprae)은 1873년 노르웨이의 한센(Hansen,1841~1912)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습니다. 나균은 결핵균과 같은 항산균으로 현재까지 인공배양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균의 증식 속도가 매우 느려서 병의 잠복기가 매우 길다고(5년~20년) 알려져 있습니다.
2) 한센병은 어떻게 전염되나요?
나균의 전염력은 매우 낮다고 알려져 있으며, 치료를 받고 있지 않은 증상이 심한 한자와의 매우 긴밀한 접촉에 의해서만 전염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치료를 받고 있는 한센병 환자나 한센병이 다 나은 후 단지 후유증 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염력이 전혀 없습니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이 몸에 들어오더라도 나균에 대한 면역이 강한 경우에는 나균의 증식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균에 대한 강한 면역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에게서는 한센병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환자분들도 1930-50년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헐벗고 못 먹어 면역력이 떨어져 있던 시기에 감염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로 한센병환자의 코점막 분비액에 의해 전염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뚜렷하게 전염경로가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결핵균과 매우 유사한 특성이 있어, 결핵의 예방접종인 BCG를 맞으면 한센병에 대해서도 함께 예방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3) 한센병은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나요?
한센병은 피부와 말초신경의 병입니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은 주로 피부와 말초신경을 침범하여 피부와 말초신경의 증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피부 증상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진단하기가 어려운데, 가려움은 없으며, 감각(따뜻함, 차가움, 아픔 등)의 저하가 있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나 화상 등이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말초신경 증상으로는 해당 신경의 감각마비와 함께 운동의 장애가 동반되는 일도 있으며, 진단이나 치료가 늦어지면, 주로 얼굴, 손, 발 등에 변형(후유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4) 한센병의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한센병은 DDS(답손), 크로파지민, 리팜피신 등의 3가지 약을 병용하여 치료합니다. 이를 세계보건기구에서는 복합화학요법이라고 하는데, 이 치료를 적기에 치료하면 조기에 나균이 죽게 되어 한센병이 완치됩니다. 다만 조기 진단, 조기 치료 등의 조건이 갖추어 질 때 후유증을 비교적 적게 남기게 되며, 내성균도 만들지 않게 됩니다. 물론 병을 치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상태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진단 시점에 나균이 많이 있는 다균형인 경우에는 수년, 나균이 적은 희균형인 경우에는 2년 여간의 투약으로 완치됩니다. 한센병의 치료비는 전액 국비지원으로 무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5) 우리나라의 한센병 현황은 어떠한가요?
2007년 현재 우리나라에 한센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모두 15239명입니다. 전국적으로 89개의 한센인 정착마을이 있습니다. 2006년에 모두 56명의 신환이 새로 등록되었고, 이중 활동성 신환은 15명에 불과합니다.
<자료 출처>
한센복지협회 홈페이지 http://www.khwa.or.kr
한빛복지협회 홈페이지 http://www.ehanvit.org
국립소록도병원 홈페이지 http://www.sorokdo.go.kr
◈제2강 : 한승원 시인․소설가
사랑으로 소통하고,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얼마 전에 이러한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손거울
30년 전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의 우렁이각시 같은 여선생님은 여름철에 허벅지가 드러나는 치마를 입곤 했는데, 학교 안에, “오늘 우리 여선생님 빨간 팬티 입었더라”는 말이 떠다녔습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통로에 떨어져 있는 손거울을 발견한 그녀는, 생활지도 주임을 앞세우고 가서 그 반 학생들의 호주머니 검사를 실시했는데, 키 작달막한 아이의 호주머니에서 손거울 한 개가 더 나왔습니다, 생활지도 주임은 그것을 압수하면서, “이 손거울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교무실로 와서 말하고 찾아 가거라”했고, 키 작달막한 아이가 교무실로 와서 “꽃한테 제 얼굴을 비쳐주려고요”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옆에 앉은 여선생의 연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했는데, 생활지도 주임이 빈정거렸습니다. “야, 이놈아, 꽃에게 거울을 비쳐주면 꽃이 제 얼굴을 알아본다냐?” 학생이 말하기를, “모든 꽃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고 비틀어진 꽃잎을 바로잡고 향기도 더 진하게 뿜습니다.” 얼굴 빨개진 생활지도주임이, “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썩 꺼져!” 하고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돌아가려 하지 않는 그 학생을 나는 내 자리로 데리고 가서 물었습니다.
“그것을 누구한테 배웠니?” “우리 할머니요.” “네 할머니 무얼 하는 분이시냐?”“점도 쳐주고 굿도 하러 다니셔요.” “네 할머니는 집안에 꽃이 피면 어떻게 하시니?” “치자 꽃, 족두리 꽃, 금강초롱꽃들이 피면 앞에다가 체경을 세워놓아요. 밤이면 초롱불을 켜 달아놓기도 해요.”
가슴에 불이 환히 켜진 나는 생활지도 주임에게, “저는 가짜 시인이고, 이 아이하고 이 아이의 할머니하고는 가슴으로 시를 쓰는 진짜 시인입니다.” 하며 손거울을 찾아 돌려주었다. 이후 그런 손거울 하나를 장만하여,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얼굴 보여주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 손거울을 무수히 제작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팔고 또 팔면서 이때껏 잘 살아오고 있습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간행한 <달 긷는 집>에 수록 되어 있는 시입니다.
눈에서 나온 것이 풍경과 만나서 통섭하고, 그 결과가 눈으로 들어가고 그것은 다시 눈을 통해 나옵니다.
우리는 마음의 거울 하나씩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눈이 대신합니다. 꽃은 우리들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희비합니다.
'唯識學'에서 말하기를 <하늘의 별은 그냥 별이 아니고 내 눈이 만든 것이다>라고 합니다. 우리 눈은 창조적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창조적으로 보야야 창조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내 후배 소설가 한창훈은 거문도라는 섬에 외가가 있습니다.
그가 늦은 가을에 외가에 갔더니, 나목이 된 감나무 가지에 감들이 세 개가 열려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다른 나무에 열린 것을 꺾어다가 가지에 달아 놓은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연유를 물으니
“제 작년에까지 감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작년부터 열리지 않아. 감나무가 감 여 는 것을 깜빡 잊었는가 해서‘감나무야 너도 이런 감 좀 열어라.’하고 걸어 놨 다.”고 말했습니다.
삼년 뒤에 외가에 갔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열려 있었습니다.
식물 심리학자들이 시험을 합니다.
방 안에 국화 화분 하나를 놓아두고, 한 학생을 들여보내, 화분을 툭툭 차고, 꽃을 뜯어버리고 ‘네가 아름답다고? 흥 쥐뿔이다.’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오게 합니다.
다음은 다른 학생을 들여보내서 따사로운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향기를 맡고 물도 주고 벌레도 잡아주고 아름답다고 칭찬도 해주고.
그 학생이 나온 다음 심전도나 뇌파 검사를 하는 것처럼 전자 감응 측정 장치를 한 다음, 아까의 남학생을 들여보내 측정하고 또 여학생을 들여보내 측정합니다.
그 식물의 반응은 다르다고 합니다.
위의 일화들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인간주의에 대한 반성을 하고 우주주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벌레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우주 속에 벌레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인 나도 우주이고 개미도 우주입니다. 더불어 살기가 중요합니다.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
청렴결백, 바른 소리 잘 하다가 무고에 걸려 유배(추방)되어 한 시골의 강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울분과 우수에 잠겨 강변을 헤매고 있는데 한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가 물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여기와 있는가>
굴원이 대답했습니다.
<온 세상이 다 흐려 있는데 나 홀로 맑으며 중인개취 아독성(衆人皆醉我獨醒)이다. 그래서 추방당했다>
어부가 말했습니다.
<성인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과 추이를 같이할 수 있다. 세상이 흐려져 있으면 어찌 동조하지 않는가. 모든 사람들이 공리에 취해 있으면 어찌 그대는 그 찌꺼기를 먹고 박주라도 빨아들이지 않는가, 왜 동조하지 않고 추방당했는가.>
굴원이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새로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을 털어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자는 반드시 옷을 떨쳐서 입는다고. 맑고 밝은 몸이 더러운 물건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차라리 상류(湘流)에 달려가 고기의 배 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어부는 웃으며 뱃전을 치며 이렇게 빈정거리는 투로 노래하며 갔습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이 고사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가.
사랑으로 우주적인 疏通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事業이기도 합니다.
<사업은 성인의 뜻에 따라 백성에게 알맞게 실천하는 일이라고 ‘주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인은 공자 맹자 주자를 말합니다. 그들의 뜻은 어짐(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자비를 가르쳤고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사업하지 않는 선비(지성인)는 선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上求菩提 化下衆生입니다.
노자가 말한 和光同塵입니다.
나의 빛을 부드럽게 하고 나보다 못사는 사람들과 화합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어떻게 하는가.
꽃들의 사업과 벌들이 사업을 배워야 합니다. 벌은 꽃에서 꿀을 따되 꽃을 손상시키지 않는 거래를 합니다. 그 거래를 통해 서로 通涉합니다.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서로를 상승시키고 승화되게 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영향을 받으면 상승합니다. 그것은 통섭입니다. 여러분들은 소록도와 만나고, 바다와 만나고, 한승원과 만남으로써 여러분들의 가슴에 한 단계 상승하는 바람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한승원의 ‘달 긷는 집’(汲月庵)은 두 개의 달을 긷는 시공입니다. 하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예술적인 경지입니다.
사람 사는 집만 집이 아니고, 모든 것들이 다 집입니다.
여러분들의 몸뚱이 하나하나는 여러분의 영혼을 담고 있는 집들입니다. 그 영혼은 진리를 추구하고 지상의 예술세계를 추구합니다. 우리 몸뚱이도 또한 하나하나의 <달 긷는 집>들인 것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달 긷는 집’을 잘 간수하고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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