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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수원·안성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특별검거반이 편성·파견된 이유로는 첫째, 3월 28일 사강리에서 경찰관 주재소가 파괴되고 노구지(野口) 순사부장이 살해된 일, 두번째, 28일 오후 1시 오산에서 금융조합 및 일본일 가옥이 불타 2만 2천 여원의 손해를 보았고, 29일에는 800여 명의 한인이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일본인 가옥 들을 파괴하며 오산역을 습격한 일, 세번째, 3월 30일 발안장에서 1천명의 노상 연설 만세시위, 또 일본인 소학교 방화, 4월 1일에는 발안장 주위 산상 80여 개소에서 봉화를 올려 일본인 가족 43명이 피난을 가게 된 일, 네번째, 3월 31일 밤 안성군 양성에서 약 2천명이 모여 경찰관 주재소·우편소 및 면사무소를 파괴·방화하는가 하면 전주(電柱)까지 쓰러뜨렸던 일, 다섯번째, 3월 31일 안성읍내에서 오후 5시에 약1천명이 모여 운동을 해서 군인까지 동원되어 가까스로 진압했던 일, 여섯번째, 4월 3일 약 1천명이 장안·우정읍 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며 가와바다(川端豊太郞)순사를 살해한 일 등의 과격한 운동이 3월 28일 이후 계속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기도 경무부장이 검거반을 편성,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파견된 자가 경기도 경무부 경시(警視)이며 경성헌병대 부관 하세베(長谷部) 대위이다. 그는 4월 2일 헌병·순사 11명을 이끌고 먼저 안성군 양성방면에 출동해서, 원곡면을 지나 양성방면으로 가는 길가에서 주동자들을 검거한 후, 안성에 4명의 부하를 남겨두고 4월4일 귀대하였다. 귀대 후 그는 수원서장으로부터 4월 3일의 화수리 방면의 시위와 4월 5일 장날을 기해서 발안장에 1만 2천여명의 운동원이 모일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4월 4일 오후 6시에 발안장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지키며 화수리 방면의 정황을 알아보는 한편, 6일 오전 1시에 헌병 경찰관 9명 및 보병 5명을 이끌고 수촌리로 가서 6명을 검거하고 수원을 거쳐 서울로 귀대하였다.
이 때 수촌리가 제일 먼저 보복을 당한 이유는 화수리 운동의 주동자 천도교 전교사 백낙열,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이 수촌리에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수촌리 동민들은 깃대에다 '조선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는 글을 써가지고 나왔을 뿐 아니라 화수리 사건의 주동자 27인가운데 수촌리인들이 14명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아침 수촌리는 많은 집들이 불탔고 그 가운데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회당도 함께 불탔다. 그리고 왜병의 총검에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였다. 4월 15에도 또 한차례 보복을 당하였다. 이때 수촌리에는 4호만 남고 38호가 전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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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부터 6일까지의 1차 검거로도 만세시위가 진정이 되지 않자, 4월 9일 쓰무라(律村) 헌병특무조장 아래 하사 이하 6명과 경찰관 4명이 고옥(古屋) 경찰서장 이하 7명과 보병 15명의 협력을 얻어 3개반을 편성하여 오산·화수리 반도 및 사강 반도로 검거를 또 다시 나섰다. 우선 검거반을 4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산면 소재지에서 검거하고 오후 2시부터 7시 30분까지는 그 부근 부락 8개리에서 검거를 했다. 또 다시 4월 10일 오전 4시에 오산에서 검거를 실시해서 주동자인 감리교회 목사 김광식 이하 63명을 검거하여 수원경찰서로 이송하고, 곧 바로 발안장으로 가서 그날 밤부터 11일 오후 5시까지 화수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우정·장안 양면 내 25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204명을 검거하고 증거물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2일에는 남양으로 가서 13일 오전 3시부터 팔탄면 하저리 부근의 부락 4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5명을 검거하였다. 다음날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사강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송산면·마도면·서신면의 부락 20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175명을 검거하고 증거품 여러점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1,202명을 방면하였다. 화성지방 검거 및 손해상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검거지방 |
검거로 인한 손해 |
검거인원 |
검거지방 |
검거로 인한 손해 |
검거인원 |
소실 호수 |
사망 |
부상 |
소실 호수 |
사망 |
부상 |
송산면 |
사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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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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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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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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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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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리 |
마도면 |
해문리 |
서신면 |
전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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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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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175명 |
우정읍 |
조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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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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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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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리 |
팔탄면 |
하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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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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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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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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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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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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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4명 |
장안면 |
수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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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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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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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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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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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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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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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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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
이상 63명 |
계 |
329 |
46 |
22 |
442 | * 소밀(騷密), 弟745호號, 대정(大正) 8년 4월 23일, 조선헌법대사령관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고지마(兒嶋摠次郞)의 보고
이렇게 검거반이 활동할 때는 검거만이 아니라 많은 집들이 불탔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화성지방 10개면 63개리에서 329채가 불탔는데, 그들 자신도 화재의 원인은 야간에 있어서의 혼잡과 바람이 강하였기 때문에 실화(失火)한 것도 있을 것이나 검거반의 방화(放火)로 인한 것도 적지 않음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상 이를 인정함은 적당하지 않아 화재를 표면상 전부 실화로 인정하기로 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서 불에 탄 집들은 거의 다 방화로 봄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 제 2차 검거반이 보복 만행을 하는 가운데 특기할 사실은 사찰 1개를 불지른 것이다. 이것은 화수리 앞산 솔밭에 있는 봉래사인데 그 때 주지 박금봉(朴錦峰)은 불길에 놀라 밖으로 나와 불을 끄다가 수비대에게 붙들려 고문 끝에 다리 뼈가 부러져 평생 불구자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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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2차 검거반이 4월 9일부터 14일까지 삼괴반도(三槐半島) 및 사강반도를 휩쓸며 검거하고 있을 때, 4월 13일 보병 제79연대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발안장의 수비를 명령받고 도착하였다. 그들은 4월 15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에 4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 운동자들을 해산시켰으나. 기독교인들이 또 다시 운동을 하였다. 그동안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에 이르는 발안의 3·1운동은 그 원인이 제암리의 천도교 및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것을 안 아리타(有田)는 또 다시 그러한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하 11명과 순사·순사보를 이끌고 당일 오후 3시경 제암리로 향했다.
이들은 주일날이 아니므로 특별이 훈시할 말이 있다 속여 40세 이상 된 남자는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하였으나 모이지 않자 15세 이상은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교회당으로 모일 때, 정문 앞에서 수비대는 오는 사람마다 키를 재어서 총길이 보다 작은 아이는 돌려보내고 큰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교회당에 모인 주민에게 훈계를 하는 척 하더니, 갑자기 동민들에게 기독교의 교지(敎旨)를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안(安)이라는 기독교인이 일어나 성서는 인간 상호간에 친밀하게 지낼 것과, 신을 경건하게 섬기고 받드는 것과, 신은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헌병 중위는 기독교도들의 행위을 그 교리에 어긋났다고 일갈하더니, 교회당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뭐라고 세번 날카로운 구령을 외쳤고, 그 구령에 맞추어 입구에 섰던 병사들이 교회당 내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교회당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 오르고 쓰러지는 수라장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김정헌(金正憲)·안경순(安慶淳)·홍원식(洪元植)·노경태 등은 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정헌·안경순·홍원식은 교회당 밖에서 일병에 의해서 타살되었고, 노경태만이 살아서 도망쳤다. 또 사랑하는 남편의 불행한 급보를 듣고 달려온 홍원식의 부인 김씨, 그리고 강태성의 부인 김씨도 일병에 의해 타살되었다. 이 때의 교회당 안팎에서 불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다름과 같다.
안정옥(安政玉)·안종린(安鍾麟)·안종악(安鍾樂)·안종환(安鍾煥)·안종후(安鍾厚)·안경순(安慶淳)·안무순(安武淳)·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안유순(安有淳)·안종엽(安鍾燁)·안필순(安弼淳)·안명순(安明淳)·안관순(安官淳)·안상용(安相鎔)·조경칠(趙敬七)·홍순진(洪淳晋)·김정헌(金正憲)·김덕용(金德用)·강태성·동 부인 김씨·홍원식·동 부인 김씨 이렇게 23인이 순국하였다. |
고주리
제암리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병들은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이웃마을 고주리로 갔다. 이 마을은 일찍이 천도교가 들어와 전교실을 두고 고주리를 비롯한 제암리·가재리 등지의 천도교인들을 지도하였다. 방금 제암리 교회당을 불태운 군인들은 이제는 천도교 전교실을 불태우고 천도교 일가를 학살하기 위해 고주리로 갔다. 그들은 전 부락을 완전 포위하고 김흥열(金興烈)·김성열(金聖烈)·김세열(金世烈)·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김흥복(金興福) 등 6명을 밧줄로 결박하여 뒷간으로 끌로 올라가서 칼로 차례차례 목을 베고 난도질을 하여 참혹하게 죽였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밖에 나와서 이 광경을 보려고 하면 사정없이 칼로 목을 쳐 죽인다고 위협하면서 못보게 하였다. 왜병들은 6명의 시체를 노적가리까지 끌고 가서 노적가리와 시체를 함께 불살라 버렸다. 이렇게 참혹하게 순국(殉國)한 이들은 한 집안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형제간들이며, 열렬한 천도교신자로서 동리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리고 평소 독립운동에 앞장 서 왔으며 또 왜경들의 무리한 요구나 박해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던 애국지사들이 일가로 지목되어 오던 터이라, 왜경들은 그러한 김씨 일가를 학살해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씨 일가족의 남자들이 전멸하는 중에서도, 당년 9세인 김덕기는 어린 나이에 조부·부친·삼촌 등 6명이 전부 소살(燒殺)당하는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해! 같이 죽여라!'하며 왜병들의 서슬이 퍼런 총칼 속으로 뛰어 들며, '왜 우리 집 어른들을 모두 죽이느냐!'고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이때 무자비한 왜병 1명이 구두발로 걷아차서 울타리 밑 도랑으로 굴러 떨어진 김덕기는 몸을 일으켜 또 다시 덤벼들려 하는 것을 그의 형수되는 분이 김씨 일가의 남자라고 이 소년만이 유일한 생존자인 것을 깨닫고, 이 소년을 끌어 당겨 치마 폭에 감추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왜병들의 만행에 격분한 동민들은 산상에 봉화를 올리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한편, 왜병들의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