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으며 당신은 현재의 나가 될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순례자들이 선호해온 전통적 기착지라는 평판과 달리 아르코스의
알베르게가 그리 붐비지 않아서 기대했던 대로 편히 쉬는 밤이었다.
라 리오하대학교가 있는 로그로뇨를 오늘의 종착지로 한데다 대학들을 방문하려면
여느 날보다 일찍 나서야 했다.
손전등을 통해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 끝 공동묘지.
성벽처럼 높고 육중한 담장의 철창살 위 벽에 새겨진 희미한 글귀가 내 디카를 사정
없이 당겨갔다.
<YO QUE FUI LO QUE TU ERES, TU SERAS LO QUE YO SOY>
(요 께 푸이 로 께 뚜 에레스, 뚜 세라스 로 께 요 소이)
"나는 지금의 당신이었으며 당신은 현재의 나가 될 것이다."
1인칭인 나(YO)는 무덤의 주인이고 당신(TU)은 이 글 앞에 서있는 산 자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옛 모습(생존시)에 다름 아닌 당신은 결국 지금의 나처럼(묻히게) 될
것" 이라는 뜻이며 이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의 다른 표현이리라.
업보(業報) 또는 과보(因果應報)의 우회적 강조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왜 난해하고 심오한 진리가 담겨있는 엄숙한 명언으로 둔갑하는가.
하긴, 평범하고 지당한 말도 비비 꼬면 격언, 경구가 되어 회자되니까.
한데, 이 깜깜한 새벽에 이 비문이 왜 자기 삶을 무척 후회하는 사자(死者)의 회한에
찬 메시지처럼 느껴졌을까.
"나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정신차리라" 는 으스스한 경구(警句)가 되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파들어갈 것 같으니 말이다.
"심신이 산란하거나 허약해지면 이 글(비문)을 읽어라"고 권고한 이(다른 책)도 있다.
이로 보아 정녕 스페인에서는 널리 알려진 금언이 아닐까.(이 부분을 쓸 때 스페인어
달인의 경지에 있는 큰딸의 도움을 받았다)
산에서나 길에서나 늘 혼자인 나는 그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며 걷는다.
온 종일 아무 생각 없이(무심코) 걷는 일을 계속하기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1941년(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해)의 개복수술 이후 병치레에 청춘을 바쳤다.
병력(病歷)을 기록하던 내로라 하는 의사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했다.
병에 더하여 유난히 많은 몸사고에도 살아남았지만 바야흐로 정리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므로, 순탄치 않았던 기나 긴 세월을 자연스레 반추하게 된다.
악덕 장사꾼 소굴에 다름 아닌 세상인데 아름다운 인연들만 있겠는가.
지워진 줄 알았던 악연들이 선명하게 살아나 걸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검붉은 분노와 살기찬 증오가 늙은이 뱃가죽같은 연민으로 변한 것이 다행이지만.
나와 선량한 인연을 맺은 사랑하는 모든 이를 그리며 그들의 건승을 빌기도 한다.
신의 경지에 이른 성현들과 큰 족적을 남기고 가신 이들로부터 가르침 받는 진지한
시간일 때도 있다.
우매한 중생과 세상을 좌지우지 하려는 제신(諸神)과 날세워 토론할 때도 있다.
난잡한 세상사를 잊고 자연과 더불어 가장 행복한 속삭임을 갖기도 한다.
때로는 주제가 있고, 그 주제가 복수일 때는 순위까지 정하여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다만, 어떤 경우라도 늘 '그 분'이 나와 동행해 주신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작년 봄의 교통사고(메뉴 '우리의 이야기들' 395번글 참조) 이후 국내에서는 공차증
(恐車症)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해 여기(스페인)까지 왔다.(위 메뉴 402번글 참조)
이 공포로부터 해방된 카미노를 걷는 것은 사유의 바다에서 노니는 것 같아 참 좋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심신이 산란하거나 허약하지 않고 지극히 강렬하고 행복하다.
그런데도 오늘은 단연코 아르코스의 공동묘지 담벼락에 새겨진 이 비문이 주제다.
행복에 취해 사유의 바다가 망각의 바다로 전락할까 염려되기 때문일까.
달리는 말에 채찍질(走馬加鞭)?
나는 지금 흉보면서 닮아가고 있는가
로스 아르코스를 벗어나 있는 변전소만이 휘황할 뿐 산솔(Sansol)로 가는 카미노는
아직 칠흑이라 노란 화살표 찾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콤파스 없는 항해인 듯 무겁고 불안한 걸음의 명암이 이 화살표 하나에 좌우된다.
아, 인간의 허약함이어!
나는 지금 흉보면서 닮아가고 있는가.
평소, 야간의 진행을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지금 어둠 속을 걷고 있으며 이런 일이 종
종 일어나고 있으니.
검푸른 들판(밀밭)에 뻗은 아스팔트길을 서서히 드러내고 불빛 있는 곳이 산솔 마을
이라 짐작하게 함으로서 어둠의 공포를 몰아내는 빛의 위대함이어!
이 찬양을 떠오르는 태양에게 주려고 산솔 직전의 밀밭뚝에 배낭까지 내려놓았으나
30여분의 시간만 낭비했을 뿐 실망스럽게도 이 아침의 태양은 무기력했다.
6km 남짓한 산솔까지는 눈 가리고 걸었다 할까.
나의 카미노에서 이 구간은 없는 것이다.
카미노가 맞는지에 골몰하느라 산 베드로(San Pedro) 개울을 건넌 기억도 없다.
산솔에는 17c에 건립되었다는 산 소일로 교회(Iglesia de San Zoilo) 가 있다.
동명(同名)의 수도원이 200여km나 더가서 있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ros Condes)에도 있다는데 '소일로'는 순교자(기독교)의 이름이란다.
주민이 120명도 채못되는 작고 한적한 시골마을 산솔이 알려진 것은 어쩌면 순교자
소일로의 명성 덕일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도 자그마한 알베르게가 있다.
그러나 조용한 것으로 보아 로스 아르코스를 지나친 순례자들이 여기보다는 지근인
토레스 델 리오를 선호하나 보다.(후에 알았는데 부활절~10월까지만 운영한다고)
상거(相距)가 1km도 못되는 다음 마을은 토레스 델 리오(Torres del Rio)다.
N-111도로를 가로지르고 리나레스 강(rio Linares)의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해발 467m에 자리한 이 마을에는'거룩한 무덤의 교회(church of the Holy Grave)'
라는 뜻인 산토 세풀크로 교회(Iglesia del Santo Sepulcro)가 있다.
12c 말에 세운 이 아름다운 교회는 인구150여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을 방문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고 있단다.
템플 기사단(the Order of Templars)과 연관되어 있으며 40일쯤 후에 만난 아라곤
길의 산타 마리아 데 에우나떼(Santa Maria de Eunate)처럼 팔각 큐폴라(cupola:
둥근 지붕))인데 이는 기사단의 상징이란다.
이 작은 마을에 3개의 알베르게가 있으니 전형적인 순례자의 마을이라 하겠다.
나와 한(同一한) 알베르게에서 묵은 적이 있는 순례자들 중 아르코스를 지나친 이들
모두를 이곳(알베르게 Casa Mariela와 La Pata de Oca)에서 다시 만났다.
내가 7km가 넘는 새벽길을 단숨에 달려온 것이다.
염려됐던 교포청년과도 재회했으나 발 상태가 더욱 악화된 듯한 그에게 산티아고는
아득하기만 할 것이다.
결국 일정 구간 차량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을 그가 안쓰러웠다.
길 사대주의?
토레스 델 리오에서 비아나까지는 11km 남짓 된다.
비아나는 로스 아르코스의 알베르게 관리인이 묵어가기를 권했던 곳.
묘지를 지나고 에르미타 데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포요(Ermita de Nuestra Senora
del Poyo)를 통과하고 코르나바 강(rio Cornava)을 건넌다.
N-111도로를 따르고 건너가고 나란히 가기를 반복한다.(로그로뇨 한하고 계속된다)
개간하다 중지한 듯한 야산지대와 들길, 포도밭 자갈길, 코르나바 골짜기(Barranco
de Cornava)와 농장지대도 걷는다.
고대 정착지 유적을 지나면 인구 3.800여명의 비아나(Viana)다.
카미노는 생기있는 이 마을의 심장부를 관통한다.
12시(정오) 이전에 도착하면 로그로뇨까지가 수월하겠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이나
빨리 도착함으로서 여유로워졌고 비아나를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비아나에는 바로크와 로마네스크 양식의 화려한 건물들이 많다.
이는 16c~18c에 비아나가 경제와 문화의 전성시대를 누렸음을 의미한단다.
시청건물은 특히 아름다우며 산 베드로 교회(Iglesia San Pedro) 유적도 남아있다.
아연하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13c에 건립되었다는 몽소승천교회(Iglesia de Santa
Maria de la Asuncion)다.
훗날(1492) 교황이 된 알렉산더 6세(AlexanderVi)의 사생아이며 교황군(軍)의 악명
높은 지휘관이었던 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가 묻혀 있었다는 교회다.
사생아, 적자 시비가 아니고 그의 생부가 교황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도덕적 윤리적 완성도가 지고해야 할 교황의 행실이 이 시대에는 얼마나 추악하고
방탕했던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6명의 사생아를 두었다는 알렉산더 6세는 그중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부모는 발렌시아의 대주교였던 알폰소 보르하 남매(여동생은 호아나)란다.
아버지를 기준하면 고모가 되고 모계(母系)를 따르면 외삼촌이 되는 망측한 가계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산뜻하고 활기 넘쳐 보이던 비아나가 왜 돌연 혐오스러워졌을까.
심생종종생 심멸종종멸(心生種種生心滅種種滅)은 과연 진리인가 보다.
미련 없이 비아나를 떠났다.
종일 나를 지배하리라 여겼던 비문이 정오를 넘기기도 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교황과 비문의 시기적 관계는 모르지만 사후에도 구제받지 못할 더러운 영혼이라고
저주받은 가톨릭 교황에게 이 비문이 무슨 의미있었겠는가.
하물며 순례자 대개가 가톨릭교 신도들임에랴.
비문을 내 뇌리에서 몰아내는 또 하나의 이유가 등장했다.
비아나를 벗어나 로그로뇨 한하고 진행중인 도로공사다.
새 길 내고 로터리 만드느라 이리 저리 쫓겨다니면서(迂廻) 천대받고 있는 카미노를
걷는 동안 카미노에 대한 상념이 비문을 밀어냈으이까.
길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니면 곧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계의 힘을 빌어 미리 만들어 놓은 길을 걷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순리의 전도(顚倒)다.
변질돼 가는 길의 숙명이 카미노라 해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우회로를 걸어야 하는가 하면 지름길, 샛길 카미노도 있다.
무수히 이사와 성형을 거듭해온 카미노, 지금도 진행중인 이 쯤의 길은 우리 길에도
지천인데 굳이 경제적 시간적 부담이 많은 수만리 이역 먼 곳까지 왜?
카미노로 몰려드는 한국인이 가장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이
글 끝부분 순례자 증가 글 참조)
혹, 관광사대주의에 이어 길 사대주의에 몰입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 리오하(La Lioja)와 로그로뇨(Logrono)
비아나에서 3km 남짓 나아가면 '에르미타 데 쿠에바스(Ermita de Cuevas)' 푯말이
로그로뇨가 6.8km 남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금 더 진행해 안내 표목 따라 왼쪽을 보면 로그로뇨의 젖줄이라는 광활한 카냐스
저수지(Laguna de las Canas)가 한눈에 들어온다.
들길이던 카미노는 N-111도로를 건너 잠시 도로와 나란히 간다.
곧 나바라 지방을 떠나 라 리오하(La Rioja) 지방에 진입하였음을 4각 석주(石柱)의
이색적인 가리비 마크를 통해 알게 된다.(리오하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마크다)
새로 들어선 공단 지역이 바로 라 리오하다.
또한, 스페인 제일의 와인 생산지 답게 광대한 포도밭이 장관이다.
이 지방의 포도는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풍부한 채광을 받아 명성있는 포도주
제조에 가장 적합하단다.
칸타브리아(Cantabria) 언덕의 유적들을 지나면 완만한 내리막 길가에 순례자들을
위한 세요대(sello/stamp臺)가 있다.
여러 해 동안 도냐 펠리사(Dona Felisa)가 순례자들에게 스탬프를 찍어주었다는데
그녀는 2002년(92세)에 별세했고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여인은 그녀의 딸이란다.
<FELISA,'HIGOS-AGUA Y AMOR'/이고스-아구아 이 아모르>(무화과-물과 사랑)와
무화과와 그 잎, 물컵과 십자가가 명각(銘刻)되어 있는 아름다운 스탬프다.
가벼운 먹거리와 기념품들이 있으나 잠시지만 내가 머문 동안에는 아무것도 팔리지
않았고 앉아있는 후한(厚) 몸집의 주인녀도 서있는 누렁이 개도 무료해 보였다.
아디오스(adios) 해도 별무 반응인 것으로 보아 정녕 졸고 있었나.
넓게 펼쳐진 건물군을 바라보며 걷는 길가의 막 피어오르는 개양귀비가 아름다웠다.
주변이 잘 정리된, 스페인에서 유량이 가장 많다는 에브로 강(rio Ebro)의 피에드라
다리(Puente de Piedra)를 건너면 라 리오하의 주도(州都) 로그로뇨(Logrono)다.
카스티야와 나바라 두 왕국 사이에 들어선 로그로뇨는 양국인들의 다툼장이었는데
카스티야(Castilla)왕국 알폰소 6세(Alfonso)가 리오하와 바스크 속주들을 장악하고
에브로 강 북쪽의 나바라로부터 봉건적 충성의 서약도 받음으로서 진정이 되었단다.
또한, 순례자들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 로그로뇨의 에브로 강에 다리를 놓고(현재의
피에드라?) 순례길을 재정비했으며 카미노를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다.
라 리오하는 주도 하나로 구성되어 17개 자치지방중 가장 작은 지방이다.
일찍이 켈트족과 로마인들이 에브로 강가에 정착하였으며 지명 '로그로뇨'도 '여울'
이라는 뜻의 켈트어 그로니오(glonio)에서 비롯되었단다.
비교적 낮은 지대(해발 384m)에 위치한 로그로뇨는 고풍을 풍기면서도 현대감각이
살아있는 인구 15만여명의 교육도시로 알려져 있다.
알베르게에 배낭을 놓고 라 리오하대학교(Universidad de La Rioja)를 찾아나섰다.
서쪽에서 동쪽 끝의 대학 본부까지 2km 이상을 묻고물어.
팜프로나의 나바라대학교에서 처럼 관심 많은 학생들 도움이 컸으며 늙은이의 방문
이라 그런가 직원들의 협조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역사가 일천한(1992년개교) 탓일까.
카미노상의 대학이으로 온 세계 대학인 순례자들의 방문이 잦을텐데도 고작 스탬프
찍어주는 것이 전부다.
대학소개 책자나 브로셔(brochure)를 원했으나 그런 것 만들지 않았단다.
애써 찾아간 순례자에 대한 홀대이며 홍보(PR)시대에 역행하는 것 아닐까.
우리나라의 사이버대학에 해당되는 UNED(Univercidad Nacional de Educacion
a Distancia-Logrono)는 알베르게가 있는 루아비에하 거리(Calle Ruavieja) 지근
(Calle Barriocepo)에 있어서 편했다.
라 리오하대학보다 15년 일찍(1977년) 개교한 국립대학인데 프랑스 길 대학들의 역
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대학(1495년개교) 외에는 60~20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한데, 주말, 축일 등 휴무와 시에스타와 요일에 따라 다른 근무시간(horario) 때문에
앞으로 애로가 적지 않을 것 같다.
대학들 방문에 따른 부수입도 적지 않았다.
관광안내소가 있는 메인 광장 에스폴론(Espolon), 메르카도 광장(Mercado)과 16c
의 바로크양식(정면) 건물이며 두탑에 황새들이 둥지를 짓고 살고있는 산타 마리아
레돈다 대성당(Catedral de Santa Maria de la Redonda)을 비롯하여 12c 건물인
산타 마리아 파라시오 교회(Iglesia Santa maria del Palacio) 등 시내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으니까.
대학들을 방문하고 스탬프를 받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리라.
너희가 에티케타 운운할 자격있냐?
소등시간(10:00)에 임박하여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하도 시장해 샤워도 생락하고 재미교포 청년을 비롯해 낯익은 젊은이들 간에 술판이
벌어진 식당 한쪽에서 누룽지를 끓여먹고 있는데 한 시건방진 서양인이 들어왔다.
단잠자고 있는 이들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모두 조심하고 있는 판에 낫살이나
먹은(60대?) 이 사람의 혼잣말이 너무 커서 내가 주의를 주려는 것을 눈치챘나.
한다는 인사가 '곰방와'(こんばんは/今晩は).(그에게 내가 일본인으로 보였던가)
대꾸 대신 고약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더니 겸연쩍은지 슬며시 나가버렸다.
그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른채 언짢았겠지만 밤 깊어가는 시간에 내 기분인들 좋을
리 있겠는가.
내가 서양인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극동의 한. 중. 일 국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왜 늘 일본과 중국이 우선이냐?
2009년의 순례자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1079명으로 100개국중 16위다.
일본은 526명으로 25위이며 중국은 49위(35명)다.
2006년~2009년, 4년의 증가수를 보면 한국은 84명 - 449명 - 915명 - 1079명이며
일본은 282명 - 327명 - 412명 - 526명, 중국은 10명 - 19명 - 20명 - 35명이다.
아시아의 증가수 504명 - 946명 - 1533명 - 2415명과 전 세계의 증가수 100377명 -
114026명 - 125141명 - 145877명에 비해 한국의 증가수는 가공스럽다.
그럼에도, 순례자들 세계에서도 국가 위상의 차 때문인가.
카미노에서도 공용어인 영어 "웨어 라 유 프롬?(Where are you from)" 또는 스페인
땅이니까 "데 돈데 에레스?(De donde eres)" 하면 되련만 일본, 중국이 우선이다.
메모하다가 돋보기를 벗어놓고 식당 입구에 있는 문 열린 화장실에 갔다.
이 집에서는 처음 이용하는데, 소변대가 없지만 알베르게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거나
소변대가 따로 없는 화장실도 흔하므로 무심코 용무를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마주친 중년 관리인의 '여자용' 이라는 말에 면구해지는 내 앞에서 그가
'에티케타' 운운하는 것은 고의성이 없다 해도 내 실수의 결과이므로 감수했다.(후에
확인했는데 내 경우 돋보기 없이는 구분할 수 없는 작은 그림이 문에 붙어 있다)
그러나 '코레아노'를 들먹일 때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뭐야?
<늙은이 개인의 본의 아닌 실수를 왜 한국인 전체가 무례인인 양 매도하려 하냐.
초대형 홀 안의 닭장 침대에 남녀 구별 없이 몰아넣어 팬티로 가렸을 뿐 알몸에 다름
아닌 몸으로 스트리킹(streaking)하게 하는 쌍놈 너희가 에티케타 운운할 자격있냐.
더구나 5?에서 7로?로 인상했으면 그만큼 환경도 개선돼야 하는 것 아니냐.
당장 사과해라....................................>
(지자체 운영인(Municipal) 이 알베르게도 안내서에는 5?지만 7를? 받는다)
'뭐야' 소리가 너무 컸던가.
식당의 젊은이들중 브라질 청년(오리송에서 알게 된)이 뛰어나와 만류함으로서 < >
안의 분노는 불발되고 말았다.
관리인의 분명한 사과를 직접 받지 못해 울분이 풀리지 않았지만 내 분을 풀기 위해
무관한 수많은 이들의 단잠을 깨워서는 안되겠기에. <계 속>
손전등이 밝혀낸 로스 아르코스 공동묘지 담장과 비문"YO QUE FUI LO QUE TU ERES, TU SERAS LO QUE YO
SOY"(1. 2 /희미한 원본을 축소했더니 아예 보이지 않는다)
전력을 다루는 곳이라 그런가 변전소가 휘황하게 불을 밝히고(3)
깜깜한 새벽에 카미노를 알려주는 더 없이 반가운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4)
먼동이 터오자 산솔과 그 길이 정체를 드러내고(1. 2) 안내 푯말(3) 따라가면 토레스 델 리오다.
알베르게 카사 마리엘라(4)와 이 마을의 보물 산토 세풀크로 교회(5)를 지나면 알베르게 라 파타 데 오카(6/길
가운데 서있는 젊은이는 재미교포 청년)
토레스 델 리오 ~ 비아나의 11km가 넘는 카미노(1~10)와 고대 정착지 유적(11. 12)
해발 400m가 넘는 이 길들이 지금은 일부를 제하고는 들길과 대소 포장, 비포장 도로가 되었으나 예전에는
모두 야산의 길들이었을 것이다.
카미노 변천사의 축소판?
비아나 들머리(1. 2)
카미노가 관송하는 고풍의 비아나 심장부(3 ~ 7)를 지나면
날머리에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8)
비아나에서 나바라와 라 리오하 경계까지의 카미노는 간선도로에서는 벗어나 있으나
공사로 인해 쫓겨다니는 등 시달리고 있다.
사각 돌기둥에 부착된 특이한 가리비 표지(mark)가 나바라를 떠나 라 리오하 지방에 들어섰음을 말해준다.
이 가리비 표지는 라 리오하 지방에서만 볼 수 있으니까.
순례자들에게 <'FELISA, HIGOS - AGUA Y AMOR'와 무화과와 그 잎, 물컵과 십자가가
명각(銘刻)되어 있는 아름다운 스탬프를 찍어주고 있는 펠리사와 그녀의 노점.
<펠리사, 이고스 - 아구아 이 아모르>의 뜻은 '무화과 - 물과 사랑'이며 펠리사 할머니가
2002년 92세에 세상을 뜬 후 딸인 그녀가 물려받아 하고 있단다.
라 리오하의 주도(州都) 로그로뇨(Logrono)에 들어가려면 스페인에서 유량이 가장 많다는
에브로 강(rio Ebro)의 피에드라 다리(Puente de Piedra)를 건너야 한다.(1)
라 리오하대학교 본부(2. 3)와 잘 정돈된 로그로뇨 거리(4. 5)
에스폴론 광장의 파란만장한 군인, 정치가 에스파르테로(Espartero) 동상(6)
* 로그로뇨에서 어둡기 전에 꽤 많이 디카에 담았는데 안타깝게도 부러 지운 듯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