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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 소지가 유죄
증 언 자 : 김정균(남)
생년월일 : 1959. 8. 19(당시 나이 22세)
직 업 : 무직(현재 운전기사)
조사일시 : 1989. 4
개 요
5월 18일(21일로 추정됨-조사자 주)부터 시위차에 탑승하여 외곽지역을 돌아다녔다. 5월 24일, 들어오지 않는 동생을 찾으러 송정리로 갔다가 광주로 돌아오던 중 서창 입구 검문소에서 운전면허증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상무대로 끌려갔다.
1980년 6월 4일 C급으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내성적인 아이
나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으나 집안 사정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다. 영암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다가 광주로 이사를 와 진흥중학교를 졸업하고 송정리 정광고를 다녔으나 도중에 중퇴했다. 원래 성격이 내성적인 나는 가정형편마저 어려워 사춘기의 반항적인 기질을 잘 극복하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하릴없이 빈둥거리다 동경의 도시인 서울, 부산 등지를 돌아다녔다. 2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다 보니 그것도 진력이 났다. 운전을 하는 것이 멋있을 것 같아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1979년 운전면허증을 딴 후 화물차 조수생활을 했으나 너무 힘들어 자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위차에 탑승하여
1980년에는 택시운전을 하려고 직장을 알아보던 중이었다. 5월,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뾰족히 하는 일이 없었던 나는 매일같이 시내에 나갔다. 뚜렷한 명분이나 뜻은 없었으나 학생들이 주장하는 것이 옳고 군부가 나쁘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겁이 많은 나는 시위를 하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하는 식이었고 시민군들이 총기를 배급해 줘도 받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시위차를 타고 유동, 임동, 백운동 등 외곽지역을 돌아다녔다. 시위차에 탑승하여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나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신현확 씨를 왜 물러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때 학생들이 유인물을 한 움큼 줘서 직접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유인물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부산항에 미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하러 왔다는 것과 지원동 버스종점에서 앰뷸런스를 타고 간 시위대들이 잠복해 있던 계엄군들의 집중사격으로 모두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5월 21일 전옥주 씨가 태극기를 덮은 두 명의 시체를 리어카에 싣고 돌아다니는 것을 봤다. 리어카 밖으로 시체의 다리가 삐져나와 덜렁거렸다.
오후 1시경에는 충금지하상가 공사장 사거리에서 고등학생이 탄 장갑차가 공수단이 있는 도청 광장으로 쏜살같이 질주했다. 곧바로 그 학생은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고개가 푹 고꾸라졌다. 나중에 그가 전남공고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 한 며칠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시민군들이 광주은행 본점 건물을 향해 총을 쏜 적이 있다. 그때는 대부분의 사무실이 커튼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은행 6, 7층 중 한 사무실의 창문에 커튼이 약간 젖혀진 것을 발견한 시민군들이 '계엄군이 저 건물에 있다'면서 총을 쏜 것이다.
들어오지 않은 동생을 찾으러
재수하던 남동생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시내에 다니면서 시체를 본 나는 동생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을 돌아다녔다. 먼저 전남대 부속병원 영안실로 갔다. 그곳에는 가족들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매우 붐볐다. 영안실 입구에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은 십여 구의 시체가 입관되지 않은 채 있었다. 그중에는 전투복을 입은 나이 드신 분이 목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체도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함평경찰서 소속의 경찰관이라고 했다. 다른 시체들의 형태나 나이는 자세히 볼 겨를이 없었다.
전남대부속병원에서 동생을 찾지 못한 나는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적십자병원의 영안실이 어디인지를 몰라 현관으로 갔다. 적십자병원의 현관벽, 유리창 등에 수십 명의 사망자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밑에는 '몇월 며칠 어디에서 들어온 시체, 인상착의…….' 등을 적어놓았다. 그곳에도 동생의 얼굴은 없었다.
서창 입구 검문소에서
24일 오전, 끝내 동생을 찾지 못한 나는 동생 친구들이 많은 송정리로 걸어서 갔다. 국군통합병원 부근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무장한 공수부대가 많이 있었지만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송정리에서 동생 친구들을 만났으나 그들 역시 동생의 행방을 몰랐다.
동생을 찾는 것을 일단 포기하고 광주로 오던 중 송정리 비행장에서 내린 수백 명의 공수들을 봤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중무장한 그들은 '알것 없다'며 열을 지어 계속했다. 아마 상무대로 간 것 같았다. 군인들과 헤어진 후 서창 입구 검문소에서 군인들의 제지를 받았다. 검문소에는 나처럼 지나가다 잡힌 사람들이 많았다. 군인들이 붙잡은 사람들을 분류하더니 여자들은 그냥 보내주었다. 그러나 나와 남자 두 명은 조사를 해야 한다며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운전면허증을 소지한 것과 목이 쉬었다는 것 때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메가폰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 사람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대중이 좋아하네
우리들은 대기하고 있던 군용트럭에 실려 상무대로 끌려갔다. 그곳에 있던 군인들은 다짜고짜 나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수사관이 워커발로 무릎을 치면서 "대중이 좋아하네"라는 말을 했다. 정치에 무관심한 나에게 갑자기 김대중 씨를 들먹거린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순간 '김대중 씨를 광주항쟁의 배후인 물이라고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수사를 하는가보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주먹과 워커발로 몇 대 때리더니 헌병대 영창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온 30-40명의 사람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주로 제화공, 양복점 시다, 세차장 인부 등 노동자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MBC 방화범이라고 지목된 사람과 시위하다 잡힌 방위병이 있었는데 그들은 특히 많은 수모를 당했다. 한번은 서울 외국어대 학생이 연행자들을 때리지 말라고 항의를 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그 학생을 영창 뒤로 끌고 가 양팔을 묶어 매달아놓았다. 또 노래를 부르거나 구 호를 외치다가 처벌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다.
27일 저녁, 군인들은 나를 비롯한 1백여 명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은 우리에게 "여기에 잡혀온 사람을 A, B, C, D급으로 분류하는데 너희들은 C급이다. C, D급은 곧 석방될 것이다"라며 부대내에 있는 교회로 데려갔다. 우리는 곧 석방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껏 보지 못한 험상궂은 인상을 한 군인들이 밤늦게 교회로 들어왔다. 그들은 오자마자 우리들에게 단체기합을 시켰다. 우리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반항도 못하고 맞아야만 했다. 서너 시간을 '엎드려뻗쳐' 자세로 무지막지하게 맞았다.
다음날 아침, 상무대 내의 군인들이 와서 '당신들은 참 운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제 당신들을 때린 군인들은 그들의 동료가 광주공원에서 시민들의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보복을 한 것이다'라며 위로를 해주었다. 정말 이유도 가관이었다 .
열흘이 지나도 우리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상무대 내의 군인들은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들을 통해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또한 5월 27일 도청이 함락됐다는 사실도 알았다.
석방되기 하루 전날, '정부시책에 적극 참여할 것이며 부대내의 일을 일체 발설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강제적으로 쓰고 1980년 6월 4일 석방되었다.
택시노조의 부조합장으로 일하다
석방 후 한약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던 중 동생이 돌아왔다. 동생은 서창에 있는 친구집에서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나는 원래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매맞은 부위의 상처가 악화되어 바로 일을 시작할 수가 없었다. 회초리를 맞으면 처음에는 벌겋게 부어오르다가 퍼렇게 멍이 들고 나중에는 새까맣게 되듯이 나의 온몸은 새까맣게 되어버렸다.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1980년 12월부터 택시운전을 하여 지금은 신진택시회사에 다니고 있다. 나는 우리 회사 노동조합의 부조 합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로 조합원들의 애로사항을 건의하고 기사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우리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을 시는 연대 택시파업을 한다. 그럴 때면 사용주들은 '회사에 물의를 빚는다. 노동조합법 위반이다…….' 등의 이유로 검찰에 고소를 했다. 그리하여 몇 번 해고될 뻔도 했었다.
5·18 광주항쟁 이후 학생들이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항상 선도적인 의식을 갖는 것 같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자이고 우리나라의 분단으로 자기네들의 이익만 차린다는 것을 학생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1980년에 열심히 싸우지 못한 나는 가끔 열심히 투쟁한 학생들이나 투사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작년(1988년)에야 5·18 부상자 신고를 했다. 사실 광주시민 대다수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 신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정부에서 자유롭게 신고를 하라고 했는데도 신고하는 사람이 적으면 우리들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를 준다'고 해 신고를 한 것이다.
정부는 5·18 때 사망한 유족들에게 정신적으로 위로를 해주어야 하고 아직도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책임지고 치료해 주어야 한다. 부상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부상자를 볼 때면 자연히 머리가 숙여진다. 정부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만 하지 말고 진심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