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스물일곱째날(8월16일.토)
■ 오늘의 일정 = 아비뇽 - 퐁두가르 - 보르도
■ '아비뇽'이라는 도시는 고등학교때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아비뇽의 유수'라는 말과 항상 함께 연상되는 도시다.
역시 고등학교 미술책에 나왔던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나오는 아비뇽이 한때 프랑스의 이 아비뇽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아비뇽이라는 한 거리 이름이라는 사실을 안 적이 있다.
아비뇽에 대해 과거 알고 있었던 상식은 중세때 유럽대륙에서 대립하던 황제권력과 교황권력 2개의 권력중 황제권이 교황권을 제압했던 때를 상징하는 말로 '아비뇽의 유수'라고 하는 것을 외워서 알고 있는 것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비뇽의 '유수'>
'유수'(幽囚)라는 말이 잡아 가둔다는 뜻인만큼, 황제가 교황을 아비뇽으로 잡아가뒀다는 말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교황이 쫓겨가 쳐박혀 살았던 프랑스의 한 조그만 시골마을로 아비뇽을 짐작했다.
그런데 오늘 둘러본 아비뇽은 당초의 예상을 넘어선 볼거리가 많고, 교황이 살았던 도시답게 위엄이 아직도 풍기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리고 '쫓겨가 살았던' 교황 치고는 너무 대단한 성을 쌓고, 아주 커다란 교황청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아비뇽 교황청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내가 아비뇽을 너무 초라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비뇽 유수'라고 할 때 '유수'라는 말의 뜻에 지배당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비뇽 교황청을 둘러보고, 그리고 아비뇽에서 펴낸 관련자료를 읽어보고는 개인적으로 '아비뇽 유수'에서 '유수'라는 용어 사용은 어쩌면 일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겼던 역사적 사건과 아비뇽에 교황청이 있었던 70여년의 역사를 한 마디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던 역사가가 아마 '유수'라는 표현을 사용했었을 것이다.
'유수'라는 표현은 기원전 6세기 무렵 이스라엘의 유다 왕국이 예루살렘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입으로 점령당하고, 함락돼 수만명의 유다 왕국사람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강제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활했던 '바빌론의 유수'를 본따서 지었다고 들었다.
유태교나 기독교 역사에서 모두 '외압'에 의한 좌절의 시기인 것이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빌론 유수'때는 그야말로 유태인들이 포로가 돼 강제로 바빌론으로 끌려가 생활한 것이지만, '아비뇽 유수'는 강제로 옮겨진 것이라기보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황이 아비뇽을 선택, 로마에서 교황청을 옮겨간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뇽 자료에는 교황이 로마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데는 물론 프랑스 황제의 힘도 크게 작용했지만, 로마 교황청이 있던 이탈리아 반도 역시 황제파와 교황파의 내부 권력투쟁으로 교황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던 여건도 적지 않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탈리아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기전인 13세기 내내 이미 교황은 로마에 머물지 않고 이탈리아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교황권을 행사했다.
그 와중에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은 프랑스의 필립왕에게 교황의 거주지가 습격당하는 굴욕도 겪으며 권위가 실추됐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복잡한 정세속에서 교황 클레멘트 5세가 이탈리아 내부의 골치아픈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예 이탈리아 바깥에 교황청을 두고자 했다.
마침 아비뇽은 교황권을 억누르던 프랑스왕 필립왕의 땅이 아니라, 교황의 종신이었던 앙주가의 샤를 2세의 땅이었고, 근처에 교황령도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비교적 안전한 망명지였다.
게다가 아비뇽이 기독교 유럽 국가인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기독교 유럽의 중심'이라는 명분으로 괜찮은 곳이었다. 그래서 교황이 선택한 땅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비뇽이 임시 교황청으로 자리잡았고, 나중에는 교황이 아예 아비뇽의 땅주인인 앙주가로부터 아비뇽땅을 사들여 교황령으로 만들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교황청과 아비뇽성을 번듯하게 짓고 70년 가까이 아비뇽 교황청 시대를 보낸 것이다.
그래서 '아비뇽의 유수'라고 할 때 '유수'라는 말이 교황권의 좌절이라는 상징적 메시지는 전달하지만, 아비뇽시대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고 이룩해놓은 아비뇽 교황청 시대의 역사를 너무 왜소하게 만들 우려도 적지 않다.
내가 '유수'라는 말에 지배되어, 아비뇽이란 곳을 교황이 쫓겨가 숨도 제대로 못쉬고 쳐박혀 살았던 시골 촌구석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비뇽의 유수'는 바빌론 유수처럼 강제로 끌려간 '유수'가 아니라 '자의반 타의반'에 가깝지 않을까 쉽다.
크게 보아 아비뇽 교황청 시대는 교황의 굴욕과 교황 권의 약화를 상징하던 시기인 것만은 틀림없다. 때문에 로마 교황청의 상징성, 교황권의 복원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로마로 교황청이 다시 옮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아비뇽 교황청 시대는 분명히 그 시기동안 말도 못하고, 쳐박혀 살았던 시대가 아니라, 기독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교황권을 복원하기 위해 그 나름의 꽃을 피운 것만은 사실이겠다는 생각이 아비뇽 교황청을 둘러보고 느낀 단상이다.
<매력적인 도시 아비뇽>
아비뇽은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는 11세기부터 교황이 건설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완벽한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역시 교황이 살았던 한때 중세 유럽 교회의 중심지였던 곳답게 성벽안의 건물과 도시 풍모가 권위가 있어 보였다. 아비뇽을 휘감고 론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론강에는 홍수로 대부분이 유실되어 일부가 남아 있는 12세기 무렵의 생 베네제 다리라는 아름다운 석교도 운치가 있었다.
성벽 입구에서 교황청으로 가는 길 주변의 옛 건물들은 은행, 명품 숍들로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면서 볼거리도 풍부했다.
30분 가량 도시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미니 열차를 탔다. 도로 위를 그냥 달리는 관광용 미니 열차는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뒷골목들까지 건물이나 정원들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더욱이 지금의 아비뇽은 여름의 유명한 아비뇽 연극제로 널리 알려져 문화의 도시로도 꽃피우고 있었다.
아비뇽에도 구매욕을 자극하는 예쁜 물건들이 많았다. 아비뇽을 중앙에서 가로지르는 번화가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윈도우 쇼핑을 하다가 민석엄마는 샌들을 하나 샀다. 19유로로 너무 쌌다.
여행 내내 샌들을 신은채로 너무 많이 걷다보니 급기야는 니스 해변가 자갈길에서 샌들 축이 떨어져, 어제 마르세이유 여행때는 운동화 신고 다녔었다. 가격은 싸지만 색깔도 디자인도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퐁 두 가르'와 로마인의 위대함>
아비뇽을 떠나 보드도로 향하는 길에 '퐁 두 가르'(Pont 여 Gard)를 들러기로 했다.
이번 여행기간동안 내내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이곳 '퐁 두 가르'였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을 때, 로마제국 로마인들이 수로(水路)를 만들면서 그들의 토목.건축기술을 집대성해서 지은 다리로, 조형미까지 갖고있는 다리라고 적혀 있었다. 저자는 침이 마르도록 여러차례에 걸쳐 퐁 두 가르의 대단함을 평가하고 있었다. 당시 언제 한번 꼭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곳이다. 로마인 이야기에 나온 이 다리의 원경을 찍은 자료사진도 매력적이었다.
아비뇽에서 불과 30km 남짓 떨어진 지점에 있어 국도를 따라 달리노라니 '퐁 두 가르' 이정표가 계속 나와 이정표만 따라갔다.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멀리서 계곡사이에 걸쳐 있는 '퐁 두 가르'의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서도 볼 수 있도록 관광지로 잘 조성돼 있었다.
역시 현장에서 직접 본 '퐁 두 가르'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퐁 두 가르'는 당시 남프랑스의 로마제국 중심도시였던 님(Nime)의 분수, 정원, 목욕탕 등에 사용하기 위한 물을 끌어다 나르기 위해 내륙지방 수원(水源)에서부터 님까지 장장 50km에 걸쳐 만들어졌던 수로중 한 부분이다.
계곡 양안을 연결하는 수로의 부분으로 만들어졌지만, 단순한 수로가 아니라 그야말로 스펙타클한 건축물로서 만들어졌다.
3단의 아치가 차례대로 쌓여 총높이가 48.77m, 6개의 아치로 이뤄진 1층 다리의 길이는 142m, 11개의 아치로 이뤄진 2층 다리는 242m, 35개의 아치가 있고, 상층부에 수로가 있는 3층 다리는 490m 규모이다. 3층 다리위에 있는 수로는 높이 1.9m 폭 1.4m의 돌로 이뤄진 통로이다.
이 모든 다리가 커다란 직육면체 모양으로 자른 돌덩이들을 갖다 붙여 조립식으로 만들어졌는데, 돌덩이 하나하나에 기호나 일련 숫자가 표시돼 있어 외부 석재채취장같은 곳에서 돌덩이들을 돌블럭으로 잘라서 현지로 옮겨와 조립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퐁 두 가르'가 포함돼 있는 이 50km에 달하는 수로의 양끝은 수원(水源)인 우제(Uzes)라는 곳과 로마제국 도시 님(Nime)이다. 수질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로마인들은 수량이 풍부하고, 맑은 물로 고대부터 유명했던 우제지역을 선택했다. 우제와 님 두 지역의 직선거리는 불과 20km이다. 하지만 두 곳을 연결하는 수로길이는 50km에 달했다. 자연경관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자연적인 방해물들을 우회하거나 가로질러 가면서 만들었기 때문에 수로길이가 직선 거리의 두배이상이 됐다고 한다.
그리고 수원인 우제와 도착지인 님의 높이는 12.27m의 차이가 있는데, 수로의 자연적인 경사도에 의해 물이 우제에서 님까지 자연스럽게 흘러 도달할 수 있도록 경사도를 정밀하게 계산을 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계산하면 평균 1km 거리당 24. 54cm의 기울기가 이뤄지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얘기다.
그것도 님의 거주민 5만명이 매일 사용하는 3만5천∼4만㎥의 물이 지속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놀라운 일이다. 로마인들의 수학, 토목, 건축 기술의 수준을 모두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수로의 한 부분인 '퐁 두 가르'는 아름다운 계곡과 어울려 아름답기까지 하다.
로마제국의 몰락이후 번성했던 님의 인구도 점차 감소해지나 9세기 무렵 이 수로의 사용도 중지됐다고 한다. 그리고 중세에는 인근 주민들이 집 짓는데 사용하기 위해 수로의 돌블럭들을 마구 빼내가 훼손이 이뤄졌다. 그러다 '퐁 두 가르'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나폴레옹 3세의 명에 의해 수로의 일부가 복원됐다고 했다.
'퐁 두 가르'가 가로지르는 계곡은 정말 멋있게 강이 흐르고 있어 카누를 즐기거나, 수영을 하고, '퐁 두 가르' 1층 아치옆이 5-6m 높이쯤 되는 바위에서는 풍덩풍덩 다이빙을 하는 아이들도 보이는 등 훌륭한 피서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퐁 두 가르' 계곡과 강에 가족 단위로 수영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n
<비오는 밤길 600 km 주파>
아비뇽과 퐁 두 가르의 아름다움에 반해 시간을 너무 빼앗기다 보니 오후 7시가 넘었다.
유럽으로 오기전 일본에서 짠 일정은 지중해 연안지역을 둘러보면서 서쪽으로 이동,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들어가 바르셀로나를 보고 프랑스 보르도로 가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동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 지중해쪽도, 바르셀로나도 제대로 못볼 것 같아 남프랑스쪽에서 나흘을 보내고 보르도쪽으로 바로가기로 니스에 도착해서 일정을 변경했다.
이에 따라 정한 오늘의 목적지는 프랑스 보르도. 이곳까지 거리는 600km 가까이 됐다. 늕은 시간에 출발했기 때문에 무리하게 보르도까지 주파하느냐, 아니면 350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는 뚤루즈(Toulouse)에서 묵느냐 고민했다.
오늘 좀 무리를 하고, 내일 여유있게 보르도를 보기 위해 보르도까지 강행하기로 했다.
줄곧 시속 150-160km로 달렸다. 프랑스 고속도로는 워낙 넓게 쭉쭉 뻗어 있어 이 정도 속력은 별 무리가 없었지만 해가 떨어져 캄캄해지고, 게다가 갑자기 번개.천둥까지 쳐대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속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보르도에 도착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밤길에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예약한 보르도 에탑호텔에 도착했지만, 자정이 넘은 탓에 프론트직원이 없었다. 프론트직원이 없는 밤에 도착했을 경우 무인체크인 시스템을 이용하라는 인터넷 안내대로 무인 체크인을 했다. 호텔 정문앞의 모니터에 예약번호를 누르고, 크레디트 카드로 결제를 했더니 방 넘버와 이용자 비밀번호가 틔어 나왔다. 닫혀 있던 정문앞의 키보드에 이용자 비밀번호를 차례대로 누르니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역시 방도 마찬가지다. 에탑호텔은 이런 점에서 아주 편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