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열며-
게으름은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부패에 뿌리를 내린 그릇된 자기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습니다 , 거룩한 삶을 위한 성화의 싸움은 언제나 게으른 본성과의 다틈을 동반하였습니다.
그 후 주님을 깊이 만나고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면서, 저는 더욱 제 자신 안에 있는 게으름을 혐오하게 되었고, 언제나 내 안에 있지만 내가 아닌 타자인 것처럼 그것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성화에 있어서 게으름이 얼마나 은밀하면서도 큰 대적인지를 알게 된 저의 깨달음의 일부를 소개한 것입니다.
-웃다가 시무룩해진 이야기-
구원받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주니모가 더불어 영적인 기쁨을 송하며 살지 못하는 것은 그가 거룩해지고자 힘쓰지 않기 때문입니다(저는 개인적으로 힘쓰고자 간구하지 않아서 이다라고 바꾼다)
사람들은 노동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노동 자체는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다만, 노동에서 경험하는 열매 없음과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새 성품은 날마다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고 그 분의 성품을 알아가기를 힘쓰려고 하지만, 우리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옛 성품은 나태하게 지내려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게으르려고 합니다.
생각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명을 좇으려 하지 않고, 정서는 더 이상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세속적인 사랑을 경계하려 하지 않고, 의지는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죄악된 욕망에 대하여 저항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에 대한 그러한 모든 무기력한 게으름 뒤에는 자기의 마음의 정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정체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모든 죄는 항상 우리의 성품 속에 깃들여 우리와 하나 되려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평생 올바른 원칙을 따라서 살며 자신의 사상과 삶을 일치싴 놓은 사람만이. 그 거대한 강물에 새로운 흐름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 옳지 못한 것에 항거하고 큰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하는 목습을 보여줄 때, 민족의 정신도 그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여 서서히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에서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라-
성화의 진전이 교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성화는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교회에서 검김이 사회에서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일이라고 생가하지 마십시오,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섬기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충성스럽게 삽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죄인들이 모인 곳인데, 세상이 더러우면 얼마나 더럽고 교 회가 도덕적이면 얼마나 도덕적이겠습니까?( 나는 이 의견에 대해 좀 다른 생각이다 똑같이 죄인이지만 주님의 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죄인과 무방비상태의 죄인과는 틀리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세상이 선교지라는 것에 대한 다를 이견은 없다)
우리의 사회 활동의 최우선 목적은 사람이 이땅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리스도를 모르는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직업의 소명 의식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분병하게 정리된 정신 세계를 갖고 잇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고난 입담으로 개똥철학을 널리 퍼뜨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많은 백성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건강한 사상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진전없는 삶-
게으른 자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적인 것에서 진전이 없는 삶입니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 속에 잇는 무엇을 쏟아 내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체력을 소진하거나, 자기가 가지고 잇는 물질을 헌신하거나 해서라도 뭔가를 이루어야 하겠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없는 삶-
신자의 살이 단순해지짖 못하는 것은 여러가지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사람들은 목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자기를 절제하거나 재정돈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게으름의 발전-정욕
발전된 게으름은 정욕들을 계속 솟아나게 하여, 신자로 하여금 의무를 수행하지 않음으로 편안함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악을 행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고자 하도록 만듭니다.
전에는 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무엇을 하라고 요구만 하지 않으면 편할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한걸음 더 진전하여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죄를 지어서라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후자의 욕구는 전자의 욕구보다 훨씬 강합니다.
죄를 지은 대가를 치르며 느끼는 괴로움보다는, 불타오르는 정욕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접근하지 못할 때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더 힘든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 굶은 사자 앞에 시뻘건 살코기르 두고 쇠창살로 막아 놓았다면 그 사자가 어떻겠습니까? 미친 듯이 침을 흘리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그 사자에게는 사냥감을 얻기 위해서 며칠간 뛰어다니는 것보다 눈앞에 먹이를 두고서도 자기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입니다
-게으름의 발전을 조장하는 비교의식-
"너는 신앙에 있어서 겨우 햇병아리 이닌까 그렇게 살지 않아도 돼' 등의 말로 지성의 동의를 받으면 게으름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으 ㄴ시간 문제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저는 목사라는 의식 속에서 살 때보다는 신자라는 의식 속에서 살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의 본분에 대한 인식 없이는 결코 성직에 대한 인식도 있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은 채 자기의 기준으로 신앙의 수준을 분류하여 자신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리다는 이유로 의무를 저버리는 일에 변죄부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절대적인 관계만 생각하게 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교만해지거나 안일해지지 않습니다. 그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판단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이 나침반이 되어서 나의 양심과 신앙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게으름의 싹을 자르라
애초부터 게으름이 우리에게 파고들지 못하도록 하루하루 자기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써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삶이야말로 게으름이 정욕으로까지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처치 방법입니다.
물론'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미래가 있나?" 등의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고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고달프지만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으로 나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 일에 충성하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해서 보상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의무에 대한(기도,교제,전도.말씀묵상...) 부지런히 삶을 사는 것에 대한 회의가 여러분들로 하여금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면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은 단지 회의일 뿐이지만, 내버려 두면 그것은 그 의무를 저버리게 만들것이며, 그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나면 온갖 더러운 정욕들이 벌떼처럼 엄습해 자신의 욕구를 채워 달라고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에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반응해도, 주신 은혜의 계획을 따라 자기를 쏟아 붓는 부지런한 삶의 실천이 없이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실천하는 삶이 없이는 결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