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민영방송 CBS 기독교 방송 KY ( 2 )
1954년 12월 15일 오후 6시 !
창사특집드라마와 성경공부, 축하음악회,
어린이시간 등으로 편성된 첫 민영방송의 전파가 울려
퍼졌습니다. 종교방송이 주목적이기는 했어도 창사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할 만큼 드라마에 힘을 기울였으며
음악에 큰 비중을 두고 출발했습니다.
첫날에는 4시간 반의 방송으로
출발했지만 열흘 후에 실시한 크리스마스 심야
철야방송은 방송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 하기도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종일방송을 실시했으며 4.19등을
거치면서 더 큰 국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KY뉴스는 4. 19와 5.16그리고
70년대의 어둡던 시절에 국민들에게
밝은 빛이 되었습니다.
초창기에는 KBS뉴스를 받다가 1957년
VOA와 제휴하면서 VOA뉴스를 중게방송했고
1958년 2월 1일부터 동화통신과 재휴하면서 독자적인
뉴스방송이 시작되어, 2년 후의 4.19보도는 KBS가
국영방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 서울에
민영방송이 없던 시절에 KY는 바른 보도를 통해서
전 국민의 사랑받는 방송국이 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초창기 기자들의 모습이고 아래 사진은
1957년 5월 1일 VOA와 뉴스제휴를 하던때의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뉴스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KY이었지만
4.19가 일어나고 종로 2가에 자리하고 있던 KY건물에서
바라다 보이는 광화문과 종로의 시가행진 모습을 보면서
모든 직원들은 뉴스현장으로 뛰었고 그때그때 발행되는
통신이나 신문은 좋은 뉴스원이었습니다.
속보성을 바탕으로 한 방송은 신문이 발행된 뒤
그 내용을 바탕으로 뉴스방송을 해도 신문이나 통신보다
빨랐기에 사람들은 방송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발음이 정확치
않아도, 문법이 틀려도, 방송에 잡음이 실려도 급변하는 소식에
목말라하는 국민들은 방송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새로 들어선 정부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아래 사진은 장면총리로부터 감사장을
받는 감의도님입니다.
4.19는 KY위상을 한층 높였고 60년대
민영방송 경쟁대열에 끼어들어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KY보도는 돋보였습니다.
외국인이 방송국 대표가 될 수 없다는
법률개정에 따라 감의도님이 방송일선에서 물러나고
잠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1970년 들어 경영과 방송을 겸비한
덕망있던인사 오재경님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무보수 특별봉사를
표방하고 노력을 기울임에 따라 KY는 국민 곁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섰습니다.
오재경 사장은 보도 논평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보도기자를 새로 뽑고 내용을 쇄신
했습니다. 얼마 후에 다가온 유신독재 하에서 언론들이
숨죽이던 때 KY는 갈 길을 갔습니다.
보도방송시간도 50분대의 10분간의
방송에서 30분대의 30분간의 방송으로 늘렸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말의 10.26과 5.17을 지나 신군부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1980년 11월 언론 통폐합의 물결에 휩싸이고
모든 방송이 KBS로 일원화되면서 KY의
보도기능도 상실되었습니다.
그때 보도를 담당하시던 분들은 방송통폐합과 더불어
KBS합류했고 이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KBS사우회 회원으로
계십니다.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와 더불어 KY의 보도기능도 회복되어
1988년 1월부터 보도국이 부활되고 뉴스방송을 실시했으며
6월부터는 스포츠방송도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당시 인기있던 창극으로 성경 이야기를
엮어 방송함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장면이고 아래 사진은
1970년부터 74년까지 기독교방송의 대표로 재작허시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신 오재경선생님의 재직시 모습입니다.
창사 때부터 드라마에 역점을 둔 KY는
1955년의 대원군에 이어 1957년부터 실시된
한운사작 “이생명다하도록”조남사작 “수정탑”등의
멜로드라마는 청취자들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1956년 KBS가 조남사작 “청실홍실”을
시작으로 멜로드라마의 막을 올리고 새로
출발한 KY가 80회 또는 120회의 멜로드라마를
방송하면서 드라마는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자라잡기 시작했습니다.
초기 KY 주요 드라마 방송현황입니다
아래는 1957년 남, 녀 한사람씩의 성우를 뽑을때
2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려든 현장입니다.
KBS와 KY의 드라마가 자리를 잡을 때
1960년대의 민영방송이 출현하고, 라디오방송전성시대를
맞으면서 드라마는 방송의 꽃이었습니다.
KY음악방송은 시간적으로는 제일많은 방송시간을 할애받았고
국내에서 수준높은 레코드를 제작하거나 구입하기가 어렵던 시절.
미국에서 질 좋은 대량의 LPG판을 들여와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음악 프로그램 편성이 60%를 넘어 70%까지 편성될때도 있었습니다.
일반가정에서 오디오시설을 갖추기 어려웠던 시절이어서
KY의 종교음악을 비롯한 수준 높은 고전음악방송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벗이 되었습니다.
KY의 음반자료실은 기독교방송의
자랑이었고 KY뮤직홀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클래식 전문 음악 감상실이었습니다.
KY는 창경원등 야외 공개방송등으로
청취자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가졌습니다.

KY는 어린이 방송시간, 대북방송 등
종합방송으로 그리고 위성을 통한 국제선교
방송으로 힘찬 발돋움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정경화양이 어려서 KY에 출연했을때모습입니다.
기독교방송은 창립당시부터 방송을 통해 북한에 선교를
하겠다는 포부를 품어왔고 또 실제로 많은시간을 할애해서
북한동포를 향해서 선교활동을 해 왔습니다. 모든 대북방송이
그랬듯이 북한에서 남한의 방송을 얼마나 들을 수 있으며
어떤 효과를 가져 올것이냐는 의문이었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실재적인 효과가 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아래사진은 북한선교활동의 한 장면입니다.
기독교 방송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이 글은 1959년부터 오랜 기간 CBS기술 책임을
맡으셨고 CBS사우회 회원이시면서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
노익중님의 도움으로 썼습니다.



CBS사우회 회원으로
방우회 화원이시기도 한 노익중님 제공
추억의 사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