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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오(咸吳) 대종회 총무이며 용계공파 창건씨 에게서 설명 듣고
내용 일부 수정합니다. 수정첨가내용은 파란글씨로 나타냅니다)
세거지 (3) 한내- 용계공파(龍溪公派)
족보(戊寅譜 1998년 판) 첫머리에 나오는
영양파 세계도(世系圖)를 보겠습니다.
파란 선이 영양파 계통도 입니다.
용계공파(龍溪公派)는 영양 4개파 중 제일 맏집 대종가 이며
그 세거지 ‘한내’ 는 한자로 대천(大川)이니
곧 지금 경북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일대 입니다.
수정 : 9세(世) 영양입향조 분의 휘(諱) 가 삼수변에 畢 입니다.
문제는 족보 세덕편의 세계분파도 (世系分派圖) 가 잘못 인쇄되어
저로서는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또 이 카페의 환경이 삼수변에 畢 자가 지원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림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으니 바로 다음 글자 입니다.
그 동안 행정동을 무리하게 한자화 하여 좋은 우리말 이름들이
다 사라져 버렸는 데, 되살리기 운동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한내, 구도실, 무실, 가마실, 박실, 닭실, 등이 大川 , 道谷 , 水谷 ,
釜谷, 朴谷, 酉谷 보다 더 정답지 않습니까 ?
9세(世) 되는 휘(諱) 필(삼수변에 畢)짜 분이 진보(眞寶)에서
영양 원당(元塘) 으로 옮겨 온 것이 (自眞寶于英陽縣東元塘里)
대략 1500 년 대 초반입니다. ( 下限 1553년-즉 이 어른 돌아가신 해 ! )
원당(元塘) 은 어디 인가 ?
영양 처음 들어와 살았다는 원당(元塘)이 지금 행정구역은 아닌 듯 하고,
마침 집에 1970년에 나온 영양군지가 있어 찾아 보니
‘元塘堤七里許 英陽面 下院洞’ 이란 구절이 있습니다.
원당제는 원당리에 있는 보-제방일 것이고
영양면 하원동은 지금 영양읍 하원리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영양읍과 한내(大川) 일대를 항공사진으로 보겠습니다.
지도 중앙에 영양경찰서가 있고 그 위에 ‘원당지’ 가 있고
다시 ‘내원당지’ 라는 작은 못이 있습니다.
처음 영양 들어와 자리 잡았다는 영양현 동쪽의 원당(英陽縣東 元塘) 이란
원당지나 내원당지 근처 아니겠습니까 ?
다시 우하(右下)에 종가와 문월정(問月亭)이라고 제가 표시한 곳이
영양군 영양읍 대천1리 449 번지 입니다.
지도로 보면 원당은 현재 용계공파 종택에서 그다지 머지 않습니다.
비리골 (飛鯉洞) 산소 항공지도
영양으로 처음 옮겨 온 9세(世) 휘(諱) 필(삼수변에 畢)짜 분은
계축년 (癸丑; 추정 1553년 명종 8년 ? 2편 글 참조)에 돌아 가시니
그 산소는 비리골 (飛鯉洞) 입니다.
족보기록 : 9세(世) 필 (삼수변에 畢)
彰信校尉 中部將 …. 墓郡東 飛鯉洞 機頂 寅坐
위 ‘한내일대지도’ 에도 비리골 산소 표시를 했지만 이제 자세히 보겠습니다.
비리골 (飛鯉洞) 산소 원경
용계공파 로서 현재 대종회 총무를 맡고 있는 창건씨에게
지번을 물으니 영양군 영양읍 상원2리 산 107 이라고 하여
그 지번에 붉은 핀을 꽂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붉은 핀 쪽을 아무리 보아도 그냥 풀숲이고, 핀에서 왼쪽
그러니까 10시 방향으로 산소 같은 것이 있습니다.
다시 그 부분을 확대 해 봅니다.
네.. 아마도 붉은 핀은 해당 지번 중심점일 것이고
실재는 위 사진 정 중앙에 보이는 5기(基) 산소 입니다.
아….이 어른이 사위(女胥)로 조(趙)씨를 보았는 데 (諱:원(源),
한양(漢陽) 조(趙)씨가 영양(英陽)에 살기 시작한 것이
이 사위 분부터 라니, 영양(英陽)의 두 대성(大姓) 오조(吳趙)는
실로 한 분에게서 비롯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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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산소를 한번 더 확대하여 창건씨 해설을 곁들입니다.
중앙에 있는 산소가 바로 우리 9세(世) 분 휘(諱) 필 짜 분이고
왼쪽에 (산세로 보아 아래쪽) 쌍으로 있는 산소가 우리 어른의 사위 내외
즉 위에서 소개한 영양(英陽) 의 조씨네 입향조 휘(諱) 원 짜 내외분 산소
오른 쪽(산의 윗쪽) 이 사위 조씨네 아들 - 우리 9세 분의 외손자 내외
산소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어른을 아래에서 사위가 위에서 외손자가 지키고 있습니다.
보통 후손 산소를 조상 위쪽으로 쓰는 것을 꺼리는 데,
외손자 산소가 할아버지보다 높이 있으니
창건 씨가 역장(逆葬) 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창건 씨가 재미나는 전설을 하나 소개하는군요.
원래 명당은 사위 내외가 누은 즉 제일 왼쪽 산소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자리를 보아 두었는 데, 딸이 몰래 물을 갖다
부었답니다. (자기네 시집 잘 되게 하려고)
우리 조상 산소를 쓰려고 보니 물이 나와 포기하고 가운데 자리에 쓰고
그 뒤 진짜 명당자리에는 딸 즉 사위 내외가 묻혔답니다.
뭐 이런 종류의 설화는 우리나라에 무지하게 많지요 ^^
선생 날 자리에 딸이 와서 해산하는 바람에 그만 본집은 발복(發福)을
하지 못하고 외손네로 흘러 갔다던가.
아마 율곡선생에 얽힌 설화에도 같은 것이 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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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내로 돌아 와서…
11세(世) 문월당(問月堂) (휘(諱) 극성(克成) 공(公) 행장기(行狀記) 에,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의 연호 1522-1566) 기미(己未)년 (1559년) 에
문월당(問月堂)이 한내 (大川) 에서 태어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生公於英山之大川里第)
여기 문월당(問月堂)이 났다는 ‘한내’ 집은 현재의 용계공 종택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양군 사이트 (http://tour.yyg.go.kr )
문월정(問月亭) 해설에 ;
“…….문월당 선생은 정자를 불태우고 그 뒤 영양 서부동으로 이거
했다고 전한다. 그 후 서부동 북세에서 수비면 신원(문수당)으로
이사하여 약 100년정도 살고 지금 대천 1동으로 와서도 …..”
라는 구절이 있으니, 현재의 용계공파 종택은 아무리 빨라도 1700 년대
후반 보다 더 앞서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용계공파(龍溪公派) 종택과 문월정(問月亭) 항공사진
현재 용계공파(龍溪公派) 종택과 문월정(問月亭)은 지번이 같아,
영양군 영양읍 대천1리 449 번지 인데, 항공지도로 보겠습니다.
붉은 핀이 449 번지로 핀의 아래쪽에도 기와집이 보이고
왼쪽에도 있는 데 어느 쪽이 종택이고 어디가 문월정(問月亭) 인지?
아마도 종가집이 뒤쪽 즉 산쪽에 있고 정자가 앞쪽이 아닐까요 ?
문월정(問月亭)
위는 족보(戊寅譜) 세덕편 화보에 실린 것을 스캔 한 것입니다.
이번 글 첫 머리에 실은 세계도(世系圖)에도 나오다 시피
문월당(問月堂)의 동생 분이 구도실(道谷) 취은당파(醉隱堂派),
세 아드님- 맏분이 용계공(龍溪公), 둘째 분이 우재공(愚齋公)
셋째 분이 취수당공(醉睡堂公)으로 각각 한파의 조상이 되니
문월당(問月堂)은 영양 4개파의 한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이 어른에 대하여는 족보 행장기나 영양사이트 (http://tour.yyg.go.kr ) 나
대동소이 (大同小異) 한 데…..
영양군에서 올린 것도 정보의 출처는 우리 집안 아니겠습니까 ?
족보 행장기 보다 영양군 쪽 글이 현대문이라 젊은 분들
읽기 편할 듯 하여 그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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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황간현감(黃澗縣監)을 지낸 문월당 오극성(問月堂 吳克成)
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은 1177년에 금자광록대부를 지낸 함양부원군의 12세손이며
(필자의 주 : 함양군의 11세손 인데, 잘못 표기한 듯)
참봉 오민수(參奉 吳敏壽) 선생의 아들로서 영양읍 대천 2동에서
1559년 출생하였다.
선생은 1592년 왜구가 대거 침입할 때 국세가 판탕하고 국운이 불리하매
동생 윤성(允成) (필자의 주 : 취은당파(醉隱堂派) 조상분)과 함께
학업을 중지하고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되어 선전관에 임명
삼남지방을 지키는 이순신, 권율, 김수등 장군과 소식이 불통할 때
중책을 맡아서 연락과 적정을 탐정하여 선조 대왕에게 보고를 하니,
익일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를 특제하시고. 또 도총도사(都摠都事)를
임명하시더니 1596년에 황간현감(黃澗縣監)을 제수하였다.
그 후 시강원 시독관(試講院侍讀官)으로 원종록(原從錄)에 올라 있는 고로
만력 33년 (필자의 주 : 1605년) 4월 16일 갑궤 속에 “어사단서(御賜丹書)”라
쓴 책 속에 선무원종공신록(宣武原從功臣錄)과 교지 및 칙지를 하사받아서
보관하고 있으며 문월당 선생은 정자를 불태우고 그 뒤 영양 서부동으로
이거 했다고 전한다.
그 후 서부동 북세에서 수비면 신원(문수당)으로 이사하여
약 100년정도 살고, 지금 대천 1동으로 와서도 문월정을 이건하지
않은 것은 명고서원에 문월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므로
자손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화재가 빈번하여
문월정 중건이 늦었으나 문월당 종택 개축시 뒷산 아래에
중건을 하게 되었으니 약 20년 정도 된다.
임금님으로부터 하사받은 갑궤로 인하여 대천 2동에 있던
제택 60여간 문월당을 전소하였다고 전하여 오며
그 갑궤에는 종손이 아니면 열지 못한다고 전한다.
그 궤는 이중 궤로서 궤 겉으로 가죽을 입혔다고 하며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궤는 반소되었으나
책만은 소중히 보관하고 있으며 문월당선생의 임진란 전공은
이충무공 한산도 대첩비에도 기재되어 있다.
이 정자는 남향으로 종택과는 약 백여 보 정도이다.
앞에는 영해로 통하는 대로가 있으며 (필자의 주: 2편에서 이야기한
울팃재-영해로 가는 918번 도로) 서쪽으로는 장수계곡(長水溪谷)
맑은 물이 흘러서 동천으로 함수되며 정하에는 자손들이 화수촌을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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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중건(重建)한 지 얼마 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문월당(問月堂) 은 1559년 기미(己未) 생, 1617년 정사(丁巳) 졸(卒)로서
산소는 청기 갓등 (官嶝) 입니다. 갓등산소 항공사진은 청기편에서
올리겠습니다.
문월정(問月亭) 보다는 영양읍에서 한내와 비리골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삼구정(三龜亭) 이 오래 된 건물인 듯 합니다.
삼구정 (三龜亭)
우선 항공사진으로 위치를 보구요.
중건 전(重建 前) (족보 화보에서 스캔)
중건 후(重建 後) (족보 화보에서 스캔)
영양군 사이트의 삼구정 (三龜亭) 해설
이 정자는 황간(黃澗) 현감을 지낸 문월당 오극성(文月堂 吳克成) 선생의
장자인 용계 오흡(龍溪 ; 흡 (삼수에 翕) 1576~1641) 선생의 정자이다.
선생은 일찍이 간제 선생에게 글을 배웠다.
광해군 때 이이첨이 정치와 사회를 어지럽히고 모후를 가둘 때
여러 선비와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배 이이첨을 죽이라고
상소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삼전도(三田渡)에서 하성할 때,
선생이 거처하던 대천2동에 삼구정을 세웠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가 일어나서
정자를 위시해서 다른 건물들을 불태웠다.
그 후 맞은편 강 뚝에 다시 정자를 세우고 만년에 수양하였으며,
사명대(思明臺)를 만들고 송국매죽을 심고 글과 술로서 세월을 보내었다.
조정에서는 선생의 절행(節行)을 착하게 여기어 1639년에 승훈랑 호조좌랑
(承訓郞 戶曹佐郞)이란 벼슬을 주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삼구정이란 이름은 사명대(思明臺)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세 바위가 줄을 지어 정자를 등에 업은 것 같고
정자의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아서 지었다고 한다.
한줄기 맑은 냇물이 동쪽에서 흘러내려 정자 아래에서
동천과 반변천이 합류되며 그 앞에는 영해로 통행하는 대로와
대천교가 있어 일대산맥이 가로질러 기암층벽을 이루었다.
중략
이 정자 마루 위에는 용제당이라 게편되어 있고
그 당시 태명절의에 뜻을 같이한 명사들의 운시(韻詩)가 있으며
사명대(思明臺)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이며 정자부근에는 유원지가 있고
경치가 좋아서 사람들이 끊일 사이가 없이 많이 찾아온다.
필자(筆者) 의 주 :
간제 : 영양군 사이트에는 간제로 되어 있으나 간재 가 옳습니다.
간재(艮齋) 이덕홍 [李德弘, 1541~1596] 본관 영천(永川). 예안(禮安) 출생.
퇴계 (退溪) 이황(李滉)의 문인. 영주의 오계서원(汚溪書院)에 제향.
족보 용계공 행장에 보면;
글을 배울 때, 간재 선생이 여러 번 칭찬하시고 (先生屢加稱賞)
노선생(老先生)의 유묵(遺墨) 과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주셨다
(以老先生遺墨聖學十圖與之) 는 구절이 나옵니다.
여기의 노선생(老先生) 이란 간재(艮齋)의 스승인 퇴계(退溪) 일 것인데,
용계공 종택에서 이때 얻은 퇴계(退溪)의 유묵(遺墨) 과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아직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이첨을 죽이라고 상소 했으나 …..;
역시 용계공 행장에 보면
與嶺中多士 : 영남의 여러 선비와 같이
聯疏請誅 逆臣爾瞻 : 역신 이이첨을 베라고 상소를 올리되
疏出公手 : 소(疏)의 내용은 공(公) 의 손으로 작성 하였으며…..
이이첨은 광해군 때 정국을 장악했으니 현대사로 말하자면 이후락
정도 되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권력 핵심인물을 베라고 (誅殺)
감히 공개적으로 요구하던 당시 선비들의 기개도 대단하고,
또 이런 상소를 올릴 수 있던 조선조의 시스템도 돋보입니다.
박통 때 차지철을 제끼고 직언 할 수 있던 인물이 아무도 없었고
결국 그 부작용으로 궁정동의 비극이 일어 났으니
오늘 우리가 옛날 보다 결코 진보한 것만은 아닙니다.
사명대(思明臺)
란 명나라를 생각 한다는 뜻이니, 우리나라도 아닌 외국
그것도 망한 나라를 뭣하러 생각하며 또 정자까지 짓고
명사들과 어울려 차운(次韻)하며 울분을 토하느냐 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요 며칠 족보의 행장기를 보다 보니 숭정후(崇禎後) 라는 기년이 있습니다.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로서 1644년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 보면 숭정후(崇禎後) 몇번 째 돌아오는 무슨 갑자
하는 식으로 기년을 쓰지, 결코 청나라 연호를 적지 않는 선비들 관행이
있었습니다. (물론 공식문서에는 강희, 건륭 등 청나라 연호를 써야 했지요.)
연암 박지원이 북경 가는 것은 명나라가 망한 지 백 오십년 뒤 임에도
그의 열하일기에는 숭정후(崇禎後) 몇 년 하는 식으로 적혀 있습니다.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비록 힘이 약해서 삼전도에서 항복은 했지만
청나라 오랑캐를 마음으로 받아 들일 수 없고, 우리 조선이야말로
(당시 알던 세계 전체의) 문화 한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해설은 글 꼭지를 따로 잡을 수 밖에 없고요,
다만 수백 년 전 일이라서 이해 하기 어렵다면 몰라도
오늘 날의 잣대로 지레 짐작, 판단 하려 들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처사(處士)
용계공 행장기 마지막 부분 -돌아 가실 때 장면 입니다.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戒諸子曰)
“ 내 평상시 두건과 유복 만을 입었으니 (余平常只著山巾野服)
죽은 뒤에는 명정에 처사(處士)라고 쓰도록 하라 (死後以處士題旌可也)
옛날 벼슬하지 않은 남자 조상은 명정에 보통
“ 학생(學生) 어디 무슨 공(公) “ 등 주로 학생(學生) 으로 씁니다.
요즈음 젊은 친구들이 학생(學生)하면 Student 를 연상하고 웃습니다만,
이때 학생(學生)은 유학(儒學)- 선현의 도리를 공부하는 학자(學者)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런데 경북에서는 주로 처사(處士)라고 씁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 지는 저도 자세히 모르니 어른 분들 말씀을
더 들어 보아야 겠습니다만, 아마도 조선 후기에 영남 선비들의
벼슬길이 영영 막혔던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 까 합니다.
조선후기 영남의 남인들은 몇 차례 기를 쓰고 정권에 도전해 봅니다만
결정적 순간에 번번히 패한다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었습니다.
그나마 도전도 영조대왕 이후는 거의 없다가, 정조대왕 때 사도세자 복벽
문제로 유명한 영남만인소를 올리며 마지막 노력을 해 봅니다만,
정조대왕이 승하하니, 그 이후는 중앙 정권과 아예 인연이 끊어집니다.
따라서 벼슬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못하니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는
산림처사를 자처할 수 밖에 없었던 분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며,
용계공 때는 미관말직 몇 자리는 차례에 돌아 올 때 인데도,
‘명정에 처사(處士)라고 쓰라’ 는 유언이 나오는 군요.
이상 한내 편 끝
자.. 이제 수정을 마쳤으니 아래 댓글로 붙여 보충한 것은 필요 없는 데
기왕에 본 사람이 몇 있어 ... 그냥 같이 걸어 둘까요 ?
첫댓글 감사 합니다 천천히 몇번이고 읽어봐야 할듯 합니다 보고 또 보고 해야 할듯 ^^
세계도..보니...너무시원하고...청색줄표시가...중학생정도면..이해할수..있도록..되어..교육에..좋게..되었네요..대단하고..앞으로..기대..됩니다... 그러나..이.역사의..이면에는...많은수고와...노력과..땀과..정열이...숨어..있는걸..알기에...일가로써...너무..고맙다..말하고..싶습니다...많은시간...노력..고생..필요하리라봅니다...천천히...쉬어가면서...장기전으로..해야합니다...아니면..생활..리듬깨져...아프고...고생할수있으니..서두르지마시고..천천히..하세요...건강..관리..잘하시고요...역사에..남는일..하시는..겁니다...
그리고..참고하세요...유학에..정통하시고..한학을. 많이공부하시고..옛날역사에..해박한..지식..을갖이신..항양오씨..화포공파..어른이신..오화수할아버지(80세)님께..서룰(02-906-2926)..(016-557-0688)..어려운단어..역사..문의하세요.친절히,답해줄겁니다..언제..소개하지요...처사..거사....등등...옛날분들의..선조역사...백과사전..이십니다...참고하세요..
이글..영양에..계신..오원술씨..읽으시면..재미있을것같네요...그리고...진주에..살고계시는..정통.유학자..오지영씨가..계십니다...비석의석문에..정통하신분입니다...퇴계학문의..정통승계자라..하십니다..65세인데..한복만입고..사시는분입니다...진주에서..서당을..하면서..사십니다...춘향제사진에..그분의사진..볼수있어요..이름표시..했어요.
항공사진보니...시조묘역..영화제..항공사진보고..싶네요...언젠가는....
아.. 그렇지 않아도 준비해 두었으니 영양편 끝나고 보여 드리지요 ^^ 기가 막힌 것은 항공지도로 보니 ... 족보에 있는 함양군묘소 산도(山圖)하고 지형이 똑 같아요. 함양군 묘를 찾은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앗을 터인데..항공지도도 없이 산도(山圖)보고 지형을 뒤졌을 것이니 당시 그일 하던 분들의 노고가 새삼 느껴집니다 !
먼저 좋은자료 올려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간단히 의문점에 대해 저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번째..영양파 세계도중 영양입향조 휘 (필) 자 어른의 한자 표기가 잘못되었군요. 두번째...비리골 산소는 귀하께서 지적 하신데로 중앙에 있는 5 기가 맞습니다. 항공사진상으로 왼쪽 (아랫쪽) 이 한양조씨 입향조 휘 (원) 자 어른의 묘소고 가운데 묘소가 함양오씨 영양 입향조 이신 9세 휘 (필)자 어른이 계신 곳입니다. 그위의 묘소는 한양조씨 입향조의 자제분 묘소로 역장을 한것 입니다. 세번째....용계공 종택은 핀 앞쪽 (도로 바로 옆) 이고 핀부분이 문월정 입니다.....
재미.있읍니다..이렇게..소상히..알고계시니..종손..큰집..손..은..역시다르네요..위성사진에..우주에서...선조님의..묘소와..재각을본다는것은..역사상..처음시도..하는..자랑거리입니다...대단한..겁니다..
정말 대단히 수고 하셨구요 다음ㅁ에 종손과 상의하여 자세한 내용을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구총무님의 말씀을 정리하여 이글의 댓글로 아래 달았습니다 ! ^^
세거지 한내편 잘보았구요 앞으로도 우리 함오 집성편 찾아서 올리려면 수고가 너무많겠군요.사이사이 위로소주라도 한버씩 하여야 할텐데?
참으로 대단한 가문과의 인연 우리 함오의 자랑입니다,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군요 앞으로 우리의 후대에는 더 많은 복을 누려 조문에 뒤지지않은 인물들이 많이 태어나기를 바랍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