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史節要 - 李資謙의 亂(2) 가. 이자겸의 난(2) 고려사절요 제 9 권 - 인종(仁宗) 공효대왕(恭孝大王) 1126년. 고려 인종 4년 丙午.(宋 欽宗 靖康 元年,金 天會 4年) 3월,이자겸이 왕에게 (자신의 저택인) 중흥댁(中興宅) 서원(西院)으로 옮겨 거처하기를청하였다. 왕은 의장(儀仗)과 시위를 폐지하고 사잇길로 서원에갔는데 문에 이르니 대경(大卿) 김의원(金義元)과 최자성(崔滋盛)이 중흥댁 집사(執事)로나와 맞았다. 낭장(郎將) 지석숭(池錫崇), 산원(散員) 권정균(權正鈞),대정(隊正) 오함(吳含)이 산호정(山呼亭)에서 남궁(南宮)에 이르기까지 측근에서떠나지 않았다. 이때에 석숭 등이 왕을 부축하여 북문으로 들어가려하는데 자겸과 준경이 그를 죽이려고 낭장 이적선(李積善)을 시켜 끌어내니 석숭이왕의 옷을 잡고 살려 달라고 급히 소리쳤다. 왕이 돌아보고 적선을 꾸짖으며 그 가슴을 찼으나오히려 놓지 아니하여 왕의 옷이 찢어지고 복두(복頭)도 문설주에 부딪혀 부셔졌는데(자겸의 아들인)지미(之美)와 지보(之甫)가 왕을 바라보고도 뜰에 내리지 않고 최식(崔湜)이홀로 나와서 절하고 적선을 꾸짖기를 "왕의 말씀이 계신데 네가 감히 어찌 이렇게하느냐"하니 적선이 드디어 그를 놓아주었으나, 석숭 등이 두려워서 오히려나오지 못하였다. 이때 내시 조영(趙寧)이 아첨하여 자겸을 섬기었는데왕이 최식과 조영을 불러 이르기를 "석숭 등 세 사람이 지성껏 왕을 위할 뿐이요다시 다른 마음은 없으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죽이지 말라고 청하여 달라"하니준경이 이 말을 쫓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왕이 마루에 오르니 자겸이 그 아내와 함께 나와서절하고 손뼉을 치고 땅을 두드리고 통곡하며 아뢰기를 "황후(자겸의 2녀 순덕황후)가궁(宮)으로 들어갈 때는 태자가 탄생하기를 원하였고 (인종) 탄생하자 오래 사시기를하늘에 기원하여 무슨 짓이라도 다하여 왔으니 천지신명이 나의 지성을 알아주실터인데 도리어 오늘날 적신(賊臣)의 말을 믿으시고 골육을 해치고자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하니왕이 부끄러워하여 말이 없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인 동시에 장인이다) 왕이 서원에 거처하면서부터 좌우가 모두 자겸의 당(黨)이라우울하고 무료하여 나라 일을 직접 처결하지 아니하고, 모든 관원들을 근처의 사원으로옮겨왔으나 임시로 수를 채워 둘 뿐이었다. 자겸과 준경은 위엄과 세도가 더욱 극성하여그가 하는 일에는 누가 감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이로부터 외가(外家-이자겸 일가)가 더욱 횡포하여박승중(朴昇中)·허재(許載)로부터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아첨하고 붙좇아 포학을부리는 것이 (왕으로서는 몹시) 두려웠다. 왕은 은밀히 내의군기소감 최사전(崔思全)과 이를상의하니 사전이 아뢰기를 "자겸이 발호하는 까닭은 오직 준경을 믿기 때문이오니 왕께서 만일 준경을 매수하여 곧 병권(兵權)을 내속(內屬) 시키면 자겸은 다만한 고립된 사람일 뿐입니다"하였다. 왕은 "준경이 국공(國公-곧 이자겸)의 심복이되어 혼인을 맺기까지 하였고(자겸의 아들 李之元은 척준경의 사위) 동생 척준신과아들 척순이 모두 관병에게 살해되었으니 이를 두려워하는 바이다"하고 곧 점(占)을치니 길(吉)하다는 예시를 얻었다. 그리하여 사전이 준경의 집에 가 충의로써 호유하기를 "태조와 역대 왕의 신령이 하늘에 계시어 화복이두려운데 자겸이 특히 궁중의 세도를 믿을 뿐이요 신의가 없으니 그가 하자는 대로해서는안 될 것이요 공은 마땅히 한 가지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한 세대에까지 없어지지않을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하니 준경이 속으로 옳게 여겼다.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생각하건대 짐이밝지 못해서 이번에 흉도(凶徒)들이 일을 일으키게 만들어 대신(大臣)에게 근심과수고를 끼치게 하였으니 모두 과인의 죄이다. 이로써 몸소 반성하고 허물을 뉘우치며하늘을 우러러 마음에 맹세하고 신민과 더불어 그 덕을 새롭게 할 것을 바라나니경은 다시 노력하여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서 보필하여 뒤에는 어려운일이 생기지 않게 하라"하였다. 백관을 소집하여 대금(大金)을 신하로서 섬기는 문제에대한 가부를 물으니 모두 옳지 않다고 하는데 오직 이자겸·척준경이 말하기를 "금나라가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遙)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기었으나 지금은 갑자기 중흥하여이미 요와 송을 멸하였고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강하여 날로 강대해지고 있으며 또우리나라와 국경이 연접해 있으니 사세상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작은 나라가큰 나라를 섬김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먼저 보내어 빙문(聘問)해야합니다"하니 그대로 좇았다.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을 평장사 척준경의 사제(私第)에보내어 빨리 일을 보도록 재촉하고 이어 안장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이지언(李之彦-자겸의 아들)의 종이 척준경의 종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의주인이 왕의 자리를 활로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요너도 역시 적몰 되어 관노(官奴)가 될 터인데 어째서 나를 욕하느냐"하였다. 준경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자겸의 집으로 달려가서옷을 풀고 갓을 벗고 말하기를 "나의 죄가 크니 마땅히 법을 맡은 관아에 가서스스로 변명하리라"하고 바로 나오며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리니자기 집에 돌아와 누웠다. 자겸이 (아들) 지미(之美)와 공의(公儀)를 보내어화해하기를 청하니 준경이 꾸짖어 말하기를 "전날의 난은 모두 너희가 한 것인데어찌 다만 나의 죄라 하여 죽어야 된다 하느냐"하고 마침내 서로 만나보지 않고"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선언하였다 하므로 왕이 이 말을듣고 이번의 명을 내린 것이다. 여름 4월에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거동하였는데 이자겸이호종(扈從)하고 백관이 말 앞에서 절하니 자겸이 이것을 보고 태연스럽게 있으니왕은 옛 궁궐을 바라보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자겸이 미워하는 내시 25명을 내쫓았다. 5월에 왕은 연경궁(延慶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겸이궁(宮)의 남쪽에 우거(寓居)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고의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집 안에 간직하였다. 왕이 일찍이 혼자서 북쪽 동산에 나아가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였다. 얼마 후에 자겸이 십팔자(十八子 - 李의 破字)의 비결대로왕의 자리를 노려 떡에 독약을 넣어서 왕께 드렸는데 왕비가 비밀히 왕께 알려 떡을까마귀에게 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어 왕비를 시켜서 왕에게 드리게하였더니 왕비가 대접을 들고 일부러 넘어져 엎질러 버렸다. 왕비는 곧 자겸의 네째딸이다.(妃卽資謙第四女也) 척준경이 이미 자겸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최사전이또 이 틈을 타서 달래니 준경이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글월을 올려 "스스로충성을 바치겠다"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준경에게 이르기를 "국공(이자겸)이비록 참람(僭濫)하나 반란을 일으킬 형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짐이 만약 먼저거사한다면 가까운 사람을 친근히 대접하는 본의가 될 수 없는 일이니 천천히 그변하는 것을 기다려 이에 대응하여도 늦지 않다"하고, 항상 궁중 사람을 시켜그를 감시하게 하였다. 준경은 병부에서 무관직의 인사를 맡아보았다. 왕이손수 쪽지를 적어서 몰래 내시 조의(趙毅)를 보내서 준경에게 보였는데 (쪽지에)이르기를"오늘 숭덕부(이자겸의 관부)의 군사가 무기를 가지고 대궐 북쪽에 이르러 장차침문(寢門)으로 들어올 듯 한데 짐이 만일 해를 당한다 하면 실로 부덕한 탓이지만원통한 것은 태조가 창업한 뒤 역대 선왕이 서로 계승하여 과인에게까지 이르렀는데만일 다른 성(姓)에게 바뀌게 된다면, 다만 짐의 죄만이 아니라 실로 보필하는 대신도매우 수치스러울 바이니, 바라건대 경은 이것을 잘 도모하라" 하였다. 준경이 곧 어필(御筆)을 상서(尙書) 김향(金珦)에게보이니, 김향이 꿇어앉아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성지(聖旨)가이 같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의리이거늘 공은 어찌 편하게 있겠는가" 하였다. 준경이 김향과 함께 장교 7명과 서리 종들 20 여명을거느리고 북문으로 나오니 갑자기 당한 일이므로 아무 것도 손에 가진 것이 없어,각기 목책(木柵)의 나무를 뽑아서 다듬어 몽둥이를 만들어 가지고 금오위(金吾衛)남쪽 다리로부터 대궐로 들어가니 내시 조의(趙毅)가 맞이하면서 소리 질러 말하기를"일이 매우 급하다"하며 들어가자 곧 광화문을 닫아 버렸다. 이공수(李公壽)가 뒤따라 이르자 왕이 한쪽 문을 열어그를 들어오게 하였다. 공수는 곧 이수(李壽)이다. 이때에 순검도령 정유황(鄭惟晃)이백여 명을 거느리고 군기고로 들어가 무기와 갑옷을 나눠주고 연경궁으로 가다가도중에서 소경(少卿) 윤원식(尹元湜)을 만났는데, 그 말이 불순하므로 즉시 죽였다. 준경이 갑옷을 입고 궁궐로 들어가니 왕은 천복전문에 나와 준경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준경이 왕을 모시고 나오는데 자겸의 무리가활로 준경을 쏘았다. 준경이 칼을 빼어 들고 한번 호통하니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왕이 군기감으로 들어가 군사를 시켜서 호위를 엄중히하고 준경이 승선(承宣)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자겸을 부르니 자겸이 소복을 하고왔다. 준경이 공수와 상의하려고 자겸과 그의 처자를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그의장군 강호(康好)와 고진수(高珍守) 등을 베었으니 모두 자겸이 시키는 대로 한 일이었다. 사람을 나눠 보내어 그 당(黨)을 체포하고 왕이 몸소광화문에 나와 모여든 여러 사람에게 포고하기를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 매우대역 부도한 처사였는데, 충신들의 의거로 해를 면하게 되었다"하니, 만세를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다. 지미가 사변이 났다는 소문을 듣고 백여 명을 거느리고광화문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다가 이자덕, 김인규와 함께 병부에들어갔으나 역시 자겸이 붙잡힌 줄은 알지 못하였다. 저녁에 순검(巡檢)이 병부에나가 지미를 잡아 검점소(檢點所)에 가두자 자덕 등은 놀라 흩어져 도망 가 버렸다. 왕이 연경궁으로 돌아올 때에 근시(近侍)가 먼저 들어가궁 안을 뒤졌더니 중 의장(義莊 - 자겸의 아들)이 내침(內寢)에 숨어있으므로 잡아서팔관보로 보냈고, 자겸과 아내 최씨와 아들 지윤은 영광(靈光)에, (다른 아들) 지미는합주(경남 합천)에, 공의는 진도에, 지언은 거제에, 지보는 삼척에, 의장은 금주(경남김해)에, 지원은 함종(평남 강서)에 귀양 보내고 자겸의 무리 30 여명과 90 여명의종도 모두 먼 지방으로 귀양 보냈다. 교서에 선포하기를 "짐이 어린 나이로 조종의대업을 이어받아 뜻을 외가에 의뢰하고자 하여,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도든것을 위임하였는데, 탐학하고 포학한 짓을 함부로 하고 백성을 괴롭혀서 나라에 해로움을짐이 비록 알았으나 막아 낼 수가 없던 차에, 창졸간에 변란이 일어나자 판병부사척준경이 의거를 일으켜 난국을 바로 잡았으니 그 공은 잊지 못할 것이다. 마땅히해당 관아로 하여금 논공(論功)하여 상을 내리고, 군기소감 최사전도 뜻을 같이하여남 모르게 도왔으니 아울러 공을 포상하게 하라"하였다. 6월에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동덕 위사공신 검교태사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고 그의아내 황씨를 제안군 대부인(齊安郡大夫人)으로 봉하고 의복과 금 은으로 만든 그릇과피륙, 안장 갖춘 말 및 노비 10명, 토지 30결을 주었으며, 이공수를 추충 위사공신판이부사에 임명하고, 김향을 위사공신 호부상서 지문하성사에 임명하고, 최사전을병부상서에 임명하였다. 간관(諫官)이 여러 번 소(疎)를 올려 아뢰기를 "이자겸의두 딸은 주상께 이모(姨母)가 되오니, 주상의 배우자가 될 수 없습니다"하니왕이 두 왕비를 내치고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임원애(任元 )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삼으니 비의 어머니는 이씨요 (이씨는)문하시중 위(李瑋)의 딸이다.....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세 아들이 왕이 되었다(毅宗, 明宗, 神宗)..... 정유황 등 20 명에게 왕의 행차를 호위하여 역적을체포한 공로로 차등 있게 관직을 주었다. 12월에 이자겸이 영광군에서 죽었다........... 1127년 丁未, 고려 인종 5년(송- 고종 建炎 元年,금- 天會 5년) 3월, 평장사 척준경을 암타도에 상서좌승 최식을 초도에,상주목의 부사(副使) 이후진, 귀주사 소억, 낭장 정유황, 서재장판관 윤한 등을 먼곳으로 귀양 보냈다. 척준경이 이자겸을 없애고 나서 그 공을 믿고 발호하였는데,왕이 준경을 꺼리는 것을 알고 좌정언 정지상(鄭知常)이 마침내 상소(上疏)하기를"병오년(1126년) 봄 2월에 준경이 최식 등과 더불어 대궐을 침범할 적에 주상께서신봉문의 문루에 나오셔서 군사에게 호유하는 뜻을 말하니, 모두 갑옷을 벗고 환성을올려 만세를 부르는데, 다만 준경이 조서를 받들지 아니하고 군사를 위협하여 앞으로날아오는 화살이 주상의 수레 위로 지나가기까지 하였으며 또 군사를 이끌고 액문으로돌입하여 궁궐을 불태웠으며, 이튿날 남궁으로 옮겨 앉으시자 측근에 모셨던 사람을모두 잡아죽이었으니, 옛날부터 난신(亂臣) 중에 이 같은 자가 적었습니다. 5월의 사건은 일시적인 공로요, 2월의 사건은 만세에죄인이 오니, 폐하께서 비록 사람에게 차마 못하시는 마음이 있어서도 어찌 일시의공으로 만세의 죄를 덮겠습니까"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천지의 큰 명을 받아조종의 남기신 기업을 이어 받고 삼한을 모두 차지한지 6년이 되었다. 일을 처리할좋은 지혜가 없고 사리를 감별한 만한 안목이 없어 재변(災變)이 잇달아 조금도 편안한해가 없었다. 작년 2월에 역적이 이 틈을 타서 일어났다. 음모가발각되었으므로 짐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법으로 다스렸다. 이로부터 허물을 반성하고내 몸을 자책하니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이제 일관(日官)의 건의에 좇아 서도(西都)에행차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기를 기대하여중앙과 지방에 포고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려 하노라. 첫째, 방택(方澤-지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에서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어, 사교(四郊)의 기운을 맞아들일 것.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