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슴이, 주인보다 먼저 장로가 되고 . . . ♣
-한국장로신문 제1182호 12면 [강좌]에서 퍼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던 테이트 선교사는 어느날 모악산 밑에 있는 두정리
조덕삼 지주의 마방에 말을 쉬게 하고 며칠동안 주막에 머무르며 복음을 전했고 지주
조덕삼과 마부 이자익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되어 조덕삼의 집 사랑채에서 예배드렸던 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었다.
이자익은 경상도 남해도 출신으로서 6세 때 부모를 잃고 친적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남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육지로 나갈 것을 결심한 그가
하루는' 육지 하동으로 가는 배에 올라타 선장에게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를하고 선장의
호의로 하동까지갔다.
하지만 하동에 도착했어도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찾기는 힘들었다. 다시 전라도 남원읍을 찾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다시 전주로 해서 김제 금산리 삼거리에 도착하였다. 삼거리에서 똑바로 가면 금산사로 '유명한 절간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길로 가지 않고 두정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제일 큰 집을 찾았다.
“여보세요, 주인 어르신 계신가요? 저는 경상도 남해도란 섬에서 왔는데 주인 어르신을 뵙고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하인들이 조덕삼에게 알리자 조덕삼은 그 소년을 사랑방으로 인도하였다.
이자익은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서 그의 딱한 모습을 본 조덕삼은 당장
일감을 그에게 주었는데 바로 마부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이자익은 열심히 일을했고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나서 는 전주 선교부를 오가면서 성경을 배
우고 매 주일마다 사랑채에서 예배드리며 신앙이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조덕삼,이자익,박희서 등은 금산교회에서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금산교회는 해가 지날수록 교인들이 모여 1908년 장로를 선출하게 됐다.
대부분 교인들은 조덕삼 지주가 장로로 선출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머슴이며 마부인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이때 조덕삼은 테이트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고 앞자리로 나갔다.
“여러분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의 마부 이자익 영수를 장로로 선출해 준일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머슴이자 마부가 장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인근 지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로 몰려 왔다.이때 조덕삼은 자신의 배밭 일부를 교회에 기증하였다.
여기에 힘을 얻은 테이트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와 의논하여 교회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덕삼은 대지만 내어 놓은 것이 아니라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제각을 판다
는 소식을 접하고 그 제각을 매입하기도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남녀가 따로 예배드릴 수 있도록 교회당을 기역자(ㄱ)로 신축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교회당이 완성되자 1908년 3월 당회장 테이트 선교사의 집례 하
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그다음 주일부터 여성들을 위해 따로 좌석이 마련되어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듣고 여성도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남녀를 구별하는 장소에 커튼을 걸쳐 놓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볼수 없도록했다.
목사가 설교하는 강대상 쪽에도 역시 목사가 여자들을 볼 수 없도록 커튼을 쳤다.
이러한 소문이 금산리 마을뿐만 아니라 원평까지 전해지자 원평에서도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교인이 증가하자 테이트 당회장의 사회로 장로를 다시 선출하게 되었다.
이때 지난번에 낙선되었던 지주 조덕삼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금산교회는 말할 것 없이
금산리에 사는 주민 모두 좋아했고 교회는 더욱 부흥돼 갔다.
이때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그를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전 학비는 물론 기숙사비까지 지원하기로 하였고 금산교회는 또한번
축제의 분위기가 되었다. 금산교회가 자립할 수 있을만큼 성장하자 최대진 목사를 초대
목사로 초빙하였다.
그 후 최대진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이웃 임실에서 목회하는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로
청빙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머슴으로 금산에 왔던 이자익이 목사가 되어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을 하였다.
더욱이 조덕삼 장로는 이자익 목사가 전분회나 총회에 나가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협력하여 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이 일로 이자익 목사는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목사는 한국장로교 역사상 유일하게 3번(제13회, 제33회, 제34회)
이나총회장을 역임하였다.
조덕삼 장로는 1919년 12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50년 6·25 전쟁시 금산리 마을이
다 불바다가 되어 온마을주택이 다 전소되는 사건 속에서도 금산교회는 불에 타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이러한 일은 좌익이나 우익이 한결같이 “저 교회는 우리 교회라”
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교회는 1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었다.
글쓴 이 / 한국교회역사연구원원장
김 수 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