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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박치기
한번, 맺힌 속 뚫어지고,
두번, 주린 배 불러오고,
세번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
하나된다.'
(시인 최석우)
형. 김일 선생님이 위독하시데요"
격투기 관련 업계에서 일하는 친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밤샘근무의 여파가 있어 노트북의 모니터를 열자 뿌옇게 포털사이트의
뉴스화면이 들어오고,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박치기왕 김일 위독"
굵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처럼, 굵은 글씨체로 메인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관련 기사.
획득타이틀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WWA 세계 태그팀 챔피언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
인터내셔널 태그팀 챔피언
극동헤비급 챔피언
아시아 헤비급 챔피언
[1]
그랬다.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세 번이다.
압둘 자바와 같은 프로레슬링계 세계적인 거구들도 어김없이 쓰러졌다.
'박치기 왕' 김일. 움직임도 빠르지 않다.
왕정치의 외다리 타법처럼 한쪽 다리를 든다.
그리고 그 다리가 메트에 닿으면 어김없이 상대의 머리에 꽂힌다.
퍽 퍽 퍽. 박치기 세 번이면 '시인 최석우'의 표현처럼 대한민국은 하나가 됐다.
그랬다. 우리는 그를 살아있는 전설로 기억한다.
그런 그가 지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26일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을지병원에서다. 향년 77세.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받던 그가 떠나던 자리는 초라했다.
아들 수안 씨(56)와 첫째딸 애자(61), 둘째딸 순희 씨(59), 제자 이왕표 씨 등
친인척과 지인 30여 명만 곁에서 임종을 지켜봤을 뿐이다.
김일은 한 시대를 풍미한 '국민적 영웅'이었다.
지금 40줄을 넘어선 성인치고 김일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흑백TV조차 귀했던 시절 마을 이장들은 "오늘 저녁에는 김일 선수가 레슬링을 하는 날입니다.
밭일을 마치고 테레비(텔레비전)가 있는 집으로 오세요"라는 동네방송까지 할 정도였다.
아이들의 꿈은 한결같았다.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김일 선수처럼 힘세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답변이 어김없이 들려왔다.
[3]
내가 그를 처음 접한 것은..1980년대 초반. 내가 아직 프로레슬링에 관심을 갖기 이전이었다.송탄 미군부대앞 철길에서 뛰어놀던 나는..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복면을 쓴 레슬러들이 포니픽업에 탄 채.."지옥의 혈전"을 홍보하며 다니고 있었던 것.
프로야구의 인기와 레슬링은 쑈라는 인식때문에
막다른 길에 다다른 마지못한..궁여지책의 프로모션이었다.
그 때 동네 여기저기에 붙은 포스터의 정중앙에 "박치기 왕 김일"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동네에서 옷장사를 하던 우리집에도 공짜표가 들어왔으나,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경기가 있었던 것도 모르고 동네어귀에서 전봇대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승용차가 한 대 서더니..창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버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그것은 어제 우리집에 흘러웠던 프로레슬링의 티켓들 ....
흥행이 실패하자 남은 표를 길에 버리고 가는 것이었고,
그 승용차 뒷편의 좌석에 묘한 살기가 도는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벗겨진 머리, 상기된 얼굴,
앉아있어도..차 안에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풍채 .... 바로 김일 이었다.
그 때의 경험은 매우 특이했다. 아니 김일에 대한 나의 느낌은 항상 특이했다.
또는 변화했다라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린 시절 동네어귀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그후 WWF 프로레슬링을 AFKN으로 보면서
레슬러의 꿈을 갖게 되고, 직접 링에 오르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대단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만으로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제국에서 그는 밀림의 질서를 지키는 용맹한 수컷이었다.
스승 역도산이 그러했듯, 사람을 휘어잡고 인기를 만들어내고,
카메라의 앵글을 자신에게 맞추는 방법을 알았으며, 링에서는 사생결단의 경기..
상대방의 공격과 방어를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시멘트"경기로 상대선수를 "때려잡았다"
감히 그와 같이 동업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전쟁이 막 끝나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잘 곳도
그 어느 것도 풍족하지 않은 상태에서 밀항자의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간 그에게..
그리고 역도산과는 다르게 조선인이라는 타이틀을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그에게는
오직 근성과 실력만이 자신의 생존을 위하는 도구였을 것이다.
<철인 루테즈와 함께 한 김일. 그의 바지에 그의 일본이름인 大木(오오키)가 보인다>
자신을 철저하게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스승 역도산도
어찌된 일인지 명명백백한 조선인이 분명한 그를 옆에 두고 자신의 보디가드처럼 대동했다.
역도산은 제자를 포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술에 취해 발로 밟고 재떨이로 이마를 내려치는 폭한이었다.
다른 일본인 제자들 중 안토니오 이노키외에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피력하는 이는
한 명도 없다는 점이 그 점을 증명한다.
김일과 역도산은 평소에 단 한번도 한국말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딱 한번...화장실에서 단 둘이 있을 때 단 둘이 이야기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어로..)
"그거 있잖아 그거 봄에 나는 거"
"뭐 말입니까? 관장님"
(한국어로)
"아..도라지! 응 그래 도라지! 그거 지금 비벼 먹으면 맛있지 않나?"
"네 그렇습니다. 지금 비벼먹으면 맛있지요"
가끔 이처럼 그에게서 나에게는 아득한 전설속의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잠깐씩 들어보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역도산과 청년시절의 김일. 역도산은 김일을 자신의 보디가드처럼 항상 같이했다>
"박치기왕"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주었고,
그는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더욱 쎄게 상대를 내려찍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회복불가능한 신체적 위험을 가져왔다.
"박치기"는 그의 생존의 수단이었고, 그의 생명을 지워내리는 야속한 지우개였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절대선의 베이비페이스로,
일본에서는 호랑이와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링에 올라가 "악당 조선인"의 역할로,
기자들앞에서 일본선수의 얼굴이 그려진 베개에 깔을 꽂아댔다.
자신에게 돌이 날라올수록, 일본관중들이 침을 밷을수록
자신의 파이트머니가 올라가고, 그 돈으로 일본선수를 한국에 불러..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던 매우 영리한 야수였다.
<일본 격투기계의 거두 안토니오 이노키.
김일은 이노키의 데뷔전 상대로 7시합 연속 승리를 거뒀다>
184cm 의 키에 120 kg를 육박했던 탈아시아급의 슈퍼코리안 김 일.
역도산의 냉혹하고 잔인한 살기를 갖게하는 지옥훈련과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같은 걸출한 라이벌들과의 경쟁.
그리고 조선인의 신분으로서 쏟아지는 차별을 당연히 감수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자신으로의 관심으로 만들어 링을 피바다로 만들곤 했던
김일 .... 오오키 킨타로.
<일본 레슬링 협회는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계승하는
김일이 승계하는 조건으로, WWA 챔피언 벨트를
미국에서 다시 가져오라고 시킨다.
김일은 미국으로 건너가 WWA벨트를 가져온다.
그러나 일본 레슬링협회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프로레슬링이란 허명의 격투기를 진실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사람.
몰려드는 관중으로 장충체육관의 쇠철문이 여러번 휘어지게 만든 사람.
자신의 육체를 생업의 도구로,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사람.
제자들의 경기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결코 링사이드에서 경기를 관전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 패배의 황망함에 라커룸으로 힘들게 걸어가던 나에게
살살 조심해서 안다치게 하라고 손을 어루만져주던 사람.
<2006년 김수홍 대한 프로레슬링 신임회장 취임식장에서..가운데가 필자>
김 일. 오오키 킨타로.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살아온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와 투지 넘치는 육체와 그에 걸맞는 야수성으로
링위의 제왕으로 지냈던 사람.
그와 같이 세상의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 간다는 것이 너무나 아쉽다.
진심으로 아쉽다.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제 글이 다음메인에..그리고 그 옆칸에..
선생님이 깊은 잠에 빠지셨다는 기사가 같이 올라와 있네요.
선생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진정한 은퇴를 하시게 되었군요.
노쇠하고 지친 육신의 껍데기를 거두시고,
현세에서 전설로 전설에서 신화의 세계로 戰場을 옮기시는군요.
블로그를 통해서나마 은퇴의 텐 카운트를 해 드리고자 합니다.
필자 - 프로레슬러 김남훈 -
김일(오오키 킨타로)
1958년 가난을 등지고 역도산의 이름 단 석자만 외운 채 일본으로 밀항.
이후 체포.역도산이 보증인이 되어 일본프로레슬링과 입문.
자이언트 바바 , 안토니오 이노키와 함께 "세날개 까마귀"라는 별칭을 얻는다.
1963년 미국원정에서 WWA 챔피언벨트를 따냄으로서 챔피언의 자리에.
그러나 스승 역도산이 세상을 뜨자 귀국해 대한프로레슬링을 설립. 에이스로 군림한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많은 인기를 누리나,
안토니오 이노키 및 자이언트 바바같은 일본 토종 에이스들의 인기와
국내에서 자생된 프로레슬링 단체와의 불협화음으로 우여곡절을 겪게 되고
1982년 아수라 하라 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목부상이 심해져 은퇴를 하게 된다.
국내 올드팬에게는 박치기만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는 스파링(아마추어레슬링,
캐치레슬링)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키록,암바,힐락 등 다채로운 관절기를 구사하는 레슬러였고,
한 때 유도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윌리엄 루스카의
이종격투기설도 프로모터들 사이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만약 이 경기가 30년전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면,
한국의 격투기는 지금 매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획득타이틀
W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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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영철 선수와 화해
8개월 전. 5평 남짓한 병실에 비좁게 누워있던 한 노인은
“아니, 이럴 수가”라며 말을 잇지못했다.
파키슨, 중풍으로 노쇠해진 노인 앞에 휠체어를 힘겹게 밀고 들어오는 ‘박치기’ 김일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자네 (장)영철이를 못 만날 것 같아서지.”
김일도 박치기 후유증으로 거대결장증·고혈압.·임파부종·심부전 등 합병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한때 한끼 식사량으로 생선 99마리를 먹었다는 김일은
130㎏이 나갔던 몸무게가 75㎏까지 줄어들었다.
그 몸을 이끌고 서울에서 김해까지 온 것이다.
때늦은 챔피언-김일의 은퇴식에서, ....
1965년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라고 했다는 언론 보도 이후
둘은 “저승에서도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등을 지고 살아왔다.
삶이 저물어감을 느꼈던 것인가. 무려 41년간 원수처럼 지냈던 한국 프로레슬링의
전설적인 두 영웅이 극적으로 화해를 한 뒤 약속이나 한 듯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박치기왕’ 김일과 ‘백드롭의 명수’ 장영철은 60년대 국내 프로레슬링계를 양분했던 인물들.
역도산의 제자로 ‘해외파’를 대표했던 김일과 ‘국내파’의 간판이었던 장영철은
‘국민스타’로 군림했다. 그러나 이른바 “레슬링은 쇼” 발언 사건으로 인해
둘은 원수처럼 갈라서고 말았다.
지난 65년 11월25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에서
일본의 오쿠마가 ‘약속과 달리’ 거친 ‘새우꺾기’ 공격으로 장영철을 몰아부친 것.
고통을 견디다 못한 장씨가 매트를 쳤지만 오쿠마의 공격은 계속됐고,
지켜 보던 장씨의 후배들이 링위로 몰려가
오쿠마의 머리를 병과 의자로 내리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장영철과 후배들은 즉심에 회부됐고, 장영철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레슬링은 쇼”라고 말해 파장이 일었다.
이후 장영철은 프로레슬링 쇠락의 주범으로 낙인 찍혔고, 김일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41년 동안 물과 기름처럼 지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지난 2월.
김해의 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장영철을 김일이 찾아가 만나면서 극적인 화해가 이뤄졌다.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린 둘은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지난 8월 장영철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김일은 장영철의 빈소를 찾아 오열한 바 있다.
김일, 장영철과 함께 활동했던 프로레슬링 1세대 가운데
천규덕(74)씨는 프로레슬링동호회 고문으로 후배 지도에 힘을 쏟고 있으며
재일동포 출신 여건부(68)씨는 일본에서 투병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키 184cm 체중 120 kg.
WWA 세계헤비급 챔피언 ,
인터내셔널 헤비급 챔피언
김 일 은퇴하다 ....
[6]<이왕표가 지켜본 31년 스승 김일>
"운동을 가르치실 때는 엄격하시지만
남들에게는 항상 모든 걸 베푸시려 했던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26일 세상을 떠난 '전설의 프로레슬러' 김일의 31년 애제자였던
한국프로레슬링연맹대표 이왕표(50)씨는
자신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스승과 사별이 아직도 믿기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왕표씨는 "30년 이상의 세월을 같이 한다는 건 부모와 자식 간 사이가 아니면 어려울 정도"
라면서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니 가슴이 아프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눈물을 떨궜다.
어릴 적부터 프로레슬러가 꿈이었던 이왕표씨는 1975년
김일 도장 1기생 모집 응시에 합격하면서 자신의 우상이었던 김일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18세였던 이씨는 키가 180cm가 넘는 우람한 체격의 스승 아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몸을 덜덜 떨어야 했다. 훈련 도중 맞기라도 할 때면
남 몰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럽게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처음으로 직접 뵈었을 때는 사진이나 TV 등 언론 매체를 통해 봤을 때보다 훨씬
카리스마가 넘쳐 보였어요. 특히 운동을 가르치실 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이왕표씨는 한국과 일본 등을 오가며 김일과 프로레슬링 경기를 하고
수년 동안 동고동락을 함께 하면서 스승의 다른 모습도 발견하게 됐다.
"평소 선생님은 강직하고 엄격하신 분이시지만 운동을 계속 함께 하다 보니
부모님처럼 인자하신 모습도 차츰 보였습니다. 일본이나 외국에 나가서 경기를 끝내고 나면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주셨어요. 나이를 드시면서는 함부로 말씀도 안 하시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남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으셨죠"
이왕표씨는 특히 '천하무적'으로만 보였던 스승이
자신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는 무척 놀라기도 했단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숨질 때 일본에 계셨는데 눈물을 흘리셨어요.
또 선생님의 막내 아들이 군대에서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일본에서 경기를 하셨는데
그 당시에도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죠.
그 때 '선생님도 나약하실 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일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을 때는
70년대 중반 처음으로 스승과 함께 일본으로 갔을 때였다.
"프로레슬링이 상당히 인기 있을 때였는데 일본에서는 어떤 선수가 유명할까 궁금했죠.
그러다 김일 선생님과 함께 처음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었어요.
수많은 일본 관중이 한국말로 '김일'이라고 외치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어요.
인기가 그렇게 높은 줄을 상상도 못했죠. 한국만큼 응원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저도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김일의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이기도 한 이왕표씨는 투병 중에도 불구하고
프로레슬링 재건 사업을 위해 애쓰는 스승의 노력에 숙연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병원에서 10년 이상을 투병하면서도 프로레슬링 경기나 관련 행사가 있으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라도 항상 찾아 주셨다. 프로레슬링의 전성기는 끝났지만
선생님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됐고 항상 믿음을 주시는 든든한 존재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