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갑골문(甲骨文)
은(殷)에서 사용한 거북껍질과 짐승 뼈에 새겨진 문자라는 뜻의 구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의 약칭이다. 기원전 14세기경 상(商)나라 왕인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천도하였을 때, 사람들이 점을 친 후 갑골 위 복괘에 관하여 새겨놓은 문자를 지칭한다. 이 때문에 갑골문을 은허문자, 은허복사라 부르기도 한다. 청말 광서(光緖) 25년(1899년)에 왕의영(王懿榮)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지금까지 대략 십만여 편이 출토되었다.

대부분은 구갑과 수골에 새겨진 점복과 관련이 있는 문자이지만, 일반 수골과 골각기에 새겨진 문자도 있고, 드물지만 쓰기만 하고 새기지 않은 글자도 보이며 점복과 무관한 순수한 기록 위주의 글자도 있다. 또 1950년대 이후로는 산서성(山西省)·북경시(北京市)와 섬서성(陝西省) 등지에서 서주(西周) 시기의 갑골이 한 두 편씩 발견되다가, 1977년과 1979년에 섬서성(陝西省)에서 300여 편이 발굴되었다. 별칭으로 주요 내용에 따라 '갑골복사(甲骨卜辭)', 발견지에 따라 '은허문자(殷墟文字)', 서사도구에 따라 '은인도필문자(殷人刀筆文字)' 등으로도 불린다.
갑골문은 상(商)나라의 유물로 상나라 반경(盤庚)임금이 상에서 은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부터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273년간의 상나라 역사기록문헌인 갑골편에 새겨진 문자이다. 갑골문은 상나라의 마지막 도읍지, 곧 은의 폐허지인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에서 발견되었다. 애초에 은허 일대의 농민들에 의해 발굴되어 '용골(龍骨)'이라고 불려지며 한약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를 1898년 천진(天津)의 맹정생(孟定生)과 왕양(王襄)이 용골에 새겨진 부호를 고간(古簡)이라 하여 고대 문자라고 감정하였다. 그 후 1899년 왕의영(王懿榮)과 유악(劉鶚)에 의해 은나라의 문자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의 중국 고대 은나라의 역사·사회·문화를 기록한 역사문헌인 갑골문은 지금까지 약 10여만 편 정도가 발굴되었다. 그 가운데 개별자의 수량은 약 5천자 정도이며, 고석된 글자는 2,200자 정도이나, 그 가운데 공인을 받은 고석 자수는 1,200자에 지나지 않는다.
상나라는 국가의 대소사를 점을 쳐서 결정하는 신정 정치를 시행하였다. 어떤 사안이 발생하면 미리 준비해둔 거북이의 껍질이나 짐승 뼈의 뒷면 홈에다 불로 지져서 갈라지는 결을 보고 길흉을 점쳐 이를 정사에 반영하였다. 점을 치는 과정에서 갑골편에 길흉의 징조인 '卜'과 같은 형태가 나타나는데, '점을 치다'는 뜻을 지닌 '복(卜)'자가 바로 이 모양을 본 뜬 글자이며, 또 갑골이 균열될 때의 나는 소리가 바로 '복(卜)'자 자음의 유래이다.
갑골문의 주요 내용은 기상·역법·농업·정치·군사·수렵·건설·공납·교육·생육·질병 등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전면적으로 담고 있다. 갑골문은 바로 이런 항목에 대해 점을 친 날짜·사람·내용·결과·결과에 대한 판단·결과에 대한 검증 등 일련의 과정을 점을 치는데 사용한 갑골에다 칼로 새겨놓은 것이다. '갑골문합집6057정(甲骨文合集6057正)'을 예로 들어 갑골문의 형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癸巳卜, 殼, 貞, 旬亡禍? 王占曰 : 有祟其有來艱. 迄至五日丁酉, 允有來艱自西.
계사(癸巳)일에 점쟁이 각(殼)이(前辭), '앞으로 열흘동안 재화가 없겠는가?'라고 점을 쳤다(貞辭). 왕이 점친 갑골편의 갈라진 모양을 보고 귀신이 앙화를 부려 아마도 불길한 일이 발생할 것 같다고 판단하였다(占辭). 닷새가 지난 정유(丁酉)일에 과연 불길한 일이 서쪽에서 발생하였다(驗辭)
위처럼 완전한 형식의 복사는 전사(前辭)·정사(貞辭)·점사(占辭)·험사(驗辭) 등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癸巳卜, 殼貞'은 점을 친 시기와 점쟁이 이름을 기록한 부분으로 전사이고, '旬亡禍?'는 당시 점을 친 내용으로 정사이며, '王占曰 : 有祟其有來艱'는 당시 왕이 갑골편의 갈라진 흔적을 보고 길흉 판단을 내린 점사이며, '迄至五日丁酉, 允有來艱自西'는 점을 친 결과가 딱 들어맞았는지를 기록한 것으로 험사이다.
갑골문은 단순한 점복 기록이 아니라, 상나라 시기에 발생한 대소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문헌이다. 이를 통해 당시의 온갖 사회상을 사안별로 시기별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갑골문의 발견은 중국고대사 연구에 가장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갑골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상형성이 농후하고 도화적인 색채가 짙다.
둘째, 갑골문은 이체자가 다량 존재하고, 똑바로 쓴 것 거꾸로 쓴 것, 편방이 있는 것 없는 것, 편방이 대체된 것 등 자형 결구가 정형화되어 있지 않다.
셋째, 필세는 견고한 갑골에다 칼로 새긴 관계로 가늘며 직선이 많고 각이 확실하게 져있다.
넷째, 조상의 묘호나 시간을 나타내는 월명 등 두 글자를 한 글자로 합한 합문(合文)이 존재한다. 그 결합방식은 좌우배열식·상하배열식·복합식·포함식·역접식 등이 있다.
다섯째, 갑골문에는 전주를 제외하고 상형·지사·회의·형성·가차 등의 자례(字例)가 존재한다. 이렇듯 다양한 구조를 지닌 갑골문은 이미 상당한 체계를 갖춘 성숙한 문자임을 알 수 있다(李孝定의〈漢字的起源與演變論叢·從六書的觀點看甲骨文字〉를 참고바람)(위행복)
금문(金文)
금문은 청동기에 주조되거나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금문의 주된 사용시기는 서주시대이므로 일반적으로 서주금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나라 청동기에도 족휘(族徽, 부족을 상징하는 문양)를 비롯한 문자가 주조되어 있는데, 오히려 갑골문보다 상형성이 더 농후하다. 또 서주이후에 춘추전국시대의 청동기에도 많은 금문이 주조되거나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자체상으로 금문은 일반적으로 서주의 금문을 말한다.

금문은 주로 청동기물에 주조되어 있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고, 이기명문(彛器銘文)이라고도 하며, 당시에 청동을 길금이라 하였기 때문에 길금문자(吉金文字)라고도 한다. 금문은 갑골문과는 달리 고대부터 세상에 전해져 내려온 것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도 일찍부터 진행되었다. 금문은 정벌(征伐)·책명(冊命)·상사(賞賜)·사전(祀典)·계약(契約) 등 당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
원래 예악기·생활도구 등으로 사용된 청동기는 한편으로는 왕권의 상징으로 대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라에서 제작한 9개의 정(鼎)은 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자의 상징이 되었는데, 천하를 도모하는 것이 "九鼎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묻는다(問鼎)"로 대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칼로 새긴 갑골문이 날카롭고 각이 지며 가느다란 것에 반하여, 동기에 주조된 금문은 굵고 둥글어서 중후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중국 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 연관목차 (47/168)
- 裘錫圭, 『중국문자학』, 이홍진 역, 신아사, 2001.
- 張秉權, 『甲骨文與甲骨學』, 臺灣 國立編譯館, 1988.
- 王宇信, 『甲骨學通論』, 中國 社會科學出版社,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