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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동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이복재
<鄕土의 香氣>내가 태어난 고장, 현재 살고 있는 고장을 통털어 향토(鄕土)라 하자. 향토의 구석 구석에 배인 삶의 발자취들은 지금에 와서 보면 모두 향기롭기만 하다. 지나간 이야기.잊혀진 이야기.감추어진 이야기.진행중인 이야기 들을 들추어 보자. |
경기도 양평군 양동을 통과한 관동대로(關東大路)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된 조선시대의 주요 교통로는 서울에서 전국으로 연결되는 10개의 간선도로였다. 동서남북으로 만들어졌는데 동해안 쪽의 도로는 동남지평해삼대로(東南至平海三大路)였다. 경도(서울,숭인지문(동대문))~평구역~양근~지평~원주~강릉~삼척~울진~평해로 연결되었고, 이 노선 중 평구역에서 춘천을 거쳐 양구로가는 길,지평에서 홍천.인제를 거쳐 간성과 양양으로가는 길,원주에서 정선.영월.평창으로 가는 길 등의 분기로가 있었던 이 길의 별명은 관동대로(關東大路) 또는 평해로(平海路)였다. 필자는 이 여러 이름 중 관동대로라는 이름에 정이 간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이 아니래도 서울과 관동을 잇던 옛 길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맞다는 확신 때문인데, 이 글에서 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관동대로(關東大路)라 불러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양근과 지평이 합하여 지금의 양평이 된 우리고장은 양서면 양수리에서부터 양동면 삼산리 대송치에 이르는 길이 통과했고, 양평읍 오빈2리 역말마을에 오빈역.지평면 송현1리 송곡(역말)마을에 전곡역이 있었다.
대동지지의 관동대로 양근과 지평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監營[楊根]十里京一百二十里○南利川五十里越津○北北倉四十五里越津至加平四十五里○東南梨浦津二十里驪州四十里○西廣州八十里越津○西南龍仁八十里越津柏峴十五里 黑川店五里 [砥平]十里○京一百五十里○分岐○南驪州五十里○西南利川六十五里○北加平六十五里 前楊峴二十里松峙二十五里安昌驛十五里冬橋夏船
左營○[砥平]東北○見二十六之十一行廣灘店十里分岐○白冬驛二十里神堂峙十里兩德元十里梧里谷二十里
中營廣灘店東北○見二十七之九行葛峴店二十里於路峴十里古毛谷十里草院店十里 |
양평의 관동대로는 군 경계지역이면서 강을 건너기 전인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 조안면 팔당댐부근 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팔당댐을 지나면 조안면 능내리 봉안마을인데,이곳에 봉안역(奉安驛)이 있었다. 마을은 댐 건설시에 언덕위로 이전하였으며,이 부분옛길도 물에 잠겨있다. 중앙선 옛 능내역을 지나면 북한강을 따라 약간 북상하여, 조안면 송촌리와 양평군 양서면 골용진 사이의 나루인 용진(龍津)에서 강을 건넌다.
양평에서 시작되는 관동대로의 첫 번째 길로서 북한강 나루는 이 용진과,남한강과의 합류지점 즉 두물머리(兩水里) 등 두 군데가 있었다.대동지지에도 그 주기가 있고,조선후기 읍지도에도 양쪽 나루를 대로(大路)로 표시하고 있다.
두 도진로(渡津路)는 대안의 양서면 용담리 기두원마을에서 합류하여 다시 6번국도와 남한강을 따라간다.월계(月溪)는 신원리 월계마을이고,지금도 비석거리가 있다.예전에는 월계원이 있었다.기두원에서 월계까지도 월계천(月溪遷)이라 불리는 잔도(棧道)였다.
양서면 국수리의 한티고개를 넘어,6번국도 구도로를 따라가면 양근고읍이 있었던 옥계(옥천면 옥천리)를 지난다.그 다음에 통과하게 되는 덕곡(德谷)은 양평읍 신원리 덕구실마을로 비정(比定)된다.
양평읍 오빈마을에 오빈역(娛賓驛)이 있었다. 지난 2009년 12월 중앙선복선전철이 용문역까지 개통되고 1년 후인 2010년12월 오빈역도 개통되어 옛 역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뜻이 깊다.
시가지로 들어가면 양근현이 소재했던 양평읍내이다. 양평읍 양근리로서 마을 이름이나마 양근(楊根)의 자취를 엿볼 수 있어 다행스럽다.
도로와 물길이 잘 기록된 조선시대의 고지도(해동지도-지평현)
양근, 지금의 양평읍 소재지에서 남한강과 헤어져서 구릉지대로 들어간다,6번국도는 직선화된 신작로이지만 옛길은 경지정리된 논속으로 갔다.여기서부터 비유현(飛踰峴)과 백현(栢峴,벼랑고개)을 이어 넘는데,양평읍 대흥1리 대곡마을(황골)에서 용문면 삼성2리로 넘어가는 벼랑고개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한번 폐도가 되었다가, 확장공사를 하면서 옛 경로가 부활되었다. 험한 지형을 피한 신작로에 대비해 최근에 개설된 도로는 험해도 직선을 택하기 때문이며,따라서 구 경로가 부활되는 경우가 많다.물론 터널개설 등 큰 변화가 수반되어,옛길을 소멸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도에 없는 작은 고개를 더 하나 넘어 용문면 삼성3리 마을, 옛날에는 흑천점(黑川店)이라는 주막촌을 지나 용문역 뒤편에서 흑천을 건넌다. ‘희망볼랫길’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를 개설하면서 옛날의 징검다리를 재현하여 놓았는데 이 징검다리를 건너면 용문면 화전리 전곡마을로 이곳에서 예전에 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루고개를 넘으면 지평현내로 들어간다. 전곡역은 앞의 전곡마을과는 위치가 다르고 전곡역을 왕래하던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며 전곡역은 그루고개를 넘어 다다르는 지평면 송현1리 송곡마을(역말)에 있었다. 전곡역을 지나 지금은 지평면중심지이자 중앙선지평역전취락이면서 지평면의 소재지로 바뀌어,구읍의 흔적은 향교와 몇몇 유물만 남아있는 지평을 지난다.
중앙선 석불역이 있는 지금의 지평면 망미리와 무왕리의 경계인 전양현(前楊峴)은 포장도로의 700m 가량 남쪽에 옛 고개를 볼 수 있다. 고개를 넘어 무왕리를 지나 일신리에 들어서면 구둔3거리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관동대로는 길이 두 개로 갈라지는데 좌회전하여 구둔치고개를 넘어가는 길 하나와 우회전하여 서화치를 넘어가는 길인데 두 길은 모두 양동면 쌍학2리 활거리에서 다시 만난다. 제보들에 의하면 ‘과거길’은 중앙선 구둔역에서 바로 올라가는 구둔치(九屯峙)였다고 하고,서화치(西化峙)는 너무 우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측정한 바로는 두 길의 거리는 거의 비슷함을 확인하였다. 구둔치를 더 많이 이용했다는 증언에 대한 보충자료는 나중에 추가하기로 한다.
양 기슭에 주막촌이 있고,고갯길이 잘 닦여있는 것으로 보아 구둔치의 왕래가 잦은 것을 짐작할 수 있으나 경사가 아주 급해서 여행자에 따라서는 서화치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두 길은 활거리에서 만나 양동의 옛 이름인 상동면의 소재지였고 장이 섰던 장대(場垈)를 지나 88번 지방도를 따라 내려간다. 소송치(小松峙)를 넘으면 주막촌이었던 솔치마을을 지나게 되고 강원도경계인 송치(松峙,大松峙)다. 대송치를 넘어 섬강강가가 나오면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인데, 안창역(安昌驛)은 역말에 있었다.
안창리에서는 5일과 10일에 장도섰었다고 하며 안창진나루터에서는 60년대까지 배가 다녔다고한다. 지금은 안창대교가 개통되어 문막읍 동화리와 연결되어 원주까지 빠르게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 내용 중 많은 부분을 2002년4월,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도도로키 히로시(轟 博志)의 【 “大東地志”에 나타난 ‘東南至平海三大路(關東大路)’의 經路比定】에서 인용하였고 사실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일부는 수정하였고 내용이 불충분한 것은 보완하였음)
내 고장 양동의 관동대로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기록된 조선시대의 주요 교통로 10개의 간선도로 중 아직까지 옛 길의 모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것이 관동대로라고 한다. 이 길은 다른 길과 달리 강을 끼고 산을 넘으면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형이 험하고 산이 높고 많은 오지를 통과하기 때문에 개발이 어려운 지역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6번국도를 따라 내려오는 길은 옛길과 다르게 이미 4차선으로 직선화 된지 오래이고 길이 갈라지는 용문까지 중앙선 복선전철이 개통됨으로서 그 구간에서 옛길의 정취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반면 용문에서 부터는 비교적 그 정취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다는 것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은 강원도 지방은 논외로 하더라도 관동대로의 수도권인 경기도구간중 지평면부터 양동면까지는 지금도 옛길에 대한 구전과 자취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지평면 일신리 구둔마을에서 구둔치고개까지는 아직도 원형을 보존하고 있고 고개 넘어 양동면 매월리 월은마을로 이어진 길은 그런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주의 올랫길로부터 불어 닥친 옛길 복원은 국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한 테마걷기열풍으로 여러 고장에서도 벤치마킹하여 다른 이름으로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다. 옛길의 복원도 중요하지만 스토리텔링이 있는 현존하는 옛길을 아끼고 보존하는 일. 길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해 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신사임당이 생전처음 서울을 가기위해 넘었을 구둔치,율곡 이이가 오죽헌을 가기위해 생전처음 넘었을 이 고개요, 그밖의 수많은 선인들이 서울과 관동을 오가기 위해 처음 또는 마지막으로 넘었던 치(峙)자 이름이 붙은 높은 고갯길, 구둔치와 필자의 고장인 양동면의 관동대로를 답사하고 정리해 놓음으로서 후일에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양동면의 관동대로는 안창역이 있던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와의 경계인 대송치로 부터 양동면 단석리 서화치(서화현 또는 서화고개)까지 이기도 하고,앞에 말한 구둔치까지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필자가 확인한 관동대로가 표시된 고지도는 1872지방도.대동여지도.조선지도 및 팔도군현도.지승.청구도 및 청구요람 등으로 양동면의 구간을 (대,소)송치~서화치로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실제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길도 이용하긴 했지만 앞 코스는 여주 땅인 주암리를 거쳐야 했으므로 돌아서 가는 길로 멀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내려오는 수량이 제법 많은 금당천을 건너야 했으므로 이런 번거로움도 피하기 위해 거의 직선으로 이어진 (대,소)송치~구둔치 코스를 더 많이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들은 택당 이식이 1615년에 백아곡(지금의 양동면 쌍학2리 안골마을)에 근거를 마련한 경과를 기록한 계산지(啓山志)안에 들어있는 ‘산기(山記)’가 뒷 밭침 해 준다.
산기(山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있다.
“有一條大路 自京師向關東 或分爲小岐 穿谷前後而過 경사(京師)로부터 관동(關東)으로 향하는 길이 뻗어 있는데 그 길이 작은 갈래로 나눠지면서 골짜기의 앞뒤를 지나간다.”
또 한 가지 증거가 있다.
구둔치를 넘나드는 서울 쪽 구둔마을과 원주 쪽 월은마을에는 주막이 있었고,특히 월은 마을에는 마방과 주막으로 쓰던 건물이 지금도 일부 남아있다. 다만 지금 남아있는 주막과 마방건물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며,본래의 주막터는 마을사람들에게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활거리에서 갈라진 두 길은 구둔마을어귀에서 다시 만나니 별 이야기 거리는 되지 않는다. 다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있는 구둔치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더 한 것만은 사실이다.
고지도에 기록된 관동대로의 양동구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도이름 |
표시된 구간 |
기타기록 |
비고 |
1872지방도 |
송치~부연장~전양현~작암~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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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
대송치~소송치~서화치~전양현~작암~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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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도 및 팔도군현도 |
송치~서화치~작암~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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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 |
대송치~소송치~서화치~작암~전향치~지평 |
도소리.부연.수운암.목곡이판부사묘.이판부사묘.죽장리.신창.건지산 등 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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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요람 |
대송현~소송현~작암~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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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지도 |
대송치~소송치~서화현~작암~향전치~지평 |
도소리.내곡택풍당묘.수운암.목곡이판부사묘.부연.신창지.건지산 등 표시 |
구둔치를 넘은 선인(先人)들...
-신사임당에 이어 율곡 이이.송강 정철은 물론 명성황후도 이 구둔치(고개)를 넘었다-
신사임당과 율곡은 물론 관동별곡을 노래한 송강 정철도 이 고개를 넘나들었음은 물론이다.모르긴 해도 송강이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원주로 부임할 때도 남양주의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용문의 흑천을 건너 이 고개를 넘어갔을 테다. 대송치와 안창을 지나 다다른 안창진에서 가늘고 구불구불한 섬강을 만났고,원주에 들어서면서 병풍처럼 앞을 막아선 치악산연봉을 만나 비로서 원주에 다달았음을 알았으리라.
‘平丘驛(평구역) 말을 갈아 黑水(흑슈)로 도라드니
蟾江(섬강)은 어드메오, 雉岳(티악)이 여긔로다‘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데 인가 여기가 치악산이로다.
그의 가사 관동별곡이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서울과 관동을 잇는 과거길 이었음은 앞서 말한바와 같으며 그 밖에도 사대문밖에서는 제일크고 유명했다는 곡수장을 보러 다니던 서민들과 장똘뱅이 들,우시장을 오가던 채꾼이며 소 주인들도 모두 이 고개를 넘었다. 평범한 선인들의 고단한 애환이 어린 고개이자 전대를 차고 소를 팔고 사러 다니던 소장사꾼이 잠복중인 강도에게 돈은 물론 목숨까지 빼앗겼다는 비운과 통한의 고개이기도 했다.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왕비이자 황후인 명성황후가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조심스럽게 해 본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는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長湖院)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 후 청의 제독 오장경(吳長慶)이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하고 한성을 장악함으로 청군의 보호 하에 입궁했다고 한다. 택당 이식의 택풍당과 가까운 곳에 마골이라는 골짜기 위 마을이 있는데 명성황후는 입궁 길에 이 마골의 안병사집에서 이틀쯤 머물다가 갔다고 한다. 당시 마골의 높은 산 위에서 망(望)을 보고 봉화도 올렸다고 하는데 이 산 이름이 망재로서 이 산은 양동면의 중심에 높이 솟아있는 해발397m이고, 위에 오르면 서화치는 물론 양동일원이 다 내다 보인다. 마골로 황후일행이 먹을 식량을 나르던 골짜기를 식량골이라 부른다. 이 사실은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안병사의 묘비명에 기록되어 훗날 밝혀졌다. 결국 명성황후께서도 이 고개를 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구둔치의 또 다른 모습
-구둔치에는 보호해야 할 귀중한 습지도 있(었)다-
구둔치정상을 중심으로 양쪽에는 60년대까지만 해도 논이 있어 벼농사를 지었다.이 높은 산윗 부분에서 논을 일궈 농사를 지을 만큼 수량(水量)이 풍부했다는 점이 구둔치습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구둔 쪽은 보전이 잘 되어있어 논농사를 짓던 농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고 멧돼지가 목욕을 하면서 파 놓은 웅덩이나 도룡용의 알 등 생물체들이 서식하고 다녀간 흔적이 여기 저기서 눈에 띤다.
월은마을쪽은 그 반대다.
5,6천 평은 족히 될 습지는 속살이 드러나도록 파헤쳐져 있다. 지적공부상 농지이면서 사유지여서 누가 뭐라 할 일은 아니겠지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사유지외의 주변 토지도 훼손하여 형사처벌을 받고 일부 복구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고 한다. 환경단체에서 거센 비난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곳이 환경.생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자연습지로서 보존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점을 소유권자에게 미리 알려주고 설득했다라면 이 정도 훼손은 방지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복구에는 수 천, 수 만년이 소요될지 모르니 안타까울 뿐이다.
앞으로 구둔 쪽 습지만이라도 보전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훼손되기 전의 구둔치습지(자료:네이버블로그 '린다곁으로에서)
탐방기
봄이 실종된 듯 겨울의 찬 기운이 늦게까지 느껴진 2011년의 오월 초하룻 날, 어제 까지 봄비치고는 제법 많이 내리다 맑게 개인 화창한 봄 날, 늦게 찾아온 봄이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산벚꽃이 피어나 금수강산을 이루면서 산천은 어느새 신록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줄잡아 한나절, 많이 걸려야 하루면 돌아 볼 수 있는 관내의 관동대로.
먹고 사는 게 뭔지 벼르고 별러 나이 60이 돼서야 제대로 관동대로를 걸어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 물론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지나친 길이긴 하지만 구둔치 고갯마루부터 구둔마을까지는 가 볼 기회가 없었다. 옛 어른들은 가지 않으면 아니 될 필연의 길이었으니 마지못해 갔겠지만 신작로가 뚫린 다음 세대에 태어난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리라.
누구나 첫 상면(相面)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마음은 설렌다. 거리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휴대용GPS며 스마트폰의 앱(지도와 궤적기록)도 작동시키면서 집을 나선다.
시간을 절약하고 걷기에 더해 자전거타기 운동을 겸하기 위해 자전거는 미리 구둔마을 입구 삼거리에 갖다 놓는다.
양동관내의 관동대로가 둘로 갈라졌다가 구둔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다시 만나는 활거리서부터 월은 마을 주막터까지는 애마 갤로퍼를 이용한다.
월은 주막터.
주막터에서 300m쯤되는 거리, 관동대로 근처에 있는 간이역 매곡역은 공사 중인 중앙선복선전철이 완공되는 1,2년 후면 역사속으로 사라질 것이므로 들러서 사진만 찍는다. 지금은 하루 이용객수가 열손가락안쪽인 매곡역은 1940년4월1일 원주역까지의 중앙선이 개통당시엔 없었던 역이다. 60년대 근대화가 본격화되고 농촌인구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에 역의 신설필요에 따라 생겼다. 역이 생길 당시 심었던 전나무 몇 그루가 아래와 같은 역의 개폐역사를 지켜보면서 말없이 서있다.
(매곡역(梅谷驛)의 역사(歷史))
1968년 9월 1일 : 보통역으로 영업 개시
1972년 8월 28일 : 역사 신축
2001년 9월 8일 : 신호장으로 격하
2005년 3월 30일 : 무인역으로 지정
2008년 4월 1일 : 무배치간이역으로 역종 변경
이 역을 여기에 소개하는 이유는 퇴락하여 전혀 쓰이지 않는 관동대로의 지금가려는 구간과 마찬가지로 이 역 역시 새 철길이 생기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마저 사라질 같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아니, 관동대로의 구둔치 아래 주막이 있었기에 매곡역도 생겨났으리라는 확신 때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매곡역이나 월은 주막이나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이 같다는 생각에 이르니 예나 지금이나 변화의 법칙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역사속으로 사라질 매곡역
그나마 희미한 흔적이 남아있는 나중 주막터에서 구둔치 방향으로 300m 쯤 진행하면 매곡역에서 터골로 올라가는 사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옛날의 주막터가 있던 곳이다.
본래 월은주막이 있던 자리-사거리 오른쪽으로 보이는 밭
지금도 남아있는 월은마을의 주막집
2011.05.01 09:19,
이곳을 지난 수많은 어른들이 허기진 배와 마른 목을 막걸리사발로 채우고는 동행한 우마에게도 목을 축이게 하고 구둔치고개를 향해 첫 발을 옮기던 곳에다 차를 세우고 나서 나도 신발끈을 조여매고 걷기를 시작한다.
출발지점(본래 주막터)에서 본 구둔치와 가는 길
앞쪽을 바라보면 십 수 년전에 조성된 왼쪽으로는 매월문화마을이, 그 위 골짜기로는 연록색의 신록을 이룬 움푹 패인 구둔치의 하늘 금이 나그네를 반긴다. 60여 년 전 벌거숭이 산에 녹화(綠化)를 위해 심었던 리기다소나무를 베어내고 밀원식물(蜜源植物)인 튤립나무(목백합)를 심은 식목지가 아직은 볼품사납게 보이는 국유림지대가 눈에 거슬린다. 봄이면 드나들기 시작하여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발길을 끊기까지 사흘에 한번은 다녀가는 이곳에 1000여 평되는 내 논이 있다.
10년 아래인 어느 후배가 사업에 실패하고 어려워할 때 당시 꽤나 여러해 묵고 있던 이 땅은 그야말로 잡목과 잡초에 뭍혀있는 수풀속의 황무지 논다랭이 였었다. 중장비를 들여 합다랭이를 치고 돌을 주워내고 객토를 하여 겨우겨우 논모양이 만들어진 이 땅이 바로 내 땅이요, 구둔치 습지아래 현존하는 첫 번째 논다랭이다, 여기에 붙어 관동대로는 이어진 것이다. 이렇게 내 논 옆에 붙은 길이 관동대로이다. 물론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유독 양동의 관동대로는 나와 이렇게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개울 옆에 여남은 명이 앉을 수 있는 농막(農幕)도 하나지어 놓으니 봄에 모내기 때 한번과 가을에 추수 때 한번 이곳에서 꿀맛 같은 참과 점심을 먹는 용도로 쓰고 있다. 논에 물을 끌어 대기 위해 전기도 끌고 안 쓰는 냉장고도 하나 갔다 놓았더니 이 곳 주민들의 천렵터가 되기도 하고, 어쩌다 와 본 친지들의 요청으로 납량장소로 빌려 주기도 한다. 어떤 때는 생전모르는 분들이 주인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 이 농막에서 가족단위 천렵을 즐기기도 하니 ‘내가 주인인데 딴 데 가서 노시오’하지는 못하고 그저 ‘놀다가 가실 때 쓰레기는 모두 가져가세요’라고 며 이곳이 좋아 찾아든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쓴다. 이제야 생각이 정리됐지만 이 농막이름을 ‘관동대로농막’이라 붙이고 내가 수집한 양동의 관동대로 자료며 이 글까지 이곳에 보관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하련다. 그때 가져다가 꼭 보관해두어야 할 것도 하나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여기 논다랭이에 벼 농사를 짓기위해서는 개울물을 끌어와야 한다. 전에는 보(洑)가있어 물을 댔지만 지금은 높은 곳에서 부터 호스를 이용하여 물을 끌어다 댄다. 그런데 이 호스가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나뭇잎 등 이물질이 아구리를 막거나, 물이 좀 많이 내려오면 떠내려 가고,아니면 자체가 찢어지기를 자주 하는데,평균 1주일에 한번 꼴이다. 그래서 좁고 어둠침침한 험한 개울을 따라 올라가 수리를 한다.
그날도 호스가 막혔는지 물이 내려오질 않아 수리를 하다가 짜릿한 전율을 느껴야 했다. 흘러내리는 물속에 가로 1m, 세로 0.8m 에 두께는 20㎝되는 면이 평평한 돌 위에 무언가 새겨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돌에 새겨진 것은 다름 아닌 고누놀이 판이었다.
누가,언제 이 깊은 산속에서 이런 돌에다 고누판을 파고, 무료한 시간을 달랬단 말인가?
이런 깊은 산중에 단단한 돌에다 금을 그어 고누판을 만들고 즐겼을까?
구둔치를 넘다 쉬어가던 선인들이?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 소장수를 기다리던 강도들이?
그럼 이 돌은 당초에 어디에 있던 것이 여기까지 떠내려 왔는지?
이 돌에 대한 의문은 지금까지도 풀지 못하고 있다.
평평한 자연석에 그려진 고누판-깊은 숲속 물속에서 발견했다
이곳 관동대로에 바로 붙어서 내가 이 땅을 사기 1년 전에 지은 집이 한 채 있고, 길은 그 댁의 울타리를 끼고 우리 논 옆을 지나 산속 길로 접어들게 된다. 농막을 지으면서 주변에서 캐다 심은 버드나무 한 그루와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 농막과 함께 제법 어울린다.
구둔치아래에 있는 필자의 논과 농막,그리고 관동대로
임도까지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숲속에 뚜렷한 관동대로
접어든 산길은 초입부터 물을 건너야 한다. 엊그제 제법 많이 내린 봄비로 인해 산골도랑에 물이 내려가기 때문이다. 연초록의 신록이 내 뿜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산속을 찾아 든 손님을 반긴다. 길가에 있는 어느분의 묘 앞길 건너엔 1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벼를 심었던 논다랭이가 잡초속에 형태만 남아있고 앞이 삐줌히 보이다간 다시 숲속 길.
갓 피어난 각시붓꽃형제들도 보라색웃음을 한 움큼 머금고 산객을 반긴다.
숲속에서 탐방객을 반기는 각시붓꽃
구둔치를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 임도
뒤돌아 본 모습
숲길을 조금 지나면 나타나는 임도.
우리 논 끝에서 부터 임도까지가 그런대로 원형이 보존된 월은 쪽 관동대로 구간이다. 다다른 임도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지나면 길을 건너 위쪽으로 향해야 하는데 본래는 이곳에서부터 고갯마루까지가 구둔치습지다.
붉은 속살이 다 드러나도록 파헤친 무식과 몰지각성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으나 개인소유의 땅으로 개발을 위한 행위였다는데 할 말은 없지만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많이 내린 봄비로 길을 따라 내려오는 물길이 발을 어디에 놓으면서 올라야 할지 허둥거리게 만든다.
붉은 속살이 들어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된 습지와 옛길(1)
붉은 속살이 들어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된 습지와 옛길(2)
붉은 속살이 들어날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된 습지와 옛길(3)
U자형이 되어 있는 구둔치고갯마루 코앞까지도 불법훼손이 이루어졌었던 듯 파헤친 곳에 듬성듬성 심겨져있는 잣나무가 처벌을 덜 받기 위한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식 원상회복(?)이라는 점을 웅변하고 있었다.
구둔치 직전도 불법 훼손했다가 복구한 모습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고장의 산줄기를 샅샅이 뒤지던 3년 전 겨울 어느 날도 나는 이곳을 통과했다. 그때 내가 남겼던 흔적을 찾아보니 수북이 쌓인 가랑잎 속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반가운 마음에 장갑으로 문질러 묻은 흙을 지우고는 잘 놓아둔다. 구둔치고개는 관동대로의 한 통과점이기도 하지만 양동면의 서쪽을 경계로 통과하는 성지지맥의 한 점이기도 하다.
2008년 겨울 이곳을 찾았을때 필자가 달아놓았던 리본
월은마을쪽에서 본 구둔치
구둔마을쪽에서 본 구둔치
고개를 넘어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기는 마음이 설렌다. 이제 부터는 난생 처음 걸어보는 길이요, 원형이 잘 보존된 길이기 때문이다. 혹시 선인들이 남긴 흔적을 놓칠세라 오감을 잔뜩 긴장시킨다. U자로 움푹 패인 고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우마가 이 고개를 오갔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고갯마루를 내려서니 흔적이 보인다.
돌무더기다.
다른 고갯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돌무더기지만 이곳의 돌무더기는 고갯마루에 있지 않고 내려서있다. 아마도 움푹 패여져 가는 고갯마루에는 앉아 쉬거나 돌을 쌓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이 고개를 무사히 넘었음을 기념하고 이 고개를 넘을 다른 사람들의 무사와 안녕을 비는 뜻으로 돌맹이 하나를 주워다 놓고 가는 착한 서민들의 착한 마음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구둔치를 넘으면서 한개씩 가져다 놓은 돌들
돌무더기아래 앞쪽으로 잡목이 무성한 속에서도 논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못살고 배고프던 시절 구둔치습지가 감당한 고단한 삶의 흔적이다. 험하고 높은 곳까지 지개를 지고 다니면서 벼농사를 지었던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쿨해 진다.
논과 질퍽거리는 습지로 인해 길은 산 밑을 한참 우회하고 있었다. 목이 마르고 기생충으로 인해 몸이 가려운 멧돼지들이 물기가 있는 진흙 속에 들어가 몸을 비벼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에는 꼬불꼬불한 도룡용알들이 꽤나 여러 개 눈에 띤다.
구둔치에 남아있는 습지와 논의 흔적
습지에 낳아놓은 도룡용 알
길은 여전히 산 중턱을 가로지르며 사람하나가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나 있었다. 울창한 숲속에는 정막만이 감돌고 논 다랭이들를 지나 내려가던 물줄기는 이내 수십 길 아래로 갑자기 급경사를 이루며 흘러내리는데 산 중턱을 따라 난 길에서 내려다보니 수백 길은 되어 보인다. TV에서 본 적이 있는 차마고도의 한 부분 같다는 생각에 이른다.
좁다란 바윗길도 지나고 쓰러진 나무가 앞을 가린 곳도 지나지만 길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두어 길 되는 높이로 작은 협곡을 이룬 곳도 몇 군데 지나게 되는데 다른 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많은 사람들과 우마가 연한 흙길을 통과하면서 패여 생긴 지형이라는 판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우마가 지나갔으면 이런 지형으로 길이 생겨났을까. 문득 어려서 들은 적이 있는 구둔치 소강도 생각이 떠오르니 갑자기 머리가 주삣해 진다.
‘움푹패인 길을 따라 몰고 갔던 소를 판돈을 허리에 묶어 전대를 찬 소장수가 지나간다. 갑자기 흉기를 든 강도 몇 명이 앞뒤에서 길을 막아서고 양머리쪽에서 불쑥 나타나 권총이나 흉기를 겨누며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한다’
원형그대로 보존된 구둔치 길(1)
원형그대로 보존된 구둔치 길(2)
원형그대로 보존된 구둔치 길(3)
잘 보존된 구둔치의 울창한 자연 숲
약간은 무섭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원형이 잘 보존된 천연림지대를 한참 내려오니 갑자기 앞이 트이면서 식목지대에 다다르게 된다. 구불게 놓인 중앙선철도가 내려다 보이고,구둔마을도 내다보인다.
천연림지대가 끝나고 식목지대가 나타난다
산길을 내려서니 깨끗이 정돈된 농장으로 보이는 곳에 이르게 된다. 큰 나무를 가운데 두고 사각형으로 만든 구조물은 방부목으로 만들어 졌는데 바로 이 구조물 옆을 통과하게 된다.이 구조물은 농장의 전망대역할을 하고 있었다.
구둔치길의 끝부분에서 본 풀꽃나라자연생태학교
건물도 있고 조경도 한 것으로 보아 팬션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가운데를 가로질러 철길아래 놓인 굴을 빠져 나온다. 굴다리 앞에서 방금 내려온 길을 더듬어 보고 신록으로 우거진 구둔치도 헤아려 본다. 이 굴이 바로 구둔치고개로 부터 흘러내려오는 물을 금당천으로 내려 보내는 인도 겸 개울이다. 굴을 빠져나와 앞에 걸려있는 안내깃발을 보고서야 지나온 곳이 풀빛살림숲감성연구소란곳에서 운영하는 ‘풀꽃나라자연생태학교’ 임을 알게 되었다.
풀꽃나라자연생태학교에서 뒤 돌아 본 구둔치
풀꽃나라자연생태학교와 구둔치를 드나드는 터널
다다르게 되는 구둔마을은 여느 시골마을과 크게 다른 것은 없지만 학생수가 제법 많던 한때는 일신초등학교였던 지평초등학교 일신분교장이 있고 마을 안엔 이 관동대로를 지나던 선인들이 쉬었다 갔음직한 수 백 년은 족히 됐을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근처에 주막집이 있었던 것쯤도 쉽게 짐작이 갔다. 길을 따라 마을을 나설 때 쯤 영화마을체험관과 일신보건진료소가 이웃하여 세워져 있는데 현대식의 멋진 건물이다. 몇년후면 역시 역사속으로 사라질 중앙선 구둔역은 오른쪽 언덕길을 오르면 나타난다. 근대건축물로서 보전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 보호한다고하니 참고로 적는다.
일신분교장
구둔 영화마을 체험관
일신보건진료소
양동면 고송리와의 경계가 되는 수리봉(416.2m,본래의 옛 이름은 묵방산(墨方山))에서 발원한 금당천을 건너면 구둔마을 입구가 되고 서화치를 넘어 여주땅을 거쳐 활거리에서 갈라졌던 두 길이 합치는 삼거리에 다다르니 현재시각 10시36분이다.
9시 19분에 옛 월은주막터를 출발한지 36분만에 구둔치고개에, 구둔치고개에서 1시간도 안걸려 총1시간 반이 걸려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거꾸로 구둔치를 넘으려면 두어 시간은 실히 걸릴 것이란 계산이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전양치를 넘어 지평과 양근.평구역을 지나 숭인지문에 다다르는 것이 관동대로의 노선이다. 지금은 이 길이 모두 포장되고 확장되어 이곳에서 출발하면 1시간여면 도착할 수 있는 시대니 여기서부터 서울까지의 길 안내는 생략하기로 한다.
구둔마을 입구 삼거리
아침에 가져다 대기 시킨 자전거로 출발지점을 향해 달린다.
군계를 지나 여주땅인 북내면 주암사거리까지는 자전거로 22분이 걸렸고,다시 주암사거리에서 서화치까지는 23분이 걸렸으니 구둔마을입구 삼거리에서 서화치까지는 45분만에 도착한 셈이다.
해동지도와 1872지방도.대동여지도와 청구요람 등 고지도에는 서화치(또는 서화현)를 지나 작암을 거쳐 전양현에 가도록 기록되어있다. 작암(鵲巖)에 대하여는 어디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어 어딘지도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어서 숙제로 남기기로 했다. 다만 해동지도의 길표시로 보아 서홰마을의 바위로된 산기슭일것이라는 추측만 해 볼 뿐이다. 주암리에서 금당천을 건너 양동쪽으로 향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은 서원리다. 이 마을은 1리인 원골, 2리인 서홰와 산수골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원주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원리로 이름 붙였다는 설과 옛날부터 원님이 쉬어가던 원(院)이 있던 원골(1895년 이전에는 지평현 상동면에 속함)이 상동(지금의 양동)에서 봤을 때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원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주 북내면 주암사거리
서화고개 아래있는 여주 북내면 서원리
그렇지만 실제로는 1895년에 지평현 상동면에서 여주군으로 편입된 서홰(서화와 원골)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합쳐지면서 앞 글자 한 글자씩을 따 서원리가 된 것이라고 한다. 1895년경까지는 양동면에 속한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서화치 또는 서화현을 지금은 서화고개로 부른다. 양평군 양동면과 여주군 북내면의 경계이다. 택당 이식의 동계기(東溪記)에서도 건지산의 서쪽에 있는 서화현(西化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山之西華出西華峴(산지서화출서화현) 崖谷深邃(애곡심수)산의 서쪽으로 계류가 서화현(西華峴)에서 흘러 나오는데, 그 계곡이 깊고 그윽하기만 하다.
舊有院名掛弓(구유원명괘궁) 爲峴隘備盜也(위현애비도야)옛날에는 여기에 괘궁원(掛弓院)이 있었으니,이는 서화현이 험준해서 도적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여주 서원리쪽에서 본 서화고개
관동대로가 둘로 갈라지는 곳 활거리 사거리에 도착하니 11시31분, 갈라진 대로가 다시 만나는 구둔마을 입구삼거리에서부터 이곳까지는 자전거로 1시간20분이 걸렸다.
활거리는 거리의 생긴 모양이 활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양동면 쌍학2리에 속하는 마을이다. 바로 다리하나건너가 양동면의 옛 소재지이고 장이 서던 곳이었으니 지금도 이곳을 장대(場垈)라 부르는데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송치와 안창을 지나 광터를 거쳐 원주로 이어진 길이다.
장대쪽에서 본 활거리사거리
출발지점인 옛 월은주막터를 가려니 직진한다.
활거리와 안골(택당 이식이 터 잡아 조상을 천장하고 택풍당을 지어 후손과 주민을 교육시킨 곳으로 백아곡이라 했다)은 이웃 마을로서 중앙선 양동역이 위치해 있고,몇 년 전까지도 양동면의 소재지가 있던 학둔지로 가는 길옆에 있다.
양동역을 경유하여 양동면사무소를 지나면 택당 이식의 증손자인 목곡 이기진의 묘가 있는 섬실(石室)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섬실은 옛날에 사창(社倉)이 있었다고 하며 중앙선이 개통되기 전 까지만 해도 상동면(지금의 양동면)의 소재지였고 장도 섰었다.
양동면의 소재지였고 장이 섰던 섬실마을과 철교
철다리밑을 빠져 섬실벌판을 가로질러 석곡천을 건너면 매월리다. 앞으로 중앙선복선전철사업으로 매곡역이 옮겨올 설매실을 지나 월은마을에 들어서면 동네가운데 초등학교터가 있다.지금은 폐교되어 노인요양원(노불원 요양센터)으로 쓰이고 있다. 이 학교와 지근거리에 작은 사거리가 나오고 이곳에 나중 주막터가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행랑채까지 잘 보존되어왔는데 지금은 안채와 마구간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건물만 남아있다. 집을 중심으로 둘러친 돌담만은 옛날 그대로 인듯하다. 나중 주막터라 부르는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본래의 주막이 없어지고 터만 남은 이후부터 주막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출발지점인 옛 주막터에 다시 돌아오니 12시 9분, 2시간 반 만에 원점회귀한 것이다.
안창에서 활거리까지
관동대로의 양동면 구간은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대송치~서화치 또는 대송치~구둔치까지이다. 내 동네 구간이라 하여 거두절미할 수 없어 관동대로 안창역(安昌驛)에서부터 출발해 보기로 한다. 안창역(安昌驛)은 관동대로 강원도 구간의 첫 번째 역이다. 안창역과 안창장,안창진에 대하여는 앞에서 간략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을미의병을 창의한 이춘영.안승우 등 두 양동출신 의병장과 청운출신 김백선 의병장들이 1895년 12월,이웃 동리인 이 곳 안창에서 의병창의의 깃발을 올린 곳도 바로 안창이었고, 그런 연유로 지금도 양동을 의병의 고장, 또는 의향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덧 붙이고자한다.
강원도 안창리의 을미의병봉기기념탑
안창에서 대송치까지는 약5.5㎞로 활거리로 이어진 88번지방도로는 관동대로의 본랫길이 그대로 모두 2차선으로 포장되었다.
대송치와 소송치의 거리는 2.4㎞에 불과하고 이 사이에 있는 마을이름도 송치의 우릿말을 그대로써서 ‘솔치’인데 이곳에도 역시 주막이 있었다고 하며, 양동면의 남단에 있는 당산(541m)등산로의 입구가 되는 마을이다.
대송치가 경기와 강원의 경계이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소나무가 있었으면 송치(松峙)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지금도 소나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소나무의 그윽하고 진한 향기가 배어나올 듯한 예쁜 이름이다. 험하고 먼길, 여독에 찌든 객들이 이제부터는 훨씬 얌전해지는 경기(京畿)길에 들어서면서 이 솔향으로 인해 시장기를 느껴 솔치마을 주막집에서 막걸리를 한잔들이키며 넘었을 작은 솔고개,소송치.
대송치
솔치마을
소송치
소송치고개를 넘으면 시원하게 앞이 트인다. 장대 앞들인 두들기의 넓은 벌판이 눈앞에 펼쳐지고 은빛으로 반짝이며 섬강을 향해 흘러내리는 석곡천의 가는 물줄기도 무척이나 시원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소송치를 넘으면 시원스레 내다 보이는 넓은 벌판과 저 멀리 보이는 동그란 건지산
멀리 양동의 랜드마크격인 멀리 앞쪽에 동그랗게 내다보이는 건지산을 바라보며 조선시대 옛 이름인 상동면의 소재지였고 장이 섰던 장대(場垈)를 지나 다리를 건너 이윽고 활거리에 닿는다. 안창에서 활거리까지는 채12㎞가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한때 소재지였고 장이 섰던 활거리 건너 장대마을
이렇게 양동면을 통과하는 관동대로는 짧게는 15㎞요,길게는 20㎞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울서 관동으로 가는 객이었다면 높고 험한 산길의 시작점이요, 반대였다면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힘이 덜 드는 평지길의 시작으로 서울이 훨씬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는 새로운 힘이 샘솟는 희망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늘 말하듯이 경기도 양동면은 예나 지금이나 복 받은 땅이요, 희망의 땅이 틀림없는 것이다. 이번 양동을 통과하는 관동대로를 정리하면서 다시금 느끼는 솔직한 심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