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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들 동지들께.
이번 여름 방학 때 다녀 왔습니다.
다녀 온 후 문학 전문지 '시 현실"에 싣는 원고입니다.
새벽들 식구들 먼저 읽어 보세요.
김 홍 주 올림.
『오래된 미래』라다크로 가는 길 --- (1)
김 홍 주(시인)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50여 년 전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거기에는 우리네 어릴 적 모습들이 알싸하게 녹아 있었다.
춘천 민예총의 해외 문화교류 사업으로 추진된 인도 라다크와의 문화 교류 사업의 첫 일정에서 북인도의 라다크를 처음 여행하게 된 나는 많은 것들을 보면서 참 혼란스러웠다.
모든 사물들이 고정된 석화처럼 움직이지 않고 거대한 히말라야에 붙어있는 듯 보이지만 이 거대한 땅 인도는 쉴 사이 없이 서로 부딪치고 얽혀 무엇인가 고뇌하며 바삐 어디론가 쓸려가는 듯한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그러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도도하게 흘러가는 인도의 모습.
어떤 질서가 이 속에 내재된 것일까.
“난 앞으로 절대 인도 여행은 안가겠다”고 말했던 선배가 어제 전화를 했다. “거참. 이상하지. 집에 온지 열흘 밖에 안 지났는데도 나는 매일 인도 꿈을 꿔, 벌써 또 여행끼가 발동하고 있으니. 인도의 풍경이 자꾸 어른거려서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어. 내가 좀 이상해졌나봐. 발이 근질거려”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처음 내 딛는 이 문화교류사업의 첫 길은 고난과 역경 그리고 인내를 요구하는 암시가 짙게 깔려있음을 직감했다.
앞으로 이 교류는 어떻게 전개될까? 이 화두는 앞으로의 여행에서 미묘한 매력을 느끼며 다가선다.
만년설이 흐르는 북인도 히말라야.
그 얼음이 녹아 흘러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계곡의 힘찬 물결들.
너무 손 시리도록 차가와 그 물에 잠시도 손을 댈 수 없는 계곡물 속에서 빨래를 하는 라다키 부인네들의 모습. 나는 과거 60년대에 엄동설한 한 겨울의 고향 시냇가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도 겨울 철 빨래거리를 들고 얼음을 깨어 가며 빨래를 했으니까.
우리 일행(3명)은 라다크를 가기 위하여 우선 인도의 수도 델리에 안착했다. 인천을 떠나 홍콩 경유지를 거쳐 새벽 2시에 도착한 공항 주변은 여전히 아수라장 모습 그대로이다. 우선 하루 밤을 묵기 위하여 프리택시를 타고 ‘빠하르 간지’ 로 가자고 했다. 빠하르 간지는 인도 배낭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묵는 숙소 밀집 지역이다. 그러나 공항에서 한 시간 정도를 달린 프리택시는 우리들을 엉뚱한 장소에 데려다 주고 그냥 가버렸다.
일행은 한국의 재래 시장통 비슷한 곳에 버려졌다. 배낭을 맨 세명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서 처음 경험하는 이 황당함. 도착 후 겪는 첫 선물이었다.
시장은 버려진 쓰레기와 악취 그리고 여기저기 누워있는 소와 말로만 듣던 인도의 성자들이
즐비하게 시체처럼 누워있다.
우리는 다시 오토릭샤를 갈아타고 우리들이 계획한 ‘스폿 호텔’로 가자고 했다. 골목 길 끝에 위치한 겨우 찾은 스폿호텔. 그러나 그 호텔은 빈 방이 없었다. 호텔 직원들은 현관 입구 좁은 로비에 매트리스를 깔고 자고 있었다.
일행은 할 수 없이 그 옆에 있는 ‘로드 크리시나 호텔’에 짐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우리나라의 최하급 여인숙보다도 시설이 뒤떨어진 숙소이다.
에어콘은 물론 없지만 천정에는 오래된 선풍기가 떨어질 듯 헐떡이며 돌아가고 있었고
일행은 지쳐 온 몸이 만신창이로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인도는 열대아 몬순기후의 영향으로 후덥지근한 날씨이다. 창문도 없는 작은 방. 주인은 우리에게 550루피의 바가지 요금까지 요구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일행은 지쳐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음으로.
새벽에 춘천을 떠나 인도 델리에서 누울 때 까지 꼬박 25시간이나 걸린 셈이다. 그러니까 이틀이나 걸린 결과이다.
나는 숙소에 누워 나는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뭔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를 어찌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방랑벽에 투정도 좀 부리고 욕도 좀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행은 숙소 주변을 산책을 했다. 세상의 모든 쓰레기를 다 모아 놓은 듯 온갖 쓰레기들은 골목마다 거리마다 넘쳐 났다. 지나가던 소가 꼬리를 뻣뻣하게 세우고 힘을 주더니 한 덩어리의 소똥이 거리에 털썩 떨어진다. 참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모두 바삐 걸어간다.
이토록 지저분한 거리. 물론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들은 대부분 맨발이거나 곧 끈이 떨어질 것 같은 낡은 샌들을 신고 어스렁 거린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서서 손을 내 밀고 뭐라고 지껄인다.
나는 유년기에 미군들에게 다가서서 “쵸콜렛 원 기브 미”하고 외치던 나를 발견한다.
세상 모든 문제의 시작은 모두 자신으로부터 사유하고 있는 듯하다.
눈앞에 던져진 이 사물들. 아무도 부정하지 않고 제 일을 하는데 유독 나만 고개를 돌리고 있으니. 문제의 시작은 내 마음, 즉 인식의 차이이다.
이것으로부터 나와 인도의 만남이 시작되려는지.
인도의 도로에는 어느 도시나 개들이 즐비하다.
내가 지난 2월에 비하르 주 파트나에 갔을 때도 나는 거리에서 많은 개들을 만났다. 도로 위 뿐만 아니라 자동차 밑에도 개 들은 즐비했다. 그런데 그 개들은 네 다리를 하늘로 뻗고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델리에서의 개들은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개와 비슷했다.
나는 인도에서 단 한번도 사람들이 개에게 먹이를 주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그러나 개는 사람에게 배고픈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저 지친 듯 지나는 사람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체념인지 아니면 달관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인도 전체가 그러하듯 차라리 개의 눈빛이 인도인의 눈빛보다 더 평온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을 앞세워 박시시(구걸)의 손을 내 밀었다. 그리고 성호 비슷한 것을 머리에 긋고는 “당신의 신이 당신을 보호하려고 나를 보냈습니다. 당신에게 신의 깊은 은총이 가득한 순간입니다” 이런 식의 주문을 외우며 자기 손을 입에다 대면서 배고픔을 호소했다.
인도식의 구걸 방식이다.
인도의 수도 델리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올드 델리와 뉴 델리이다.
올드 델리는 200여 년간 인도 제국을 호령햇던 무굴제국의 옛 수도로서 무굴의 도성이었던 붉은 성이 있다. 이 지역은 거주하는 주민들이 대부분 이스람교인 까닭에 종교적인 대화는 매우 위험한 상황을 유발 할 수 있어서 조심했다.
뉴 델리 지역은 현대적인 건축물이 많이 들어선 신흥 도시의 느낌이 많이나는 곳으로 1900년대 초에 영국에 의해 건축된 지역이다. 특별히 인디아 게이트 와 후마윤의 무덤, 꾸뜹 미나르 유적이 있다.
델리의 인도 고대 유적을 다 보려면 일주일은 걸릴것이라 예상 되지만 우리는 시간이 없었기에 델리에서 하루를 더 보낸 후 돌아오는 길에 타지마할 등 유적을 관람하기로 하고 여행 스케줄을 잡아 나갔다.
우리 일행은 라다크로 가기 위하여 우선 중간 경유지인 ‘마날리’ 로 가는 사설 버스를 탔다. 인도의 버스 제도는 공용 로컬버스와 개인 사설 버스로 나뉘는데 공용버스는 우리나라 옛날 완행버스와 비슷하다. 공용버스는 정원이 없고 사설버스는 정원이 있다. 델리에서 마날리 까지는 사설버스로 20시간 정도 걸리고, 마날리에서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 까지 약 30시간 가량 걸린다.
공용버스는 만약 자리가 없으면 버스 위에 올라 타야하는 인내를 감수 해야만 한다. 저녁 6시에 출발한 우리를 태운 사설 버스는 ‘마날리’ 히말라야 기슭을 향하여 달려간다.
중간에 경치가 좋으면 내려서 구경도하고 사진도 찍기도 한다.
아무도 빨리 가자고 독촉하는 사람은 없다. 만약 있다면 한국 여행객뿐이리라.
일행은 사설 침대칸 버스를 탔다. 3개의 침대 사용요금을 모두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버스안에는 두개의 침대만 제공되고 한 사람은 버스 제일 뒤 긴 의자에 누워 자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상황을 살펴보니 버스 관리인이 1인 침대 사용료를 슬쩍 떼먹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행은 알면서도 그냥 불편한 자세로 견디어야 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버스는 계속 달려간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거리를 세 번은 오고간 셈이다.
버스 기사는 중간에 잠시 쉬면서 식사도 하고 잠시 자기도 한다. 창 밖은 캄캄한 산 중. 간간히 마을 불빛이 멀리 보인다.
우리는 지금 포장 반, 비포장 반인 인도의 산간 지방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중간에 아스라한 절벽 사이로 도로가 뚝 떨어져 나간 부분은 사색이 될 정도로 아찔하다.
우리나라 강원도 영월의 비행기재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으나 그 보다 훨씬 더 가파르다.
마을을 지날 때 마다 발견한 것은 작은 동네라도 반드시 마을 어귀에 ‘스투퍼’라고 불리는 제단을 만들어 놓았고, 어떤 제단 위에는 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또 특이한 점은 아무리 산중에 있다 하더라도 한 밤중에 집 앞에 등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룽따’라고 불리는 깃발들을 마치 어릴 적 운동회 날 운동장에 걸은 만국기 모양으로 집과 나무 그리고 스투퍼에 길게 이어져 걸어 놓은 모습이었다.
옛적 우리나라 마을 입구에 장승과 서낭당, 효자각이 서 있었듯이 말이다.
잠시 쉬는 시골 버스 간이역에서 우리들을 바라보는 티벳풍의 옷을 입은 어린 아이들.
그 언저리에서 숯불을 부채질하며 옥수수룰 구워 파는 할머니의 모습.
할머니는 옥수수를 구운 후 그 위에 레몬 즙과 소금을 발라서 건네주었다. 1개에 10루피.
우리들은 시장기를 때우기 위해 두개의 옥수를 사서 잘라 먹었다.
순간 옥수수를 내미는 할머니의 검은 손이 눈에 들어온다.
더 이상 더러울 수 없는 손. 내가 머뭇거리자 할머니는 눈치를 챘는지 금방 구운 옥수수를 옥수수 연한 껍질로 싸서 준다.
옥수수는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밤새 달려 다음 날 정오 쯤 마날리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여기에서 하루를 묵어야했다.
버스는 또 라다크로 이틀에 걸쳐 30시간을 가야 했으므로.
일행은 우연히 마날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알게 된 ‘비시누’라는 티벳 친구를 사귀었다.
영어를 제법 구사할 줄 아는 이 티벳 친구는 자기는 ‘쿠커’라고 소개하면서 게스트 하우스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하였으나 도착 후 그 친구가 소개한 ‘스프랜탈 호텔은’ 초라한 방 5개 짜리 민박 집 비슷한 숙소였다.
그리고 그 친구의 주방은 화장실만큼 좁고 지저분한 창고 같았다.
그러나 덕분에 일행은 방 하나에 150루피에 묶을 수 있었다.
그는 그 게스트 하우스의 보조원으로 일을 거들고 있는 삐끼였다.
‘마날리’에 머무는 동안 ‘레'로 가는 정보를 알아보니 문제가 생겼다.
마날리에서 라다크의 ‘레'로 가는 도로가 많이 훼손 되었다는 이야기와 바로 전날 좁은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계곡으로 굴렀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한국인도 탔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일행에게 두려움이 닥쳐왔다.
한국인이 몇 명이 탔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 감돌았다.
즉시 이 지역의 사설 관광안내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상황파악에 나섰다.
인도인들의 영어 발음은 영국식 영어인데다가 인도 언어까지 합해져서 여간해서는 바로 알아듣기가 참 어려웠다. 내 영어 회화 실력도 바닥이었지만.
‘레'로 가는 길은 참 어려웠다. 다가서기 힘든 곳.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현대문명이 근접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작가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선생이 지적 했던 것처럼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천년이 넘게 보존된 그들만의 문화 언어 종교가 파괴되어 해부되는 현장으로 나는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순간 나 또한 그들만의 문화를 해치는 방문객에 불과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쳣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라다크에서 진정 무엇을 발견 할 것인가’에 대한 혼란이 닥쳐왔다.
우리나라도 70년대 초에 시작된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이고 우리모두 일어나 새마을을 만드세~’라고 노래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집집마다 내려오던 전통적인 유물들도 모두 불 질러 버렸다.
내 기억에는 마루 밑에 있던 나막신이나 삼베틀, 북 등도 그 때 모두 태워버렸던 기억이 난다.
결국 ‘레’로가는 방법은 짚을 랜탈하여 가는 방법이 최상이었다.
일행은 몇 군데 사설 여행업체에 가서 짚 렌탈에 관하여 문의를 했다. 대충 가격은 6000루피. 10시간 운행 후 10시간 휴식 및 취침. 그리고 10시간 운행.
성수기이기 때문에 9000루피 까지 부르는 악덕 업자도 있었으나 여러 곳을 다녀본 결과 가장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하여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김치 하우스를 찾게 되었다.
우선 한국 라면을 세 그릇 주문하고 우리 일행은 레로 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인도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기가 김치 하우스의 소유주이며, 게스트 하우스 및 여행전문 회사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일 새벽 2시에 레로 가는 짚을 렌탈해 주겠노라며 4000루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이렉트로 가는데 20시간이면 안전하게 모셔다 주겠다고 했다. 마침 지금 짚이 있으니 신청을 하라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어 날짜와 시간을 적기 시작했다. 우리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 인도인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영수증을 주면서 즉시 렌탈비를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잠시 머뭇거렸다. 우리일행의 생각으로는 도착 후 주는 것이 상식인데, 먼저 달라는 것이 좀 의아 했다.
그 때 마침 라면이 나왔다. 우리는 라면을 먹으면서 김치를 주문했으나 김치는 역시 이름뿐, 우리는 반찬 없이 국물이 멀건 라면을 먹어야만 했다.
그 사이 그 인도 남자는 잠시 후 다시 오겠노라며 식당을 빠져 나갔다.
그 사람은 다시 오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가 짚 렌탈비를 주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새벽 2시에 그 거리에서 하염없이 오지 않을 짚을 기다렸을 것이다.
인도가 신비롭다고?
명상과 요가의 나라라고?
사두들이 거리에서 성자처럼 황색 치마를 펄럭이며 바람결에 앉아서 그대의 미래를 예견하고 뭔가 심오한 꼼파의 진리를 설파하는 그런 나라를 기대 했다면 그대는 당장 배낭을 챙겨 돌아가야 한다.
우선 여기에서 터득한 내 생각은 무엇이든 진실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가장 초보적인 자세를 바로 익히는 것이 그 다음 단계에 이르는 정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배우려는 것은 과거의 부분적인 사건을 이해하려 함이 아니다.
역사는 살아있는 바이러스 같아서 과거를 통하여 현재를 알게 되고 또 미래를 전염 시키는 흐름이 아닐까?
현대인들이 물욕에 눈이 멀어 이제는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까지 모두 토해내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라다키들은 자신을 스스로 자연과 동일시하며 누천년을 살아왔다.
가난이 없고 부유가 존재하지 않는 공동체의 삶.
내 얼굴이 항상 그대의 가슴에 강물이 되어 흐르고, 그대의 아픔이 진정 내 아픔이 되는 삶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면서 옛날 할아버지를 따라 5일장에 따라 갔을 때의 느낌이 막 살아나고 있다.
현지에서 생소하고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날 때, 현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이치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오랜 시간의 때가 묻어있다.
오래 동안 만지면 반질거리는 손잡이처럼 인도의 정서에는 시간의 때가 묻어 있는 것이다.
마날리에서 발견하는 허접한 생활의 모양들도 예사로울 수 없다.
재미있는 일은 거리에서 인도 모양의 토산품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왠 키 큰 남자가 내 옆에 와서 폼을 잡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 생각에 같이 찍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함께 찍었는데 그 인도인은 찍고 난 후 아무 말 없이 그냥 제 길을 가는 것 아니가? 이런 황당함이 인도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인도에서는 어느 곳을 가나 사람들이 항상 붐빈다.
거리에서는 건물 벽이나 어떤 곳이라도 거울만 걸고 의자만 놓으면 이발소가 된다. 거리의 간이 이발소에 앉아서 멋지게 면도를 하는 사람들이나 이발 후 귓구멍 까지 청소를 하는 전문인도 있다. 그리고 샌들을 수리하라고 행인들 발만 보고 걸어 다니는 노인에서부터, “아이스 케키, 하드” 하고 소리치며 다니던 깡마른 빙과 장수 소년에 이르기 까지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티벳 어린 아이는 어쩌면 어릴 적 나와 똑 같이 생긴 아이도 있었다. 얼굴에 핀 하얀 버짐 그리고 치켜 올라간 찢어진 작은 눈, 나를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듯한 눈 빛. 나는 한참 동안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그 아이의 손에 낡은 가방이 들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내 목에 걸고 있던 볼펜을 벗어 주었다. 그 아이는 금새 얼굴이 붉어지면서 목걸이 볼펜을 걸고 골목길로 뛰어갔다.
우리는 ‘레'로 가는 상황을 하루 연기하고 마날리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일행은 레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돌아오는 방법은 레에서 델리까지 인도 국내 항공편을 이용하기로 의논했다. 그리고 마날리 시내에 있는 여행사에 항공 티켓을 예약하려고 분주히 여러 곳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보름 후 까지 모든 항공편은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나는 보름 일정의 여행기간을 가지고 출발을 했는데 벌써 엿새가 지나갔다.
결국 델리에서 레까지는 버스와 짚을 이용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육로 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눈 앞이 캄캄해 졌다.(1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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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선생님 오랫만입니다. 저 ..기억이 나실려나 모르겟어요. 86년도에 교동의 자취방에서 쐬주를 마시던 일.......
잘읽어보았습니다 .동녘산악회 회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