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의성군 의성읍 큰장 한 켠에서 반세기동안 명백을 이어온 소머리 국밥 전문 남선옥 안방. 머릴 맞대고 국밥먹는 모습이 한없이 정겹다.
| |
#장터엔 국밥이 있었다
장터에 가면 없던 식욕도 팽팽하게 되살아났다. 눈 흩날리는 겨울, 종일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은 손님들에겐 '정(情)의 도가니'같은 것이었다. 투실투실한 몸매의 심성 좋은 아줌마. 큼지막한 손에 잡힌 식칼에 숭덩숭덩 잘려나간 허드레 편육, 찬 보리밥 한 덩어리를 뚝배기 안에 함께 담고 육수를 붓는다.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 의자에 앉아 한 그릇 후딱 해치운 손님들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그 시절 손자들은 왜 하나같이 국밥 속 정체불명의 고기에 기겁했을까. 할아버지는 "요 놈" 하고 머리에 꿀밤 하나 먹이곤 손자가 입에도 대지 않고 한 쪽으로 밀쳐놓은 우랑(소 생식기), 수구레(가죽에서 벗겨낸 질긴 고기), 소 혀, 지라, 허파 등을 대신 먹어줬다.
버릴 게 아무것도 없다는 소. 고면 골수록 구수해진다는 소뼈, 그걸 솥에 모두 집어 넣고 몇날 며칠을 고면 국 맛은 어떨까? 고는 것도 한계가 있다. 한도를 넘으면 되레 맛이 감소된다. 사골의 한계는 네 번이다. 그래서 사골(?)인가. 네번 넘으면 뼈 속엔 골수가 전혀 남지 않아 플라스틱 넣고 고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관건은 뼈와 부산물 고기의 조합. 그런데 그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소머리와 사골과 소꼬리 중 어느 육수가 농밀할까? 1등은 사골, 2등은 소꼬리, 3등은 소머리이다. 곰탕엔 사골, 설렁탕엔 소머리가 제격이다. 물론 갈비뼈, 등뼈, 엉덩이뼈 등 잡뼈류는 곰탕에 원칙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설렁탕에만 들어간다. 하지만 지금 이 원칙은 다 깨져버렸다.
종종 음식을 맛이 아니라 돈으로 생각하는 주인들도 꽤 있다. 육수 맛 내려고 미원, 소고기 다시다, 커피용 프리마, 심지어 마요네즈까지 넣는다. 육개장은 모르지만 곰탕과 설렁탕엔 그런 감미료를 넣는 건 음식의 ABC도 모르는 바보같은 짓이다. 보석에 페인트칠한 꼴이라고나 할까. 1956년 화학 조미료가 등장하기 전엔 자연 조미료를 적극 활용했다. 뼈만 고면 육수가 너무 담백해 맛이 없다. 그런 담백 깔끔한 육수맛을 원하기도 하지만 일반인들은 '플러스 알파'가 가미되길 원한다. 그래서 양, 곱창, 간 등 각종 부산물을 함께 넣는다. 마치 블랙 커피에 설탕과 프리마를 넣는 것과 비슷한 이치. 고기 부산물을 고면 그 속에서 감미로운 성분이 스며나와 국맛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 풍성한 맛을 인위적으로 제조한 게 바로 '미원'이다. 그렇게 감미로운 맛을 일본에선 '우마미'라고 표현된다. 1908년 일본은 다시마 등에서 추출되는 글루타민산나트륨(MSG)으로 만든 '아지노모도(味の素)'를 개발, 20년대 중반 한국으로 갖고 들어와 매일신보 등에 광고한다.
#소머리 국밥집 의성 남선옥을 찾아서
장터 국밥엔 두 종류가 있다. 돼지국밥과 소머리 국밥(이하 소국밥). 소국밥은 곰탕과 설렁탕 중 어느 계열에 속할까. 설렁탕 쪽이다. 설렁탕은 '뼈의 미학'이 두드러진 메뉴다. 그런데 지금은 고기를 더 강조하다 보니 점차 곰탕 스타일로 변했다. 언제부터인가 장터 소국밥집이 거의 사라졌지만 다행히 경북엔 전국적 장터 소국밥집이 몇 개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게 청도군 풍각읍 풍각시장 내 간판없는 풍각소머리 국밥집(주인 김달마(64)·김소쌍분(52) 내외)과 의성읍 큰장 내 남선옥(주인 안대필(68)·김정애(64) 내외와 장남 안용명)이다.
집단 소국밥촌으로 유명한 곳은 90년대 들어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나들목에서 불과 1㎞ 떨어진 곳에 형성된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소머리 국밥촌. 곤지암 소국밥 원조는 최미자씨(61)가 경영한 소국밥집이고 한창 땐 10군데가 넘었지만 지금은 원조 최씨가 관리하고 있는 1·2관과 인기 코미디언 배연정씨 국밥집 등 5곳 뿐이다.
육쪽 마늘의 고장, 의성 남선옥 소국밥집을 찾았다.
마늘 철이 아니라서인지, 시장 맞은편에 대형 할인매장이 생겨서 그런지 오후 1시를 넘자 의성읍 큰장은 파장 분위기다. 하지만 남선옥만은 손님이 좀 북적댔다. 그래도 오후 2시만 넘어서면 손님이 거의 들지 않는다. 장날따라 5일마다 문을 열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장만해 둔 200여인분이 동이 나면 더이상 팔지 않는다. 1960년대 시골 소읍 상점같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엔 젊은이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흑갈색 격자 창문을 통해 장·노년층 단골이 왼편 사랑채에 엉덩이를 붙인 채 국밥을 먹는 광경이 그대로 보인다. 큰 딸 안홍주씨(40)가 거실과 부뚜막 사이 문지방에 자릴 잡고 어머니 김정애씨와 2인 1조로 호흡을 척척 맞춰가며 국밥을 퍼담는 그림이 더없이 정겹다. 뚝배기를 손님한테 전해주는 장남 안용명씨(38), 그의 부인 차미숙씨는 주방을 지킨다.
남선옥. 처음부터 소머리 국밥집으로 출발한 건 아니다. 광복 직후엔 '색시집'으로 유명했다. 1대 사장 이태조씨(작고)는 오전과 오후에는 배고픈 상인들을 위해 돼지 국밥을 팔았고, 밤에 객고를 풀고 싶은 돈많은 상인을 대상으로 색시들의 웃음을 판 것이다. 마늘 철이 되면 남선옥은 마당 빗자루도 일손을 거들어야 할 정도로 분주하다. 어떤 상인들은 음식 값 대신 마늘 한 접을 주방에 던져주기도 했다. 식성 까다로운 단골들은 자기가 갖고 온 마늘을 호주머니에서 끄집어 내 날된장에 찍어 먹었다. 그래도 주인은 눈총을 주지 못했다. 남선옥 주인은 25년전 안대필씨로 바뀐다. 그는 의성 중심가에서 영천식육식당을 경영했고, 그 노하우를 토대로 남선옥을 소국밥집으로 바꾼다. 남선옥 옥호 역사는 반세기가 넘지만 소국밥 역사는 30여년인 셈.
남선옥 소국밥은 곤지암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다. 곤지암은 국물은 사골로 내고 그 물에 소머리를 삶아낸 뒤 소 뼈는 버리고 18근 정도 나온다는 소머릿고기를 썰어 국밥 형태로 넣어준다. 하지만 남선옥은 사골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소머리 뼈를 매우 중요시한다. 대를 이은 안용명씨가 뼈 고는 비법을 간단하게 소개했다.
"소머리 뼈와 잡뼈를 한꺼번에 넣은 뒤 양, 허파, 염통, 지라, 콩팥, 우랑 등 각종 뒷고기도 함께 넣고 끓입니다. 물론 고기는 중간에 건져내죠. 잡 기름도 일부러 걷어내지 않습니다. 굳기름은 오래 고면 차츰 증발하고 식용 속기름만 남습니다. 물론 종일 가마솥을 지켜야죠."
이는 설렁탕과 곰탕을 결합한 남선옥만의 독특한 육수 빚기다. 지난해 안동과학대 식품조리과를 졸업한 용일씨 집안 사람들의 가업잇기, 그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