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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백여 통의 편지밖에 배달을 못했는데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는 벌써 두 길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곳에 전근 와 처음으로 배달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푸른 물을 하얗게 부수는 달짜근한 바닷바람을 벗 삼으며 편지를 날랐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애가 태어나던 해부터 나는 사뭇 그곳에서 편지를 배달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땐 배달 주소만 보면 어느 집이라도 눈감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꿈처럼 아름다운 추억들이 가슴속에서 빛나던 시간입니다.
나의 자전거는 어느 새 도회지를 빠져나가 저 멀리 산기슭의 성바오르 재활원으로 달렸습니다. 핸들 밑에는 편지 가방이 걸려 있습니다. 그 속에는 군대 간 아들이 부모님께 처음으로 띄우는 반가움도 들어있을 지도 모릅니다. 새 동생이 태어났다는 기쁨을 외할머니에게 알리는 어린이의 글씨가 들어 있을 지도, 공장에 다니는 누나가 동화책을 사라고 동생에게 주는 돈이 들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착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마음씨가 정성스레 담겨져 있을 것을 생각하면 지친 내 다리는 다시금 가벼워졌습니다.
자전거는 어느 새 재활원 앞에 멈추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나무들이 우거져 제법 아름답게 보이던 곳이 가까이 와보니 딴판입니다. 벽이 송판으로 되어 있는 낡은 일본식 건물이었는데, 여기저기 판자가 떨어져 흉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차가움과 어두움이 곳곳에 배어 있어서 실망했습니다.
창밖에 나와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더욱 실망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재활원이라는 곳은 고아원과 비슷하려니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곳은 딴판이었습니다. 어른같이 큰 데도 침이나 코를 흘리는 이가 있었고, 초점 잃은 흐린 눈동자가 수두룩했습니다. 머리통이 삐뚤어졌거나, 얼굴이 찌그러진 아이도 많았습니다. 빛을 등진 가여운 아이들입니다.
울적해진 심정으로 막 사무실을 향해 들어가려 하는데 열 살 가량의 소녀가 나를 가로막으며 손을 내밉니다. 목발을 양손에 낀 그 아이의 눈빛은 선잠깬 아이처럼 흐려 있었습니다.
“내 편지 줘.”
“이름이 뭔데?”
“테레사.”
꾸러미를 살펴보니 그에게로 온 편지는 없었습니다.
“없는 걸?”
“다이아니까(달라니까).”
내 말을 들은 아이는 그만 울상을 지었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얘기를 들었는지, 드르륵 문이 열리며 보모가 나왔습니다.
“처음 오신 분이군요?”
“예, 오늘부터 이곳 담당입니다.”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짐작하시겠죠? 불쌍한 내 아이들이라 생각하시고 보살펴 주세요.”
나는 테레사만 보아도 보모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아인?”
“네, 테레사라는 아이에요. 철길 사고를 당해 엄마는 현장에서 죽고, 저 아인 심한 부상으로 정박아까지 되어 제 진짜 이름도 몰라요. 거기다가 몸까지 약하고요.”
“아니, 정박아라면?”
“쉽게 말해서 바보에요. 그런데 저 아인 제 엄마에 대한 기억은 조금 남아있는 모양이에요.”
보모의 말을 들은 나는 종일토록 우울했습니다. 내가 성바오르 재활원에 다시 들른 것은 이틀 뒤였습니다. 아이들이 하수구 가에 우르르 몰려 있었습니다.
“치치포포 치치포포…….”
술 취한 이 모양 불분명한 소리를 외치며 웃어대는 것을 보니 꽤 재미있는 기차놀이를 하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좋은 장난감 기차를 가졌기에 저렇게 신나게들 노나 해서 가 보았더니, 아 글쎄, 한 아이가 수채에서 지렁이를 꺼내어 맨손으로 도막도박 잘라, 가랑이 밑 땅에 놓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걸 발로 짓밟는 아이들은 진짜 기차라도 탄 듯한 기분으로 외쳐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였습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테레사가 아이들을 향해 목발을 마구 휘둘러대는 게 아니겠어요? 신 지핀 이처럼. 멋도 모르는 아이들은 이리저리 흩어집니다. 괴성(이상한 소리)을 지르는 테레사의 눈빛은 성난 사자처럼 붉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비틀거리는 테레사를 부축하며 물었습니다.
“왜 그랬니?”
“치치포포 시어(싫어), 시어.”
그 말을 들은 나는 그저께 보모가 들려준 테레사의 말이 퍼뜩 생각나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 내가 그런 놀이 못하게 할게.”
하고 끌어안으니, 테레사는 그 때서야 히히하고 웃습니다.
“너 나보고 편지 달랬지?”
“이--잉.”
“네게 편지 보내 줄 사람 있니?”
“엄마.”
“엄마가 어디 계신데?”
“기차 타고 머이(멀리) 갔어.”
테레사는 엄마가 죽었다는 걸 모르나봅니다. 그런 테레사를 보니 가슴이 찡해집니다.
“멀리 어디?”
“하늘나라.”
“누가 그러던?”
“엄마(보모인 듯).”
나는 정박아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 하나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로부터 받고 싶은 편지가 있다면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습니다.
“엄마 편지엔 무슨 말이 씌어 있을까?”
“사진.”
“누구의?”
“엄마.”
나는 식물 같은 이 가여운 천사로부터 깊은 정을 느꼈습니다.
재활원에서 나온 나는 큰 걱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들를 때는 테레사에게 엄마 사진을 갖다 주어야겠는데, 그의 엄마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테레사처럼 얼굴이 갸름하고 눈이 큰 사진이 있었으면 해서,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벽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잡지들을 모조리 꺼내 그런 사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맘에 드는 사진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어 자려고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러나 와야 할 잠은 아니 오고 테레사의 얼굴만 천장에 그려지는 것입니다. 불을 켰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색색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녀석의 가방을 열어 물감과 도화지와 붓을 꺼냈습니다. 테레사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여러 장을 그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봉투에 넣어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며칠 후, 편지를 배달하러 재활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테레사는 안 보였습니다.
“테레사는요?”
나는 보모에게 그렇게 물으면서 편지 꾸러미를 건넸습니다.
“아파서 누워 있어요. 열이 심해요.”
테레사의 방을 찾았습니다. 그 아이의 입술은 말라 있었고, 얼굴은 핏기를 잃고 있었습니다.
“편진?”
나의 배달 가방을 본 테레사는 조그만 소리로 뇌까렸습니다.
“네게 온 편지가 있어서 하도 기뻐 내가 뜯어 봤지. 그랬더니 사진이 없어서 우선 그림으로 보낸다더구나.”
나는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꺼내 주면서 테레사의 손목을 꼭 쥐었습니다. 그 때 나는 느꼈습니다. 엄마의 그림 사진을 보는 순간 테레사의 손목 맥박이 몹시 뛰는 것을. 내 가슴도 방망이질을 하는 것을. 테레사의 눈에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퍽 무더운 날씨입니다. 테레사와 나와는 정이 담뿍 들어 버렸습니다. 테레사는 낫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아요. 약을 먹여도 소용이 없어요.”
나는 이렇게 말하는 보모와 함께 테레사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얼굴은 더욱 파리했고, 머리맡의 사과가 그냥 있었습니다. 나를 본 테레사는 반가워하는 눈빛을 띠더니 봉투 없는 사진을 한 장 주며, 엄마에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건 버스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기도하는 소녀의 사진이었습니다. 그러나 글도 모르고 생각도 잘 못하는 테레사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고 간절한 사진이었습니다.
“담엔 엄마보고 엄마 맘씨 달래.”
"엄마 맘씨?"
테레사의 난데없는 부탁을 듣고 난 깜짝 놀랐습니다. 맘씨를 어떻게 해야 갖다 줄 수 있나? 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테레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보모에게 부탁했습니다.
“병이 아주 나빠지면 우체국에 전화해 주세요.”
나흘째였습니다. 테레사의 병이 아주 나빠졌다는 전화가 보모에게로부터 걸려온 것입니다.
나는 배달 편지를 가방에 넣자마자 집으로 달렸습니다. 멋도 모르고 끌려나와 자전거 뒤에 탄 아내는 캐물었습니다. 나는 테레사의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재활원에 도착했을 때, 테레사는 눈 못 뜬 채, 색색거리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문득 옷고름을 풀었습니다.
“자, 엄마 맘씨야!”
테레사 옆에 눕고는 그의 두 손을 자신의 젖무덤에 파묻었습니다. 테레사는 온갖 힘을 다 내어 실눈을 뜨는 듯 했습니다.
“어 --ㅁ 마, 마 --ㅁ씨!”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입술을 움직이는 테레사의 입가는 미소를 머금은 듯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
멀리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창틈으로 들어와, 우리와 테레사의 귀에, 입가에, 눈에 은은히 스며들고 있었습니다.(1980. 4. <소년동아일보>. 23.3쪽)
첫댓글 동화....
잘 읽었어요.
작가의 아름다운 마음이 이 동화를 읽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큰 사랑을 전하게 될지.....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어요
정만영은 중부권의 대표적인 동화작가입니다.
이미 세상을 뜬 작이지요.
작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