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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의 <엄마의 눈>, <피아노 연주>
사랑의 깨달음을 통하여 느끼는 감정의 정화
이방주
김경숙님의 <엄마의 눈>, <피아노 연주>를 이달의 당선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사랑의 깨달음을 통하여 내면의 고통과 아픔을 해소하는 과정을 잔잔한 어조로 고백한 작품이다.
<엄마의 눈>은 백내장으로 세상을 뚜렷하게 보시지 못하는 엄마의 눈을 치료하여 밝은 세상을 찾아드리는 과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엄마의 눈이라는 육체적인 눈의 의미를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마음의 눈으로 사유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부끄러운 자신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엄마의 눈에 백태가 끼어 세상을 흐릿하게 볼 수 없었던 것은 물리적인 현상이지만, 자신이 마음의 눈에 백태가 끼어 진정한 사랑을 보지 못한 것은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 원망과 분노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막을 걷어내게 된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피아노 연주>는 아들의 피아노 연주를 보면서 섭섭함, 노여움, 두려움 등으로 뭉쳐진 내면을 씻어내는 과정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이 작품은 영화감상의 경험을 소환하여 아들의 피아노 연주의 감동을 대비적으로 묘사한 점이 주제 형상화에 크게 이바지한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일상의 체험을 통하여 마음을 정화하고 혈육에 대한 진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작품화했다. 이 두 작품은 체험의 단순한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시키면서 스스로의 감정의 찌꺼기를 정화하는 치유효과를 보여주었다. 아울러 체험의 진실성을 문학적이고 잔잔한 어조로 소란스럽지 않게 전하고 있어 읽는 사람도 함께 치유되는 수필의 특성을 잘 반영하였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수상 소감
수필은 빛과 소금이 된다는 신념으로
김경숙
사람들의 앞에서 첫 소감을 나누는 것은 손끝이 떨리는 순간이다. 좀처럼 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필공부를 시작한 지 2년이란 세월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의 글은 아직도 설익은 풋과일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문학에 대한 목마름을 가늠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에 지인이 ‘수필 창작 교실’로 초대하였다. 처음에는 낯설고 물선 타향에 온 듯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업 시간은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내는 기쁨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선생님의 재치 있고 지혜로운 교수법과 함께하는 문우들의 솔직한 글 나눔과 합평 시간이 글 쓰는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하였다.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글을 쓰는 것은 삶을 진솔하게 나누어 나도 행복해지고 다른 이도 행복하게 하는 좋은 길잡이라 여겨졌다. 아름다운 영화처럼 재미있는 영화처럼 감동 주고 심금을 울리는 글은 세상에 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거북이처럼 나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정성과 열성으로 수필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신 이방주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함께 수필 교실에서 웃고 나누던 문우들에게 깊은 우정을 느끼고 고마움을 전한다. 손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글 쓰는 이 여정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희망하며 등단의 기쁨을 가족과도 나누고 싶다.
엄마의 눈
김경숙
하늘은 뿌연 연기가 스며든 회색빛이다. 눈 수술을 앞두고 계신 엄마의 눈빛 같다. 입김이 서린 유리창처럼 투명한 시야가 떠나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 사정을 안 것은 지난달이었다. 작년부터 엄마의 집은 살림살이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갔다. 혼자 사시는 작은 평수의 아파트이다. 들어가는 현관에도 크고 작은 물건들이 모래무더기처럼 쌓여갔다. 주방의 싱크대 위에도 마트에서 행사용품으로 받아온 자질구레한 그릇들이 줄지어 서 있다. 혼자 사시는 데 필요 없는 잡다한 생활용품이 방에도 거실에도 주인처럼 앉아 있다. 나는 쌓이는 물건만큼 엄마에게 잔소리가 많아지고 언쟁도 잦아졌다. 만날 때마다 닭싸움은 계속되었다. “제발 쓸데없는 것은 버리시고 공짜는 가져오지 마세요.”라는 볼멘소리에는 “알아서 치운다.”라고 하시며 뺑덕어미 화내듯 문을 박차고 나가신다. 엄마는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다.
한 달 전 일이다. 작은 베란다에는 아깝다고 모아둔, 오래된 제사 용기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보기 좋은 제기들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선물 꾸러미 보자기에 싸여 커다란 종이 상자에 놓여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깨끗하게 보관하시며 챙기시던 목기이다. 베란다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물건이기에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집 밖으로 들고 나와 버렸다. 웬일인지 엄마는 말리지 않으셨다. 덩치 큰 물건이 나가니 베란다는 시원하고 넓은 바다 같았다. 가장자리에 있는 나무 화분은 청량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엄마의 모습은 순간 목석같은 느낌이었다. 아무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노안이라고 글씨가 흐릿하고 색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불편을 하소연하시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엄마의 노안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다음날 엄마를 모시고 소문난 안과를 갔다. 80세 노인이라 세심한 검사가 필요했다. 검사 결과는 두 눈 모두 ‘백내장’으로 나왔다. 의사는 눈 상태가 아주 나쁘다고 빠른 수술을 권하였다. 일주일 간격으로 두 눈 수술 날짜가 정해졌다.
며칠 후 눈 내리는 날 오후에 엄마는 눈 수술을 하셨다. 살 만큼 살았다며 이대로 살다 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다며 아이처럼 두려워하셨다. 오른쪽 눈 3시간, 일주일 후 왼눈 2시간으로 성공적인 수술을 마치셨다. 엄마는 공양미 삼백석에 두 눈을 뜬 심청이 아버지처럼 새로운 세상을 본다며 날아갈 듯 기뻐하셨다. 어둡고 침침한 긴 동굴 속에 갇혔던 시간을 서러워하셨다.
집안 여기저기 차지하고 있는 가구들, 옷장을 메운 빛바랜 헌옷가지들, 크고 작은 물건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셨다. 언제나 당신의 집이 가장 편하다고 장담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낯선 손님처럼 집안을 돌아보신다. 엄마의 두 눈을 덮었던 막은 사라지고 수정같이 맑은 눈으로 다시 태어났다. 엄마의 집은 신선하고 깨끗한 바람이 흐르고 빛나는 가구들이 숨 쉬는 쾌적한 보금자리로 변해갔다. 엄마의 몸은 추운 겨울의 중턱에 서 있지만 마음은 봄날의 꽃길을 걷는 듯했다.
윤이 나도록 쓸고 닦는 엄마를 남기고 산책을 나왔다. 아파트 옆 오솔길을 걷었다. 청아한 겨울 냄새가 코끝에 와 닿는다. 이름 모르는 나무에 빨간 열매가 탐스럽게 달렸다. 내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붉은빛은 따뜻한 모닥불처럼 마음에 스며들었다. 엄마의 눈 걱정은 내 마음을 살얼음판으로 만들었다. 맑은 하늘빛을 타고 내 눈 속에 들어온 붉은 빛 열매는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는 봄바람 같았다. 어느새 쌓였던 근심들이 녹아버렸다. 엄마에게 보는 기쁨이 새처럼 날아왔듯이 나에게도 날아온 것 같다. 서 있는 나무들이 정겹다. 나의 두손에 스치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걷고 있는 오솔길이 소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파트 모퉁이를 돌 때 내가 버렸던 목기가 생각났다. 그 목기에 서린 아버지의 정이 떠올랐다. 내 눈이 원망으로 가려져 아버지의 사랑을 볼 수 없었던 옛일이 생각났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약한 술버릇은 나와 동생들을 무척 힘들게 하였다. 술을 많이 드신 날에는 밤늦게 집에 돌아오셨다. 곤히 자는 자식들을 아침같이 우리를 깨우신다. 날벼락 맞듯 우리 형제들은 일어난다. 술기운이 사라질 때까지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아버지의 이런저런 속상했던 일, 어릴 적 야단맞던 일, 자식들에 대한 잔소리와 훈계가 반복하여 이어진다. 한 달에 한두 번씩 치르게 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보통의 일상생활에서는 자식들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셨다.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셨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술버릇은 내 마음의 눈에 원망과 분노의 백태를 쌓이게 했다. 그런 백태가 두꺼워질수록 아버지의 모습은 내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두 눈에 끼인 백태가 집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였던 것처럼 나의 눈도 아버지의 슬픔도 고통도 기쁨도 알아볼 수 없었다. 꿋꿋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보지도 못하는 눈뜬장님이었다. 오로지 내 눈 속에는 나 자신만 있었다. 눈이 흐려지면 마음도 흐려지나 보다. ‘눈이 밝아지면 몸도 밝아진다.’라고 했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은 모난 돌을 둥근 조약돌로 만들 듯이 내 눈을 덮고 있던 장막을 걷어 주었다. 눈을 가렸던 어둠의 장막이 거치니 내 마음에서 아버지의 술 향기가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엄마의 두 눈이 긴 아픔의 터널을 지나서 광명을 찾았던 모습 같았다.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슬픔과 기쁨 그리고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자신 안에 숨어있는 어둠과 빛을 만나는 순간이라 생각된다. 내 안에서 부딪치는 두 눈빛! 고개 드는 하얀 눈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다. 차가운 실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내일은 바람 속에서 혜안을 찾아보리라. 언제나 엄마의 두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으면 좋겠다.
피아노 연주
김경숙
노을이 퍼져가는 저녁이다. 아들이 졸업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분주한 하루를 보냈지만 잃어버리지 않고 꽃다발도 준비하였다. 핑크빛 짙게 감도는 장미꽃 한다발을 아들처럼 가슴에 안고 기차를 탔다. 나는 분비는 사람들을 지나 조용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기차는 서서히 아들을 향하여 떠나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가지가 가을의 끝자락에서 손짓한다. 텅 빈 논을 지키는 희미한 가로등에 아들 얼굴이 비친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길가의 초라한 집들이 정겹다. 기차는 한 마리 백마가 되어 힘차게 어둠 속을 달린다. 어느새 창밖 거리는 작은 불빛이 여기저기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내려앉은 어둠은 며칠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를 데려간다.
어둡고 침침한 넓은 거실이다. 달빛 같은 희미한 불빛만이 흐르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검은색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의 뒷모습은 편안함을 찾아보기 힘든 고독한 모습이었다. 그는 강렬하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선율은 조금도 느낄 수 없는 파열음만 피아노에서 터져 나온다. 그 소리는 피아노를 부술 것만 같은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포효하는 호랑이 울음소리 같았다. 욕망의 노예가 되었던 지난밤 자신을 단죄하는 소리 같았다. 젊고 순수한 하녀를 성폭행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몸서리치는 소리였다.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 안정된 가정이 무너질 수도 있는 치욕적인 행동이었다. 피아노 연주로 부서진 마음을 쏟아내고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하녀는 수줍은 모습으로 하얀 찻잔을 들고 온다. 나가려는 하녀를 불러 그녀에게 준비해 놓은 누런 봉투를 건넨다. 힘없이 거실을 나온 하녀는 그 봉투에 보란 듯이 누워있는 몇 장의 지폐를 보며 옥구슬 같은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오열한다. 그 후 그녀의 복수는 시작된다.
나는 그 남자 주인공의 피아노 소리가 며칠 동안 귓전에 맴돌았다. 불편하고 무거운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내 마음에 주인공의 깨진 유리 같은 마음이 피아노 소리를 타고 스며들었다. 나는 그 남자처럼 어둠의 행실을 따라서 행동한 것도 아닌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안에는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불쾌한 피아노 선율 따라 되살아났다. 감정의 혼돈이 일어났다. 구름 사이로 가늘게 비치는 햇살처럼 마음에 숨겨진 부정적인 감정이 얼굴을 내밀었다. 섭섭함, 노여움, 두려움 등으로 뭉쳐진 내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피아노 연주는 나를 힘들게 하였던 감정의 복병을 알아차리게 하였다. 나의 일상에서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말들은 듣는 이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이 되었을 것이다.
땅거미가 내린 밖을 바라보니 샛별처럼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 속을 달리던 기차도 종착역이 다가왔다는 안내방송에 맞추어 속도를 줄인다. 기차 안은 승객들이 내릴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하다. 대합실은 태양처럼 환한 빛으로 가득 차고 나를 둘러싼 어둠은 사라졌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아들의 연주가 시작되는 학교로 갔다. 마음에는 설렘과 기대감이 풍선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곳은 큰 행사를 열 수 있는 그랜드 홀이다. 정돈된 무대는 공연을 감상하기에 알맞은 눈높이였다. 부드러운 부분 조명은 은은하게 모여 있었다. 객석 주변은 어둡고 희미한 조명으로 그윽한 분위기였다.
공연은 시작되고 아름다운 목소리와 다양한 악기로 심금을 울리는 연주는 객석을 감동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마침내 아들은 깔끔한 정장과 빛나는 구두를 신고 무대에 나왔다. 정중히 허리를 굽혀 청중들에게 인사를 했다. 기다리고 있는 피아노 의자에 앉자 두 손을 모았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러 두 눈을 감는다. 그리고 조용히 아들의 두 손은 하얀 건반 위를 파도가 밀려오듯이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아들의 피아노 연주는 힘차게 내리는 소나기처럼, 때로는 가볍게 날아가는 새털처럼 건반 위에서 춤을 춘다. 숨소리처럼 작고 낮게 그리고 부드럽고 여린 바람 소리로 그의 열정적인 연주는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5분 동안의 연주는 혼신의 힘을 다한 영혼의 소리였다. 나는 그 피아노 소리에 전율을 느꼈다. 기쁨과 환희가 휘몰아치는 순간이었다. 십 년 만에 듣는 피아노 연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성당에서 열린 음악회에 참가하였었다. 그때도 감미로운 연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그 후 아들은 도둑처럼 찾아온 병으로 긴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 새가 밤새 울었듯이’ 아들도 절망하지 않고 병고를 이기며 노력하였다. 오늘 그의 피아노 연주에는 고진감래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의 열정과 희망이 묻어난 피아노 연주는 나의 마음에 기쁨의 강물이 되어 흘렀다. 그 강물은 내 마음을 돌고 돌아 나의 두 눈에 이슬로 맺혔다. 그리고 감사의 눈물이 되어 흘렀다. 200년 전에 작곡된 아름다운 곡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한마음으로 공감하는 이 순간에 닫힌 마음을 열게 했다. 어두운 마음을 몰아내고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소리는 마음을 가볍게 했다. 한 길 물속 같은 내 마음에서 이끼처럼 자라나던 감사와 기쁨이 피아노 소리에 실려 울려 퍼진다. 이제는 욕망을 따르던 삶에서 울부짖던 연주에도 욕망을 다스린 삶에서 부르짖는 연주에서도 울리는 공명을 마음의 귀로 조용히 들어야겠다.
첫댓글 수필은 빛과 소금이 된다는 신념으로 쓰신 <엄마의 눈>과 <피아노 연주> 수상을 축하합니다.
읽는 저도 치유가 된 듯합니다.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듯 좋은 글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축하합니다.
글을 읽으며 수필은 치유의 문학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합니다.
자신의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넘어서는 진솔한 고백이 독자의 심금을 두드립니다
신인상 수상을 거듭 축하드리며
수필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신 지도 선생님께도 축하 인사드립니다.
한국수필 등단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