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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스크랩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에 대한 고찰
호산나 추천 0 조회 779 18.09.04 22: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

호르 산(Mount Hor)의 위치에 대한 고찰

-페트라는 가데스 바네아가 아니고 자발 하룬은 호르 산이 아니다-

 

[이 글은 2015. 10 14자 크리스천투데이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이: 강훈기(康勳基)

 

들어가면서

 

가데스 바네아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약 38년이란 긴 광야생활을 한 장소였기에 그 위치에 대해 많은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호르 산도 중요한 관심사였는데, 그것은 아론이 올라가 죽은 산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에돔 왕의 거절로 그의 영토 가운데로 나 있는 큰길(왕의대로)로 지나가지 못하고, 돌이켰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간 출애굽 사건에 언급된 장소들을 찾기 위해 많은 학자 및 탐험가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진 장소는 그리 많지가 않다. 이러한 상황에 출애 핵심 장소인, 홍해 장소와 시내 산의 위치를 각자가 주장하는 장소에 추어 설정하다 보니, 동일한 지명을 가지고 여기저기 서로 다른 위치 설정하는 기이(奇異) 현상도 발생했. 나아가 더욱 큰 난제는 성경에서 같은 장소를 다른 이름으로도 기록해 놓은 것인 데, 아직도 이들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내지 못해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실례를 들면 신명기 10 6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브에롯 브네야아간에서 길을 떠나 모세라에 이르러 아론이 거기서 죽어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를 이어 제사장의 직임을 행하였으며라고 나온다. 그러니까 민수기 20 22절에는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진을 쳤으므로( 33:37), 브에롯 브네야아간(Beeroth Bene-Jaakan)이 가데스 (Kadesh)이고, 호르 산( 20:22-29)이 모세라(Moserah)인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브에롯 브네야아간과 가데스 바네아 그리고 모세라와 호르 산이 같은 장소 또는 인근의 지명으로, 아니면 각각 서로 다른 장소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정확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브에롯 브네야아간과 모세라는 논외로 하고,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대해서만 검토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40년 출애굽 역사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광야에서 유랑한 곳이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이기 때문에 여기 저기 진을 친 장소들이 제일 많은 곳이고, 아울러 진을 친 장소들이 제일 많이 밝혀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빗나간 판단으로 엉뚱한 장소를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 결과 출애굽 경로를 밝히는 데 더욱 많은 혼선을 빚게 했음은 물론, 그로 인해 2천 년 가까이나 세상 사람들이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잘못 믿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에 관련된 고대문헌의 기록들을 살펴보면서, 전통적으로 믿어온 요세푸스의 주장은 무엇이 문제이고, 성경에서 말해주는 위치 정보와 어떻게 다른지를 검토해 보면서, 도대체 왜 그런 주장을 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도 알아볼 것이다. 왜냐하면 요세푸스의 주장도 성경을 근거로 나왔으므로, 성경에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대해 말해주는 정보와 달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성서고고학에서 밝혀낸 자료들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이론도 함께 검토해 보면서 진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가 과연 어디인가를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1.   고대문헌과 전승에서 찾아본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

 

헬라어로 페트라(Petra)는 히브리어로 셀라(Sela)이고 바위를 뜻한다. 아람어 성경인 탈굼(Targum) 역본들에서는 구약성경의 가데스(Kadesh)를 레겜(Rekem/Reqem),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를 레겜 기아(Rekem Giah/Reqem Geya)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페트라(Petra)의 원래 이름이 레겜이라고 하면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들어온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는 페트라이다. 그리고 호르 산(Mount Hor)은 페트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 중에서 제일 높은 산인 자발 하룬(Jabal Harun)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찾아본 고대문헌의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1)  고대 이집트 제 18왕조(BC1550~BC1292) 때의 가나안 원정기록과, 기원전 1400년경의 아마르나(Amarna) 편지들에서 페트라를 묘사한 것으로 여겨지는 펠(Pel), 셀라(Sela) 또는 세일(Seir)이라는 문자의 기록이 나타난다. 이 기록에 의해 기원전 16~14세기경에 이 지역에 인류가 정착한 사실이 확인되었고, 산악지대에 에돔 족속이 살았다는 구약성경의 기록들도 사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

 

2)  1947사해 서쪽 쿰란동굴에서 발견된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BC 2~AD 1)에 레겜이 나타나는데, 이 레겜이 페트라를 묘사하고 있어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임을 입증해주는 하나의 근거라고 한 종교관련 사전이나 종교관련 서적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근거로 제시한 사해문서 “4Q462”에 대한 영문 번역본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 문서는 잘려나간 부분이 많아, 남아있는 일부분의 글자만을 가지고 번역한 때문인지, 똑같은 히브리어 원문인데도, 역본 간에 그 번역내용이 많이 달랐다. 그 주제들만 비교해보아도, ①”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묵상(Meditation on Israels History), ②”다가오는 빛의 시대(The Era of Light is coming), ③”이집트와 예루살렘의 빛과 어둠(Light and Darkness in Egypt and in Jerusalem) 등으로 역본 마다 서로 달랐다. 그리고 오직 ①의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묵상”에서만 레겜(Rekem)이 나올 뿐이었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레겜은 셈, , 야벳 그리고 야곱이 등장하는 문장 중에 나타나고, 그 사이에 사라진 글자들이 많아 참뜻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영문으로 번역된 여러 역본 중에서도 레겜이 오직 한 곳에만 나타나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재고의 여지를 남겼다. 따라서 이 사해문서 “4Q462”의 레겜이 페트라를 가리킨다는 표현은 그 증거를 확인할 수가 없어 지나친 논리의 비약으로 판단되었다.

      Frag. 1 2[ . . . Shem and] Ham and Japheth [ . . . ] 3[ . . . ] to Jacob, and he [said . . . ] and remembered [ . . . ] 4[ . . . ] to Israel [ . . . ] Then [they] shall say [ . . . ] s[ . . . ] to Rekem we went, for [ . . . ] was taken [ . . . ] 6[ . . . ] to slaves for Jacob in love [ . . . ] 7[ . . . he will] give it as a possession to many. (참조: Dead Sea Scrolls, 4Q462, Meditation on Israels History, E.M. Cook, 1996, London Harper Collins)

 

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기 바로 전인 모압 평지에 도착해 진을 쳤을 때, 모압 왕이 미디안(Midian) 12장로와 점성술사 발람을 포섭하여 바알 브올 사건을 일으켜, 이스라엘 백성을 황음에 빠지게 했고 역병에 걸리게 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했다.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하여 모세가 비느하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만 이천 명의 군대로 미디안을 치게 했다. 이때 비느하스가 진멸시킨 미디안 중에는 다섯 명의 미디안 왕( 31:8)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레겜(Rekem) 왕이었다.

 

      그런데 1세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37-AD100)가 그가 쓴  유대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에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 이때 죽임을 당한 레겜 왕이 페트라를 건설한 자라 그 도시의 이름을 레겜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레겜이 거대한 무리를 이끌고 이 전투에 참여했다. 레겜은 죽임을 당한 미디안의 다섯 왕 중 한 명이었다. 레겜은 아라비아 전체 국가의 우두머리로서, 그가 건설한 도시를 수도로 삼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레겜이라 했다.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고, 헬라인들은 페트라라 했다(참조: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iv. 7, 1- 4, 7)

      그리고 호르 산에 대해서는 페트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제일 높은 산이고, 산 밑은 가파르다고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모세가 광야 길로 그의 백성을 이끌고 아라비아에 있는 페트라에 왔다. 페트라는 아랍인들이 자랑하는 그들의 중심도시로, 전에는 레겜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페트라로 부르고 있다. 거기에서 페트라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 중에 제일 높은 산꼭대기로 아론이 올라갔다. 모세는 그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말했고, 그의 제사장복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인계했다. 가파른 산 밑에 있는 모든 회중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는 죽었다. (참조: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iv. IV, 82-83)

 

4)  3~4 세기의 유세비우(Eusebius of Caesarea: AD270~AD340) 325 년에 그의 저서인 성경지리사전(Onomasticon)에서 레겜에 대해 언급했는데, 요세푸스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

      페트라는 아라비아의 에돔에 속해 있는 한 도시이다. 욕드엘(Joktheel)이라 불렀고, 아람어로는 레겜(Rekem)이라고 했다. 레겜은 페트라인데 이스라엘에 의해 죽임을 당한 레겜(Rokom)이 통치하던 아라비아에 있는 한 도시이다. 그 레겜 왕은 스스로가 미디안(Midian/Madiam) 왕이라고도 했다. (참조: Eusebius, onomasticon sacr. 286, 71. 145, 9; 228, 55. 287, 94)

 

      그리고 호르 산에 대해서도 역시 요세푸스의 주장을 좇았다.

      호르 산은 페트라에서 가까운 장소에 있다. 페트라에 가면 지금도 모세가 지팡이로 갈라서 물이 나오게 한 바위를 볼 수가 있다.(참조: Eusebius, Onomasticon, 46, 14-16/126, 19s./176,7s.)

 

5)  또한 제롬(Jerome: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AD348~AD420) 400년에 쓴 창세기 상의 히브리어 질문들(Hebrew Questions on Genesis)에서 심판의 샘이라고 불리는 가데스는 페트라 인근에 있다고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 (참조: Saint Jerome's Hebrew Questions on Genesis, translated by C. T. R. Hayward, p 46, Gen 14:7, 1995 AD)

 

6)  히브리 성경의 고대 아람어 역본인 온켈로스 탈굼(Targum of onkelos), 예루살렘 탈굼(Talgum of Jerusalem, 요나단 벤 우찌엘 탈굼(Talgum of Jonathan Ben Uzziel) 등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가데스(Kadesh)를 레겜(Rekem)으로,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를 레겜 기아(Rekem Giah)라고 번역했다. 이 탈굼 역본들에서는 요세푸스 측이 주장한 가데스가 레겜이라고 한 것과는 같았지만, 레겜이 페트라이고 페트라가 가데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레겜(가데스)인 신 광야(Wilderness of Zin)에 진을 쳤다(encamped in the wilderness of Zin, which is Rekem).고 해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 광야에 있다고 했다.(탈굼 역본 민 33:36)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인류가 사용하는 언어도 변화를 거듭 해왔다. 특히 패권을 쟁취한 강대국에서 채택하는 언어는 그 세력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패권국이 채택하는 공용어도 함께 익혀야 했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널리 통용되고 있는 공용어로 번역해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런 연유로 맨 처음 출현한 성경의 번역본이 기원전 3세기경의 헬라어 성경인 70인 역본(LXX Septuagint)이다. 그리고 3 세기에 아람어 성경인 온켈로스 탈굼 역본(Targum of onkelos)이 나왔다. 기원전 6 세기 바빌론 포로시기 이후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많아져 회당(Synagogue)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경을 낭독하고, 아람어로 통역해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러 세기 동안 지속해오던 전통을 보완해 바빌론에 거주하던 유대인 학자들이 만든 것이 온켈로스 탈굼 역본이다. 그 이후 예루살렘 탈굼 역본, 요나단 벤 우찌야 탈굼 역본 등 여러 역본이 나왔다. 예수님도 아람어를 잘 하셨고,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말씀들 중 몇몇 구절이 아람어로 신약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요세푸스도 분명히 아람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 내용을 잘 파악하여, 가데스 바네아가 신 광야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세푸스가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에 있다고 주장을 했고, 유세비우스와 제롬도 그의 주장에 가세한 것이다.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어떤 이론이나 주장들은 성경 전체의 내용과 반드시 합치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요세푸스 측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기되는 여러 의문과 함께, 그들의 주장이 다소 문제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가 있다.

①   모세에 의해 미디안 왕 레겜이 죽임을 당하는 출애굽 시대의 페트라는 에돔의 중심도시였다. 모세가 에돔 왕에게 그의 땅 가운데를 지나가는 큰길(왕의대로)로 통과하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해 에돔 땅을 돌아서 비켜가야만 했다. 그리고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칠 때 다 불사른 것은 미디안의 성읍들과 촌락이지, 에돔 땅과 페트라가 아니다.( 20:14-21, 31:1-12)

②   하나님께서 에서(에돔)에게 주신 땅이었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전쟁 때에도 에돔 땅과 페트라는 무사했다.( 2:4-5, 15:1, 34:3)

③   탈굼 역본에 이스라엘이 에시온 게벨 다음으로 레겜(Rekem)의 신 광야(Wilderness of Zin)에 진을 쳤다(encamped in the wilderness of Zin, which is Rekem).에서 알 수 있듯이 가데스 바네아(레겜)는 분명히 페트라가 아닌 신 광야에 있다. (탈굼 역본 민 33:36)

④   페트라 인근의 자발 하룬을 호르 산이라고 주장했는데, 호르 산은 에돔의 중심부가 아니라 에돔의 변경에 있다.( 20:23, 33:37)

⑤   미리암이 페트라에서 죽었다고 했는데, 미리암은 분명히 신 광야에서 죽었다.( 20:1)

⑥   와디 무사에 있는 모세의 샘에서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는데,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신 광야의 가데스이다. ( 27:14, 32:51)

 

그런데 도대체 왜 요세푸스가 모세에게 죽임을 당한 미디안 왕 레겜을 페트라에 끌어들이고, 신 광야에 있는 가데스 바네아를 왜 페트라에 옮겨다 놓았을까?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왜 대부분의 학자들이 페트라가 가데스 바네아이고, 자발 하룬이 호르 산이라는 요세푸스 측의 기록과 전승을 멀리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관한 고대문헌들 모두가 다 성경을 근거로 작성되었으므로 그 어떤 이론이나 주장도 성경 전체의 내용과 일부분이라도 상충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성경에서 찾아본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부터 모압 평지까지 진을 친 장소는 모두가 31군데로 민수기 33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진을 친 장소들의 위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출애굽 경로 및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밝히는데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나름대로 검토해볼 수 있는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에 대한 정보를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우선 먼저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는 근거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14 7절의 기록에는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의 연합군이 엔미스밧 가데스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치고, 하사손 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쳤다는 내용있다. 엔미스밧 사막 심판 이라 가지고 있는데, 가데스(Kadesh)라고도 불렀.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14:7)

 

이스라엘이 에시온 게벨 다음에 (Wilderness of Zin) 가데스에 진을 쳤다. 그리고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이 돌아와 보고한 곳도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이다. 이처럼 가데 바네아는 광야(Wilderness of Paran) (Wilderness of Zin)에 걸치는 넓은 지역 가리키고 있다.

 

에시온게벨 가데스 치고(33:36)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으니 ( 13:3)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 9:23)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13:26)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의 백성들에게 아모리 속의 산지올라가서 두려워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지하라고 명령하셨다.( 1:20-21) 그런데 백성들이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할지, 우리가 갈 그 성읍들 어떤 하자 하여, 모세가 각 지파의 수령 급에서 한 명씩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으로 보냈는데, 그들이 바란 광야에서 출발하여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다.

 

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13:21-22)

 

그러나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에 여호수아 갈렙 제외하고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올라가 차지하 반대 하자, 백성들이 두려운 나머지 원망을 터뜨리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죄를 저질렀다. 자신들의 판단을 앞세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여 명령을 거역한 죄의 대가로 40년간의 광야 생활 것이고, 더불어 1 세대 자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 하였나니( 9:23)

너희의 시체는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14:32-33) 

 

그러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일 방향을 돌려 광야 들어가라명령하셨다. 왜냐하너희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경고를 하셨기 때문이다.

 

아말렉인가나안인골짜기거주하나너희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14:25)

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1:40)

 

그러 뒤늦 하나님 명령 거역 깨달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아모리 족속의 산지 올라가 싸우겠다고 나서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고, 싸우지도 말라고 하신다.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지만 아말렉인, 가나안인 등에게 패하여 호르마까지 쫓겨 왔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가데스 바네아에서 네겝 광야를 가로질러 가나안으로 들어 있는 빠른 놓쳐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죄의 대가로 정탐일수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 년간의 기나긴 광야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여호와배반하였으여호와께너희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언약궤모세진영떠나아니하였더라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14:43-45)

너희는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죄악담당할지너희그제서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 14:34)

 

  

가나안으 는 빠른

 

참으로 고되고 힘든 광야생활을 마무리 하는 40년이 해의 첫째 달에  광야의 가데스 므리바이르렀,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부족하다고 다시 불평을 한다. 이에 지팡이 들고 반석 두 번 쳐서 솟아나게 하여 백성들과 짐승들에게 먹이게. 그런데 모세와 아론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하나 거룩함 나타내 아니 사람 역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벌을 받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서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20:12-13)

 

후에 모세가 에돔의 변방 모퉁이 성읍 가데스 바네아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당신의 가운데를 지나는 큰길(왕의대로) 통과시켜 달라고 간청 하지만 거절당했다.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 가데스에 있사오니 청하건대 우리에게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우리가 밭으로나 포도원으 지나가 아니하 우물물 마시 아니하 왕의 큰길로지나가당신지경에나가기까왼쪽오른쪽으로치우치아니 하리이한다라 하였더니 에돔 왕이 대답하되 너는 우리 가운데로 지나가지 못하리라 내가 칼을 들고 나아가 너를 대적할까 하노라( 20:16-18)

 

그리고 이스라엘이 가데스 떠나 에돔 땅 변경에 있는 호르 이르렀을 , 모세와 아론이 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 물”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성의 목전에서 나타내지 않은 죄로 아론은 출애굽 40 5 1일이 되는 날에 호르 정상에 올라가 죽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의 죽는 모습을 산 밑에서 보고, 그를 위하여 30 일간 애곡했다.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이르시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 므리 물에 거역 까닭이니라(20:22-2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가에서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니하였음이니라 이 은 신 가데스므리물이니라( 27:14)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 오월 초하루에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 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으니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던 때의 나이는 백이십 삼 세였더라( 33:38-39)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30일 동안 애곡하였더라( 20:29)

 

네겝 거주하 가나 사람 아랏 라엘이 아다림 올라온다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사람을 사로잡는 바람에, 이스라엘이보복으로 아랏 왕을 쳐서 그들의 성읍을 멸한 사건이 일어났다. 따라서 호르 산은 가데스 바네아와 아랏 사이 있음을 수가 있다.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로 온다 함을 듣고 이스라엘을 쳐서 그 중 몇 사람을 사로잡은지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백성을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하리이 여호와께 이스라엘 목소리 들으시 나안 사람을 그들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하니라 그러므로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더라 ( 21:1-3)

 

 

가데스 바네아에서 아다림 길을 통해 아랏으로 간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 바란 광야의 가데스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고 하신 명령을 거역하는 바람에 아다림 길을 통해 네겝 광야 가로질 가나안으 놓쳐버렸고,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에돔 왕의 거절로 호르 산에서 돌이켜, 힘들게 지나왔던 크고 두려운 바란 광야(The great and terrible wilderness of Paran)홍해 길로 들어가 이제 다시 지나가야 한다고 하자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상한 것이.

 

에돔 왕이 이같이 이스라엘이 그의 영토로 지나감을 용납하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서 돌이키니라 ( 20:21)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21:4)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틀림없이 아주 힘든 여정이었광활한 바란 광야의 홍해 들어가 다시 광야를 지나간다. 그리 아라 근처 세일 산지들어가 곳에서 여러 두루 돌아다닌다. 그곳 세일 에서 다시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 지나고, 에돔 오른편으로 나있는 광야 (사막 )들어가 가나안을 향해 북쪽으로 나아갔다.

 

우리방향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지역으지날진그들너희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2:1-5)

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괴롭히싸우지라 그 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2:8-9)

 

에시 게벨에서 가데스 바네아 모압 평지까지의 출애굽경로이다. 초록색은 호르 산에서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통과해 대로 가기 원했 경로이고, 붉은색 산에 돌이 엘랏 시온 광야길( ) 들어 모압 평지 는 머나 먼 경로이다.

 

: (Mt. Seir) 산지 원주민이었 호리 족속의 땅이었으나, 야곱의 쌍둥이 형인 에서(Esau) 곳에 정착하면서, 에돔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세일은 털이 많은, 관목이 우거진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에돔 사람들살았던 산악지대로서, 저지대인 아라바 광야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사해 끝에서부터 남쪽으로 아카바 만까지를 잇는 광활한 지역을 통틀어 세일 산지(산맥)부르고 있으며 길이는 자그마치 160km 정도나 된다. 세일 산지에 제일 1,700m 정도 되며, 대부분 산들로 형성되어 있고, 붉은 바위가 많이 널려 있는 산악 지대이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으로서, 페트라( 900m) 하룬( 1,440m) 산지 내에 있다.

 

에돔은 세일 산지 중심으로 에서와 후손들이 호리 족속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 ( 25:30, 36:1-8)이고, 에서와 후손들이 세일 산지살았으며( 36:8), 세일 산지(에돔 산지) 바위틈 거주하며 높은 산악 지역에 살았다.

 

오바댜의 묵시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말씀 하시니라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1:1-3)

 

그리 에돔 경계선 에시온 게벨 아카 만까지였.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 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 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왕상 9:26)

 

이처럼 이스라엘이 3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했는데, 기간은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여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였다. 기간 중에 여호와께서 스라엘에게 맹세하신 대로 1세대 20 이상의 모든 군인은 죽임을 당했.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2:14-15)

 

: 개역개 한글판에서 가데 바네아에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동안이라” 번역하여 혼동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 38년의 기간은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해 광야 생활을 하기 시작한 때부터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다고 약속한 땅의 남쪽 경계선으로 사해 끝 ? 다말 - 아그랍빔 언덕 남쪽 ? 신 광야 - 가데스 바네아 남쪽 므리바 샘 ? 하살아달 ? 아스몬 ? 애굽 시내 - 대해(大海) 지중해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수가 있고, 에돔의 경계가 신 광야(Wilderness of Zin)까지 접근해 있었음을 다음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남쪽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봇 가데스 물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이는 그 남쪽이요 ( 47:19)

갓 경계선 다음으로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바 가 이르 시내 대해 이르나니(48:28)

너희 남쪽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의 남쪽 경계는 동쪽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 돌아서 아그랍빔 언덕 남쪽에 이르고 신을 지나 가데스바네아 남쪽에 이르고 또 하살 아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 아스몬에서 돌아서 애굽 시내를 지나 바다까지 이르느니라( 34:3-5)

또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남쪽으로경계이르고 또 은 신 광야까지라( 15:1)

 

 

가나안 정복 후 이스라엘의 경계를 나타낸 지도

 

나아가 성경에서는 바위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페트라를 히브리어 셀라(Sela)로 표현했다. 유다 왕 아마샤(Amaziah: BC796~BC781)가 에돔과 전쟁을 하여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셀라(Sela)까지 차지했다는 기사에서 페트라(셀라)는 분명히 에돔의 영토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일부에서는 셀라(Sela/Selah)가 페트라(Petra)가 아닌 다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역본(Latin Vulgate Bible)에는 셀라(Sela)가 페트라(Petra)로 번역되어 있어 셀라가 페트라임을 확인해 준다.( 16:1, 42:11, 1:36, 1:3)

 

아마샤가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사람 만 명을 죽이고 또 전쟁을 하여 셀라를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니라(왕하 14:7)

아마샤가 담력을 내어 그의 백성을 거느리고 소금 골짜기에 이르러 세일 자손 만 명을 죽이고 유다 자손이 또 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밀쳐 내려뜨려서 그들의 온 몸이 부서지게 하였더라(대하 25:11-12)

pse percussit Edom in valle Salinarum decem milia et adprehendit Petram in proelio vocavitque nomen eius Iecethel usque in praesentem diem (Vulgate 2 Kings 14:7)

 

여기까지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와 호르 산의 위치에 관련된 기록들을 성경에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이 다음과 같이 확인되었.

 

  가데스 바네아는 바란 광야와 광야에 걸쳐있고, 신 광야는 바란 광야의 오른쪽에 있다.

  신 광야는 네겝 광야와 인접해 있고, 에돔의 경계는 광야에 인접해 있다.

  에돔에 큰길(왕의대로) 있고, 길로 지나가면 에돔의 가운데를 통과한다.

  호르 산 정상에서 아론이 죽는 것을 회중이 바라보고, 그를 위해 30일간 애곡했다.

  호르 산은 가데스 바네아와 아랏 사이에 있고, 에돔의 경계에 있다.

  네겝 광야에는 아랏과 호르마가 있고, 가나안 지방에 위치해 있다.

  므리바의 물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있다.

  호르 산에서 돌이켜 바란 광야의 홍해 길로 가면 에돔 땅을 우회한다.

  세일 산에서 돌이켜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을 지나서 광야 길로 들어가 북으로 나아간다.

  하나님께서 세일 산은 에서(에돔)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다투지 말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남쪽 경계가 사해 남쪽 끝에서 왼쪽으로 다말, 아그랍빔 언덕 남쪽,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샘 그리고 에돔 경계에 인접한다.

  에돔 자손은 세일 산지의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산악지역에 살았다.

  에돔의 북동쪽 경계는 세렛 시내까지이고, 남쪽은 아카바 만까 이었다.

  셀라는 페트라이고 세일 자손이 거주하는 에돔 땅에 속했다.

 

그러면 이번에는 요세푸스측이 내세운 페트라 지역이 가데스 바네아이고, 자발 하룬이 호르 산이라 주장을 가지고, 성경의 출애굽 사건에 연결시켜 본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미디안 왕 레겜이 통치하는 바란 광야의 페트라(가데스 바네아)에 들어갔다.

   바란 광야의 페트라(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냈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40 년간의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그래서 200 만이 넘는 이스라엘이 페트라(가데스 바네아)에서 미디안 및 아라비아인들과 약 38 년간을 보냈다.

   기나긴 광야생활이 끝나가는 40 1월에 신 광야의 페트라(가데스 바네아)로 갔을 때 미리암이 그 곳에서 죽었고,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모세가 반석을 갈라 신 광야 므리바의 물(아인 무사)에서 백성들에게 물을 먹였다.

   에돔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인 페트라(가데스 바네아)에서 큰길(왕의대로)로 통과를 요청하는 사신을 에돔 왕에게 보냈다.

   신 광야의 페트라(가데스 바네아)에서 자발 하룬(호르 산)으로 갔을 때, 40 5 1일에 아론이 그 산꼭대기로 올라가 죽었고, 그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30 일간 애곡했다.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땅 남방에 사는 아랏 왕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나라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 몇몇을 사로잡은 탓에, 이스라엘이 아랏 왕의 사람과 성읍들을 다 멸하고 그곳을 호르마라 했다.

   자발 하룬(호르 산)에 머물 때, 에돔 왕에게서 큰길로의 통과를 거절당해, 우회해야 했으므로 마음이 상했고, 자발 하룬(호르 산)에서 돌이켜 바란 광야의 홍해 길로 들어갔다.

   홍해 길에서 가까운 세일 산에 머물다가 홍해의 아카바 만 북단에 있는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을 지나, 광야 길로 북상했다.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 왕이 미디안의 12 장로들과 점술사 발람을 포섭해 바알 브올 사건을 일으켜 이스라엘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미디안 인들과 그 성읍들을 멸하고, 5 명의 미디안 왕도 함께 죽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레겜 왕이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찾아본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에 대한 근거들과 요세푸스 측이 내세운 주장을 가지고, 검토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페트라는 바란 광야와 신 광야에 걸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라바 광야를 서쪽에 끼고 있다. 그러므로 페트라는 바란 광야와 신 광야에 걸쳐있는 가데스 바네아가 아니다.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페트라의 지리적 여건상 미디안인 및 아라비아인들과 같은 지역에서 약 38 년간을 보낼 수가 없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낸 곳은 페트라가 아니라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이다.

   미리암이 죽은 곳은 페트라가 아니라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이고, 므리바의 물 사건이 일어난 곳도 페트라 인근의 와디 무사가 아니라 에돔의 변경에 있는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이다.

   에돔 왕에게 큰길(왕의대로)로 통과를 요청하는 사신을 보낸 곳은 페트라가 아니고, 에돔의 변방 모퉁이 한 성읍인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이다. 그리고 요세푸스 측의 주장대로라면 에돔의 중심도시인 페트라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들어가 있어, 에돔의 가운데로 통과요청을 할 필요가 없다.

   아론 에돔 중심 에돔의 서쪽 경계에 , 가데스 바네아와 네겝 광야의 아랏 사이에 위치해 있다.

   아론이 산꼭대기로 올라가 죽은 산은 자발 하룬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발 하룬(해발 1,440m)은 산이 높아 아론이 죽는 모습을 산 밑에 있는 온 회중이 바라볼 수가 없고, 산 밑은 가파르고 물이 없어 200만이 넘는 인구가 그를 위해 30 일간 체류하며 애곡할 수가 있는 장소가 아니다.

   자발 하룬은 페트라에서 남서쪽 방향이라 아랏 왕이 거주하는 방향과 다르다. 따라서 가데스에서 호르 산으로 갈 때, 그가 놀라서  사건을 일으키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에돔 왕에게서 큰길(왕의대로) 통과를 거절당해 우회하면, 자발 하룬에서는 바란 광야의 홍해 길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절당한 큰길(왕의대로)로 들어가는 모순이 생긴다.

   자발 하룬에서 홍해의 아카바 만 북단에 있는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을 지나가려면 왕의대로로 들어가 반대방향으로 내려갔다가 또다시 그 길로 올라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세일 산을 에서(에돔)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니 다투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세일 산은 출애굽 당시 분명히 에돔의 영토였다. 그래서 에돔 땅은 여호수아의 정복전쟁 때에도 무사했고,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도 제외되었다.

   페트라는 성경의 셀라이고, 세일(에돔) 자손은 대대로 바위틈에 거주했다. 유다의 아마샤 왕이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자손 만 명을 죽였고, 셀라(페트라)를 취했으며, 유다 자손이 에돔 자손 만 명을 사로잡아 바위 꼭대기에서 밀쳐 내려뜨려 몸이 부셔져 죽게 했다. 

   미디안 왕 레겜이 아라비아 수령들의 우두머리로서 페트라를 건설하고 스스로가 미디안 왕이라고도 했다는데, 출애굽 당시에 페트라는 분명히 에돔의 영토에 속했고, 에돔의 중심도시였다. 그리고 레겜 왕이 이스라엘에게 대적하기를 원했으면 모압 평지에까지 올라갈 필요 없이, 이스라엘이 페트라에 머물고 있을 때, 충분히 그들을 도모할 수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왜 모압 평지 우측의 미디안 성읍까지 올라가서 죽음을 자초했는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지금까지 검토해본 바와 같이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이고, 호르 산이 자발 하룬이라는 요세푸스 측의 주장에 다소 문제가 있고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정보와 맞지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요세푸스 측도 자신들의 주장에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왜 요세푸스 측은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을까?

 

요세푸스 측이 내세운 주장에 대한 배경을 찾기 위해서는 앞에서 논외 시킨 가데스가 브에롯 브네야아간( 10:6)이라고 기록된 성경구절에 한 번 더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브에롯(Beeroth)은 복수로 샘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브네야아간(Bene-Jaakan)은 야아간의 아들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브에롯 브네야아간은 야아간 자손의 샘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야아간은 에셀(Ezer)의 셋째아들(대상 1:42)이고, 에셀은 세일(에서)의 여섯째아들(대상 1:38)이다. 그러니까 야아간은 세일(에서=에돔)의 손자이다. 나아가 세일은 호리 족속이고, 세일의 아들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 36:20-21)이다. 그러므로 호리(Horite)는 동굴에 거주하는 자(Cave Dweller)를 의미하니까, 의미상으로 브네야아간은 동굴에 거주하는 자손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에돔 땅에서 가장 많은 동굴이 있는 페트라를 브네야아간이라고 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렇게 유추하다보니까 페트라가 브네야아간이고, 브네야아간이 가데스이므로, 페트라가 가데스라는 주장이 나왔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나아가 가데스 바네아를 페트라로 설정하다 보니, 가데스 바네아 다음에 진을 친 장소는 호르 산이므로, 페트라 인근에 있는 산을 하나 골라 호르 산이라고 했을 것이다.

 

따라서 요세푸스 측이 가데스 바네아가 페트라라고 한 주장은 인명과 지명의 의미에만 지나치게 의존한 탓에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성경에서 말해주는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참작(參酌)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내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페트라를 레겜과 연결시키기 위해, 출애굽 당시 모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미디안 왕 레겜을 끌어들인 것은 어떤 증거자료나 물증도 없이 지나치게 논리를 비약시킨 결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페트라 지역에 거주 가능한 인구의 검토

 

요세푸스 측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보다 더 심도 있게 분석하기 위해 페트라 지역에 거주 가능한 인구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검토하여 보고자 한다.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처럼 과연 200 만이 넘는 인구가 페트라에서 약 38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을 머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했고( 36:8),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에돔은 바위틈에 거주하고, 높은 산악 지역에서 살았다( 1:1-3) 분명한 사실, 하나님께 분명 세일 산지 에돔에 기업으 사실( 2:5)성서에서 입증해주 있음에 불구하고, 요세푸스 측은 에돔 땅 세일 산지 내에 있는 페트라를 가데스 바네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를 방문해 여행자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놀라운 여러 현상들 중의 하나는, 천혜의 요새인 협곡을 지나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에서 과연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궁금증이. 붉은 사암들이 펼쳐내는 기묘한 양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함은 물론이고, 인간이 바위를 깎고, 다양한 모양으로 조각하여 보기에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으며, 다양한 종류의 굴을 파서 인간이 살아가는 필요 시설 등으 사용했으니 말이다.

 

특히 이곳의 지형조건이 가져다주는 문제 중의 하나인 급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옛날부터 페트라 주변지역 분포된 오아시스들로부터 수로 연결해 물을 끌어들여 사용했다는 사실에 그저 놀랍고 감탄스러울 뿐인 것이다. 페트라는 온통 바위로 뒤덮여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고대에 적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에는 최고의 요새(要塞)일지는 몰라도, 4.5 km나 되는 긴 계 내에는 사람의 생존에 필수 소인 물을 공급하여 있는 오아시스가 별로 없어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이 물의 부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역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하늘에서 내려 주는 () 의존하고자 했을 터인, 과연 페트라 지역의 우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지역의 강우량을 오랜 기간 동안 측정한 요르단 정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강우량이 가장 많은 시기는 연중 1~2월이고, 연중 평균 강우량은 150mm 정도였으며, 가장 많이 내렸을 때의 강우량은 연중 350mm 정도였다.

 

그리고 페트라의 주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오아시스(천연샘) 살펴보 페트라 북서쪽 시야(Ain Siyagh), 북쪽에 있는 아인 벱드베(Ain Bebdbeh), 남쪽에 있는 아인 브락(Ain Braq) 아인 암몬(Ain Ammon), 그리 동쪽 무사(Wadi Musa) (Ain Musa) 등이다. 여기의 오아시스에서 생산되는 물의 양을 조사한 기록은 아래 표와 같다.

 

오아시스 명

시간당 생산량

1일 생산량

아인 시야그(Ain Siyagh)

1.0 m³

24 m³

아인 벱드베(Ain Bebdbeh)

2.5 m³

60 m³

아인 브락(Ain Braq)

0.8 m³

19.2 m³

아인 암몬(Ain Ammon)

1.0 m³

24 m³

아인 무사(Ain Musa)

20~40 m³

480~960 m³

      

25.3~45.3 m³

607.2~1,087 m³

 

밖에도 와디 무사 지역에 4~5 정도의 오아시스가 있지만 나오는 물의 양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다. 아인 무사는 페트라의 중심부로부터 동쪽으로 7 km 정도 떨어진 와디 무사에 위치해 있는 페트라 지역에 있는 오아시스 중에서 물의 양이 가장 풍부한 곳이다. 이처 오아시스에 확보 않아 페트라를 가데스 바네아라고 주장하는 측은, 페트라와 그 동쪽 위치 무사, 그리 북쪽 위치하 작은 페트라인 -베이다 지역까지 포함하여, 이를 가데스 바네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페트라에 공급할 있는 생수의 전체량 시간 45.3m³정도였고, 하루의 생산량으로 환산하면 1,087m³이다. 사람의 1 생활에 필요 40리터(0.04m³) 보았 , 출애 이스라엘 인구 200만으 보고, , , 타 등 동물의 수를 50만으로 본다면 합계가 250만이나 되므로, 하루에 필요한 물의 양은 10m³ 된다. 따라서 지역에서 얻을 있는 하루의 물의 양이 이스라엘이 필요한 하루의 물의 양에 1 % 정도 밖에 되지 않아 형편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을 수가 있다. 또한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저수장, 등에 확보해 놓은 물이 있었다고 해도 앞에서 확인하여 연중 강우량 정도로는 하루에 필요했던 물의 양을 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수가 있는 것이다.

 

찰스 오틀로프(Charles Ortloff) 박사팀의 탐사결과 의하 나바티 왕국(BC 312~AD 106)과 로마 제국이 페트라에 만들어 놓은 급수 시(Water Supply and Distribution System)(Dam)숫자와 크기, 저수장(Cistern) 숫자와 크기, 그리고 수로의 크기와 물이 수로를 따라 흐를 수 있는 속도 등을 종합적으로 측정하여 결과, 10 정도의 인구가 살 수 있는 급수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확인되었. 그러나 실제로는 나바티아 왕국과 로마제국 당시에 2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고, 또한 페트라 주변의 오아시스로부터 공급될 수 있는 물의 1일 최대 생산량인 1,087m³는 약 3만 명 정도의 인구에나 공급이 가능할 뿐이라는 탐사단의 종합적인 결론이었다. (참조: The Water Supply and Distribution System of the Nabataean City of Petra, BC300~AD300 Edomite, Charles  R. Ortloff, Cambridge Archeological Journal, 2005)

 

나바티 왕국 로마제 페트라급수시스 지도이다. 결과, 이러 수로시스템 만들개수 BC 300부터 AD300년까지시기였다. 빗물받기위 만들 수많 저수장 이채로운 , 물을 확보하는 문제가 최대의 과제였음을 수가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당시에는 강우량이 지금보다도 훨씬 많아 그들에게 필요한 물의 양을 충분히 제공하고도 남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 점과 또는 페트라 지역 밖에서 낙타 등의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물을 실어왔 있었다 고려 이다.

그러나 고대의 나바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 당시에도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 페트 외곽지역인 알-베이다, 아인 벱드베, 아인 무사, 아인 암몬, 아인 브락 등에 끌어들이위해 저수장, , 터널 및 수로 등을 만들어 급수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처럼 탁월한 급수 시스템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의 공급 가능 인구는 1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성기의 나바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 시대에도 약 2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을 뿐이고, 오늘날에 와서도 약 1만 사천 명 정도의 인구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 페트라와 같이 물의 확보가 쉽지 않은 험준한 산악 지역에서 2백만이 넘는 엄청난 인구가 38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보기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르는 것이다.

 

 

4. 고고학적으로 살펴본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

 

4.1 가데스 바네아

 

19세기에 들어와 페트라 가데 바네아로 없다부정적인 견해들이 확산됐. 출애굽 경로 가데스 네아라고 여겨지는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많은 학자가 참여했다. 그 대상은 시나이 반도 북동부를 중심으로 하여, 바란 광야, 광야, 네겝 광야와 사해 남쪽의 아라바 광야였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오아시스에 대한 광범위한 탐사 활동을 전개한 결과 다음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10군데 이상의 장소에 대해 가데스 바네아라는 주장이 나왔다.

 

 

가데스 바네아라고 주장하는 장소들을 보여주는 지도

 

가데 바네아라 주장하는 장소들로는 1831 라우머(Karl Von Raumer) 아라 광야하습(Ain Hasb), 1838 에드워 로빈(Edward Robinson) 아인 웨이베(Ain Weibeh), 1842 로우랜즈(John Rowlands) 광야 아인 카데이(Ain Qadeis), 1916 울리(Woolley)와 로렌스 (Lawrence) 풍부 쿠데이랏 (Ain Qudeirat) 가데 바네아라 발표했. 심지 누엘 벨리코프스키는 그의 저서 크고 두려운 광야(The Great and Terrible Wilderness)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Makkah) 가데스 바네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에서도 시나이(Sinai)반도의 북동부에 많은 오아시스들이 분포되어 있는 쿠세이마(Quseimah) 지방의 무웨일레(Ain el-Muweilleh), 아인 쿠세이마(Ain el-Quseimah), 쿠데(Ain el-Qudeirat), 카데이스(Ain el-Qadeis)의 지역을 통틀어 가데스 바네아라고 보는 공감대가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 성립되었고,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주장이 거의 정설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도 가데스 바네아는 지리적으로 바란 광야와 신 광야에 걸쳐 있음을 확인해주고 있고, 출애굽 당시 2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졌던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머물기 위해서는 광활한 지역과 풍부한 양의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문이다. 지방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 시켜주고 있으며, 특히 새롭게 밝혀지는 성서의 여러 지명과도 위치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

 

  한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자들 중 아인 쿠데이랏에서 3차례나 발굴 작업을 실시했던 루돌프 코헨(Rudolph Cohen) 박사가 1981년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지역에서 발견된 성채나 주거 흔적에 대한 연대 측정결과 모두가 기원전 1200이후의 것으로 밝혀졌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연대에 해당하는 유물이나 흔적을 하나도 찾지 못했으므로, 곳이  가데스 네아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1993년에 발표한 추가 자료에도 기원전 2000년에서 기원전 1000년대에 해당되는 어떠한 유적도 이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참조: Did I Excavate Kadesh-Barnea?, Ein el-Qudeirat, Difficulty of site identification and absence of Exodus remains poses problem, Rudolph Cohen, 1981 AD, and 1993b: 1126)

  

  그러나 루돌프 코헨 박사와 함께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핸드릭 부루인스(Handrick Bruins) 박사가 방사성탄소법(C-14)에 의한 출토된 세라믹(Ceramic) 유물의 측정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쿠데이랏 계곡에 있는 아인 쿠데이랏(쿠데이랏 샘)의 아래쪽 400m지점에서 회반죽으로 만든 세라믹 수로관을 발굴했다. 이 세라믹 수로관에 섞여 있는 목탄재(ash)의 미립자를 가지고 방사성탄소법(C-14)에 의한 연대측정을 하여 본 결과 중기 및 후기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 기원전 1673~1454년대의 유물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낮은 요새지역에서 발굴된 목탄재층(Layer of Ash)기원전 1210~105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참조: Ain el-Qudeirat and the Negev Highlands: 2nd Millennium B.C.E. , Hendrick Bruins, Israel Antiquities Authority, 2007)

  

  이처럼 중기 및 후기 청동기 시대에도 아인 쿠데이랏 계곡에 인류가 정착했던 사실이 입증되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출애굽 시기에도 뒷받침이 되어 아인 쿠데이랏 지방이 가데스 바네아라는 이론에 힘을 한층 더 실어준 것이. 나아가 방사성탄소법(C-14)에 의한 연대측정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것은 그 어떤 소재들보다도 세라믹 소재이다. 그러므로 핸드릭 부루인스 박사의 연대측정 결과에 보다 더 많은 신뢰가 간다. 따라서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는 이제 알-쿠세이마(아인 쿠데이랏, 아인 카데이스, 아인 무웨일레, 아인 쿠세이마) 지방으로 확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4.2 호르 산

 우선 성경에서 제공해 주는 호르 산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광야생활이 끝나가는 해인 40 1 월에 신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로 이동했다. 거기서 미리암이 죽었다. 에돔 접경의 신 광야에 있는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물 사건을 치뤘다. 에돔의 변방 모퉁이 신 광야에 있는 가데스 성읍에서 모세가 에돔 왕에게 그의 땅 통과를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가나안으로 가는 아다림 길로 에돔 접경에 있는 호르 산에 와서 진을 쳤다. 40 5 1일에 아론이 호르 산 정상으로 올라가 죽었고, 그를 위하여 온 회중이 30 일간 애곡했다. 한편 네겝 광야에 사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이 이스라엘이 자기를 치러 아다림 길로 올라오는 줄 알고 놀라서 이스라엘 사람 몇몇을 사로잡는 바람에 그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아랏 왕의 사람과 성읍들을 완전히 멸하고 호르마까지 쳤다. 그런데 에돔 왕이 그의 땅 통과를 거절해와, 호르 산에서 돌이켜 바란 광야의 홍해 길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신 광야 가데스의 성읍, 아다림 길, 호르 산, 모두는 에돔의 접경에 있다. 그리고 호르 산은 신 광야와 네겝 광야의 분기점에 있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12 명의 정탐꾼이 올라갔던 아다림 길을 통해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그리고 호르 산은 에돔의 큰길(왕의대로)로 진입하기 좋은 장소에 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정보와 가장 잘 어울리는 호르 산의 후보로 자발 마두라(Jabal Madurah/Jabal Madera)가 떠올랐다. 바란 광야, 신 광야 그리고 네겝 광야에 이르는 산들에 대한 탐사활동을 벌인 결과 몇몇 산에 대해 호르 산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그 중에서도 자발 마두라가 호르 산으로 가장 선호하게 된 것이다.

        자발 마두라는 가데스 바네아(쿠세이마)에서 북동쪽으로 24 km지점에 있고, 사해 남쪽 끝에서 남서쪽으로 40 km지점에 있다. 그리고 에돔, 신 광야, 가나안의 접경지점이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고, 에돔의 큰길(왕의대로)로 들어가기에 좋은 위치에 있다.

다음은 자발 마두라와 자발 하룬을 두 차례씩 답사하고 발표한 조지 로빈슨(Jeorge L. Robinson) 박사의 진짜 호르 산(Thr True Mount Hor)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간추려 올린다.

자발 마두라와 자발 하룬을 답사하고 비교분석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자발 마두라는 가데스 바네아, 신광야와 함께 에돔의 변경에 근접해 있다는 성경의 설명과 아주 잘 부합되고 있으나( 20:16), 자발 하룬은 명백하게 에돔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그렇지 못하다.

   자발 마두라는 산 주위가 넓은 광야로 둘러싸여 있어 어느 방향에서든지 접근이 용이하나, 자발 하룬은 가파른 산악지역이라 접근하기가 어렵다. 자발 하룬에서는 필요한 물의 공급을 와디 무사에 있는 샘들에서 받고 있다.

   만약에 에돔 왕이 그의 큰길(왕의대로)로 이스라엘이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그 길은 호르 산에서 아인 하습(Ain Hasb)의 오아시스 길로 따라가, 와디 달랄(Wadi Dhalal)의 골짜기를 지나고, 그리고 와디 달랄과 와디 부세이라(Wadi Buseirah) 사이의 길을 따라, 보스라 남쪽 약 3 km지점에 있는 아인 젤리데(Ain Jelideh) 오아시스를 통해 에돔 땅을 통과하는 가장 좋은 경로이다.    

   모세가 아론의 제사장복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는 모습과, 아론이 죽는 모습을 산 밑의 온 회중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자발 마두라이고, 자발 하룬은 산이 높아 불가능하다.

   네겝 광야의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이 이스라엘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놀라서 사건을 일으켰는데, 자발 마두라에서는 올라가는 방향이 사건내용과 일치하지만, 자발 하룬에서는 방향이 달라 아랏 왕이 놀라서 사건을 일으킬 이유가 전혀 없다.

   자발 마두라는 약속의 땅에 인접해 있어, 아마도 모세에게 느보 산 정상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가나안을 바라만 보게 한 것처럼, 아론에게도 자발 마두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게만 하신 것 같다. 그러나 자발 하룬은 너무 멀어 가나안을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하다.(참조: The True Mount of Hor, Professor George L. Robinson, 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The Biblical World, 2007)    

 

지금까지 검토해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호르 산의 위치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산이 자발 하룬이 아니라 자발 마두라임을 확인했다. 요세푸스 측의 그르친 판단에 의해 호르 산이 자발 하룬이라고 오랫동안 믿어 온 문제점도 확인했다. 다만 자발 마두라나 자발 하룬에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남긴 것으로 인정할만한 그 어떤 고고학적인 유물이나 흔적을 찾지는 못했다.

 

 

나가면서

 

가데스 바네아와 호르 산의 위치를 검토하는데, 중심단어들은 레겜, 가데스, 셀라, 페트라, 호르 산, 그리고 자발 하룬이었다. 가데스가 레겜이라는 기록은 아람어 성경인 탈굼 역본에서 확인되었고, 셀라가 페트라라는 기록은 라틴어 성경인 벌게이트 역본에서 확인되었다. 나아가 요세푸스 측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여겨지는 브에롯 브네야아간이 가데스 바네아이니까 가데스 바네아는 페트라라는 논리는 지나치게 인명과 지명의 의미에만 치중해서 합리화 시킨 결과였음도 검토해 보았다. 더욱이 페트라를 레겜과 연결시키기 위해, 출애굽 당시 모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미디안 왕 레겜을 끌어들여, 그가 페트라의 건설자이기 때문에, 페트라의 원래 이름이 레겜이었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한 것은 어떤 증거자료나 물증도 없이 지나치게 논리를 비약시킨 결과로 밖에 달리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가데스 바네아의 위치에 대한 정보와 많은 부분이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사해문서 4Q462에 레겜이 나오는데, 여기의 레겜이 페트라를 가리킨다는 글이  아직까지도 많은 종교관련 사전이나 종교관련 서적에 버젓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앞에서 밝혀 본 것처럼 레겜은 사해문서 4Q462에 대한 여러 역본 중에서 오직 한 역본에만 나타나 번역의 정확성에 대해서도 재고의 여지를 남겼다. 나아가 문서의 훼손이 심해 사라진 글자들이 많아 그 문장의 내용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4Q462의 레겜이 페트라를 가리킨다는 표현은 그 증거를 확인할 수가 없어 지나친 논리의 비약으로 판단되었다.

 

더욱이 페트라에 거주 가능한 인구의 검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페트라는 200 만이 넘는 인구를 가졌던 이스라엘이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물의 절대 부족으로 38년 동안 머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또한, 아론이 올라가 죽었다는 자발 하룬도 산이 높아 온 회중이 산 정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가 없고, 산 밑이 가파르고, 물을 조달하기 어려워 아론을 위해 30일간 머물며 애곡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다.

 

그리하여 19세기에 들어와 많은 학자와 탐험가들이 진짜 가데스 바네아를 찾기 위해 시나이 반도의 북동부 및 사해 남쪽의 아라바 광야 일대를 답사한 결과 10 곳 이상이 가데스 바네아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탐사와 발굴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장소로 떠오른 시나이 반도 북동부의 쿠세이마 지방에 분포된 4개의 오아시스(아인 쿠데이랏, 아인 쿠세이마, 아인 카데이스, 아인 무웨일레) 지역을 통틀어 가데스 바네아로 보자는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반면에 출애굽 당시 이 지방에 사람이 정착했던 흔적을 찾지 못해 일부 학자들이 부정적인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으나, 물이 가장 풍부한 아인 쿠데이랏의 계곡에서 출토된 세라믹 수로관에 섞여 있던 목탄재의 미립자를 방사성탄소법(C-14)에 의한 측정결과 중기 및 후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밝혀져 반대 입장에 있는 주장도 잠재웠다.

 

그리고 호르 산도 가데스 바네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발 마두라가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는 내용과 잘 어울리고, 지리적으로 아주 적합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학자가 선호하고 있는 것도 확인했다. 특히 요세푸스 측의 그르친 판단 때문에 전통적으로 호르 산이라고 믿어온 자발 하룬보다 자발 마두라가 훨씬 더 성경적이라는 사실도 한 몫을 더해주고 있다.

 

따라서 가데스 바네아는 페트라이고, 호르 산은 자발 하룬이라고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고정관념에서 이제는 벗어나, 더욱 더 성경적인 이론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 아닐까? 감히 소견을 피력해 본다.

 

 

글쓴날: 2015 9 1

글쓴이: 강훈기(康勳基)

연락처: +966-50-522-8137

이메일: allcomsa@hotmail.com

 

 

 

 Download pdf file:

가데스바네아와 호르산의 위치에 대한 고찰.pdf

 

  

참고문헌

 

Charles R. Ortloff, The Water Supply and Distribution System of the Nabataean City of Petra, BC300~AD300 Edomite, Cambridge Archeological Journal, 2005

 

E.M. Cook, Dead Sea Scrolls, 4Q462, Meditation on Israels History, 1996, London Harper Collins

 

Eusebius of Caesarea, onomasticon sacr. 286, 71. 145, 9; 228, 55. 287, 94

 

Eusebius, onomasticon, 46, 14-16/126, 19s./176,7s.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IV. 7, 1- 4, 7

 

Flavius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iv. IV, 82-83

 

George L. Robinson, The True Mount of Hor, McComick Theological Seminary, Chicago, The Biblical World, 2007

 

Hendrick Bruins, Ain el-Qudeirat and the Negev Highlands: 2nd Millennium B.C.E. , Israel Antiquities Authority, 2007

 

Rudolph Cohen, Did I Excavate Kadesh-Barnea?, Ein el-Qudeirat, Difficulty of site identification and absence of Exodus remains poses problem, 1981 AD, and 1993b: 1126

 

Saint Jerome's Hebrew Questions on Genesis, translated by C. T. R. Hayward, p 46, Gen 14:7, 1995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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