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찾아서|배태건
낭만 노숙 외 6편
글썽글썽 저를 뜯어내는 통기타 곁으로
어둠의 발길들이 멈춰 선다
기울어진 술잔처럼 엇박자 노래를 흘리는
허술한 몸짓
날개 접은 밤 비둘기도 구구구구 모여든다
가늘고 굵은 줄들이 퉁겨 뱉어내는 이야기
포개 얹은 종이박스 몇 장에 올라앉아
펄럭거리는 지폐 몇 장을 누르고 있다
온몸 터져라 긁어대는 밤의 집시여
가자, 낭만으로
텅텅 빈속을 채워 넣으며
길들도 기울어지는 곳
으슥한 도시의 한쪽을 갈아 끼우며
어디에든 틀어 앉으면 둥지가 된다
흐느적거리는 통기타를 향해 시집 한 권이 다가간다
머뭇머뭇 쓰다만 시의 행간에 끼워 넣은
지폐 한 장도 따라간다
새 이름을 붙이며 노숙의 밤이 몇 페이지 더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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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밤하늘
가지에 얹힌 가로 등불 골목 그득 일렁인다
어둠도 하늘하늘 봄바람에 얹혀 흔들린다
꽃자리 자리 자리에 펼쳐놓는 이름 하나
작은 입술 오물오물 봄 향 그득 조물조물
달무리 지던 그 밤 첫 순정 그리던 밤
목련꽃 터지는 봄밤이면 허공 가득 돋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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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는 저녁
길게 누운 그림자에서 국화 향이 흐른다
붉은 변주곡을 시작하는 서쪽 하늘
차가워질 계절에 햇살을 나누며 펼치는 시 한 수
물들어 가는 문장마다 눈이 아리다
사랑 때문에 울어 본 적 있냐고
떠나는 구름의 눈시울을 아냐고
익숙한 걸음을 붙들지 마라
발밑에 쌓이는 이별은 막을 길이 없다
한 구절 은유조차
깊은 곳에 숨어 나오길 주저하는 시간
이렇게 나란히 쓸쓸함이 쌓이는 자리
풍요의 계절은 모른다
쓸지 마라
너와 나의 이름자리
늦가을 저녁 창가엔 이미 겨울이 와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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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이 내다보는 한낮
북적거리는 재래시장
앞서가던 흰머리 남자 양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가 터진다
여기저기 흩어져 바닥에 나뒹구는 복숭아
두둑하게 잘 익은 복숭아
바닥에 부딪혀 금방 멍들고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내린다
은퇴 전 직장 조직에서 호령했을 법한 굳은 표정
나뒹구는 것들에 어쩔줄 몰라하며 복숭아를 줍는다
치매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인데
봉지가 왜 그리 잘 터지냐
중얼중얼 복숭아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쪼그려 마주 앉는 길손들
흠집이 좀 있으면 어때요
깊고 덜큰한 향이 좋은데요
복숭아를 주워 건네며
복숭아씨처럼 깊이 패인 남자의 세월을 다독인다
희뿌연 낮달이 내려다보는 한여름 낮
노포 오일장 맛집 간판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비둘기들이 날아들어 기웃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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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의 언어
황사가 새벽을 밀고 왔다
가뜩이나 먼 풍경의 산봉우리를 가리고
아침을 열어주던 파랑새는 기척이 없다
밤새 바람에 맞서다 꺾어진 마른 솔가지로
마당에 쪼그려 앉아 새를 그렸다
접었던 날개를 다시 펼쳐 그리고
눈동자를 그리고
부리를 그리려는 순간
머리 위 소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파랑새 한 마리가 소리친다
나뭇가지를 가만가만 흔들어 주던 바람결
맑은 햇살은 먼지 끝에 묻혀 가려지고
황사 바람이 부는 아침
소나무 가지 어디엔가 숨어 앉아
파랑새가 소리소리 멀어진다
네 희망은 그만 숨이 막혀 사라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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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이면
잠시 꽃그늘 아래에서
쏟아지는 꽃비의 황홀함에 젖어
세상을 까마득하게 잊어갈 때
문득 들려오는 소리
흐느낌을 쏟아내는 소리
피는 꽃만 꽃이더이까
지는 꽃만 꽃이더이까
이 세상 태어난 줄 모르게 태어나
이 세상 떠나는 줄 모르게 떠나는 이름들
몸살처럼 솟아오르는 가시도 있더이다
저릿한 몸 혼미하게 펼치고
솟구치는 이름들 받아 안는 바닥 날개
숲마다 언덕마다 꽃그늘을 키우는
꽃의 이면은 날개의 이면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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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보내온 낙서
스쳐 가는 바람에도 흩날렸지
이젠 소멸의 시간
흔들리던 생을 마감하고
물들이던 꿈도 떨어내고
다음 생을 예약해야지
부활을 위한 고요의 시간
누가 나를 들어 시편 갈피에 끼웠으니
나는 곧 부활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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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노트
몽상의 문학소년, 마침내 버킷리스트를 열다
한려수도 비경의 바닷길에 자리한 고향
좌이산 자락은 억겁의 세월 동안 귀를 쫑긋 세우고 자란만의 수려한 절경을 내다보고 있다.
잔잔한 초록빛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이 어우러진 백악기 시대의 흔적이 있는 고향에서 유년을 보냈다.
화려해 보이는 현대인의 이면에는 자본사회의 부산물인 도시의 환락과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의 고독이 내재 되어 있다.
복잡성과 모호성,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환경의 변화 속에서 불현듯 일상이 멈춰 서면 그리움 하나 가지 끝에 걸어둔 고향으로 달려가 좌이산 중턱에 오른다.
서로를 잊을까 봐 자란만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하나가 될 영감에 젖어 한 구절 한 구절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감정의 고달픔을 다스리고 새로운 향기와 생명을 담아 일상으로 복귀하며 내면을 다진다.
한낱 몽상이었을지 몰랐던 문학 소년의 꿈을 그리며 나이 들어 버킷리스트 반열에 올렸다
시를 접하면서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언어의 결을 찾도록 소중한 버팀목이 되어준 노마드 문우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하며 옆에서 끝까지 응원해준 아버지와 아내에게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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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경남 고성 출생.
-법학박사
-비케이 엔지니어링 주식회사 대표이사
-1979dr@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