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동(瓦洞)
-와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도 와동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安山郡) 잉화면(仍火面) 와상리(瓦上里)와 와하리(瓦下里)였다가 조선 말기 인화면(仁化面) 와상리와 와하리가 되었다. 1912년 2월 5일 와상리와 와하리를 통합해 와리(瓦里)로 개칭하였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始興郡)에 통합되었으며, 4월 1일 인화면이 수암면(秀岩面)으로 통합ㆍ개칭되어 시흥군 수암면 와리로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安山市) 와동(瓦洞)이 되었다.
와동은 기와를 굽던 기와골[瓦谷]에서 유래되었고, 신도시개발로 자연취락이 모두 폐동되어 대부분의 지역이 택지로 조성되었다.
• 가자골[佳才谷]
왜두둘기와 동작리 사이에 위치해 있던 마을이다. 마을의 지세가 아름다운 여자가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형국이므로 ‘가재골[佳才谷]’이라 불렀는데, 가자골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인조반정(1623) 후 압실에 살던 김류의 후손(순천김씨)들이 분가를 하면서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 후 파평윤씨 등이 세거해 모두 4호 남짓한 마을이었는데, 신도시개발로 1987년에 폐동해 원주민들은 대부분 와동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 광덕산(廣德山)
안산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산으로, 일명 부채산이라고도 불린다. 부채보살과 선비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며 광덕암이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해발 209m이다.
• 동장리(洞長里)•동작리(銅雀里)•방죽말[防築洞]
왜두둘기 북쪽에 있던 이 마을로, 본래는 가자골·새말까지 통칭해 ‘동작리’라 불렀다. 마을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마을 동북쪽에 있던 산(봉황산)이 풍수로 보아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처음에는 ‘공작리(孔雀里)’라 칭했다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동작리(銅雀里)’로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을이 길게 생겼으므로 ‘동장리(洞長里)’라 불렀다는 것이다. 마을 형성이 오래되고 규모가 컸던 마을로, 관련 기록들이 남아있는데, 1662년에 세운 <김여물신도비>에 김여물 장군을 동장리(洞長里)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 <고잔동 동계좌목>에도 동장리동(洞長里洞)에서 고잔동이 분동하였다고 적혀있다. 한말 문서에도 동장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동장리였다가 일제강점기 이후 변음되어 동작리가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 이 마을을 일컬어 일명 ‘방죽말[防築洞]’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조선 말엽에 이르러 마을 서쪽에 방죽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 방죽은 용동궁(龍洞宮) 소유로 내시(內侍)가 관리해 마을에서는 내시땅이라 불렀으며, 신도시개발 후 1989년에 강서고등학교가 들어섰다. 동작리에 최초로 세거한 성씨는 남양홍씨와 인동장씨였고, 그 후 전주이씨 등이 세거하였다. 폐동 때(1987)는 50여 호가 살았다.
• 뒷골[後谷]
압실 뒤에 위치해 있으므로 ‘뒷골[後谷]’이라 칭했으며, 일명 ‘멀미’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조선 말엽에 압실과 동작리에 살던 김해김씨, 인동장씨 등이 분가를 하면서부터 세거하기 시작했고, 폐동 전(1987)에는 4집이 있었다가 1989년에 안산운전면허시험장이 들어섰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을 전후해 길일을 택해서 광덕산 중턱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 봉황산(鳳凰山)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여 봉황산(鳳凰山)이라 불린다. 현재 강서고등학교 뒷산이다. 봉지산(鳳止山)이라고도 불렸다.
• 새말[新村]
큰고개 남쪽에 있었던 마을이 새말[新村]이다. 동작리에 살던 사람들이 분가를 하면서 새로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폐동 때(1987년)는 15호 남짓했고,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 압실[前村]
광덕산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압실[前村]' 또는 '압술’이라 불렀는데, 와동에서는 최초로 형성되었던 마을이라고 한다. 순흥안씨가 배판한 이래 여산송씨, 김해김씨, 순천김씨 등이 세거했다. 압실은 본래 순흥안씨 선대의 땅이었는데 인조반정(1623년)으로 김류 金瑬(1571~1648, 영의정)가 일등공신이 되자 순천김씨의 사패지(賜牌地)가 되었다고 한다. 31호가 살았던 압실은 마을 북쪽지역을 아랫말, 남쪽지역을 웃말, 아랫말 남쪽지역을 안터라 각각 불렀다.
1987년 신도시개발에 따라 폐동된 후 택지가 되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3일을 전후해 길일을 택해 광덕산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김류를 비롯해 김여물金汝岉(1548~1592, 의주목사), 김경징金慶徵(1589~1637, 강도검찰사), 김진표金震標(1614~1671, 돈령부도정), 김노득金魯得(여산군수) 등의 묘와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 있다.
• 왜두둘기[倭纛]
왜두둘기는 본래 압실에 속했던 마을로 압실과 동작리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을에 침입한 왜인(倭人)을 주민들이 합세해 두들겨 물리쳤다 하여 ‘왜두둘기[倭纛]' 또는 '왜둘기’란 지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임(林)씨가 배판한 이래 고성김씨, 안산김씨 등이 세거해 28호가 있었다가 1987년에 폐동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와동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마을에서는 마을 뒷산 중턱에서 해마다 음력 10월에 길일을 택해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 큰고개[大峴]
동작리 동쪽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 가자골에서 새말로 가자면 봉황산을 가로지르는 큰 고개를 넘어야 했으므로 이곳을 ‘큰고개’라 불렀다. 큰고개는 파평윤씨와 고성김씨 등이 세거해 모두 7집이 있었으나 1987년에 폐동된 후 현재는 택지로 조성되어 있다.
• 쪽다리
현 와동주민센터가 있는 곳 근처에 작은 개울이 있었고 쪽나무로 만든 다리가 있었다.
• 독남구지(동남구지)
지금의 화정천변에 배를 대고 동나무(나무묶음)을 싣던 곳이라는 설과 배에 싣기 위한 물을 담는 독을 묻어놓았던 곳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
• 중방모퉁이
봉황산에 있는 중바위 아래쪽 마을이름으로 중바위모퉁이의 변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