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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중에서 첫째 되는 계명에 대한 가르침(2)
마가복음 12장 28-34절/ 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마 22:34-40)
한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함으로 가진 대화
마태복음 22:23-33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묻는 부활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해 주셨는데,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소식은 곧 퍼져 바리새인들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율법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사두개인들과 가진 변론에서 올바르고 합당하게 대답하셨음을 알고는 예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에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사가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답을 잘 하신 것을 알고는 음해할 목적으로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께 나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자, 이를 들은 율법사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의미를 깨닫고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돌이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고백함에 있는 것을 기록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 말씀이 있자 율법사가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1)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신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2)저는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사는 먼저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고 그분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진정 옳다며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고 다만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율법의 오경과 시편과 모든 선지자의 글인 구약성경이 증거하며 가르치는 것의 핵심인 하나님을 사랑할 것에 있을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데 따른 것입니다. 그는 참된 신으로서 유일하신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구약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은 유일(唯一)하신 분인 오직 한 분뿐이심을 증거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을 그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과연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며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대답은 오직 참된 신이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데, 그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써 하나님께 가진 믿음을 행하여 보이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뜻을 실행하시고 실현하시는 것으로 나타나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 그 품으신 뜻을 그로 하여금 좇게 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이어서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말입니다. 그의 이러한 말은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한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삼상 13, 15장). (1)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블레셋 족속이 3천 대의 전차를 6천 명의 기마병들이 몰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는 군사들이 쳐들어와 몰려왔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공을 받자 벧아웬의 동쪽 믹마스에 진을 치고 대치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는데, 블레셋의 엄청난 위세에 눌려 길갈에 남아 있으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사울 왕은 어떻게 전쟁에 임하여 블레셋을 물리쳐야 할지를 몰라 크게 당황하고 다급한 나머지 사무엘이 7일 동안 길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이 직접 제사장 노릇을 하여 번제와 화목제에 쓸 제물을 가져오게 하여 자기 손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자 막 도착하여 이를 본 사무엘이 그의 망령된 행실을 크게 꾸짖으며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습니다. (2)이렇게 책망을 받은 사울 왕이나, 후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진행을 막으며 괴롭혔던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되 남자와 여자와 젖먹이, 소와 양, 낙타와 나귀 가릴 것 없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할 것을 말씀하심으로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 때 또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악한 죄에 있었습니다. 사울이 겐 족속을 아말렉 족속에게서 빠져나오게 하여 살리고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과 함께 양 떼와 소 떼 중에서 기름지고 살찐 것은 살려 남겨두고 대신에 여위고 보잘 것 없는 짐승만 죽임으로써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죄를 또 다시 저지른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아말렉 족속에게서 빼앗은 떼와 소 떼를 끌고 오는 사울을 만났을 때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기 위하여 가장 좋은 양과 소를 살려 남겨두고 끌고 왔다"고 하는 그에게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운 것은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기 위한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명령을 불순종하여 어겨 아각 왕을 살려주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짐승을 살려두었다고 하니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 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보다 더 좋은 제물이 없을 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에 있는 것은 점쟁이의 속임수와 같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기름지고 살찐 양과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깨달은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6-17).
율법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성전 제단에 바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은 한 율법사
예수께서는 한 율법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해하고서 지혜 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는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는 바리새파의 사람으로서 비록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로 율법의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만,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옳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이렇게 옳게 알고 있는 것을 대답함으로 예수님은 그 대답을 인정하여 받아들이시는 것에서 그가“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영생을 얻기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곧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를 이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다는 정도로 이야기 하신 것은 왜인지요.
그것은 그가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의 강령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주로 섬겨 따름에 있지는 못하여 아직은 그가 알고 있는 율법의 충족에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성전 제단에 바치는 어떤 제물 제물보다도 더 낫습니다. 그런데 모든 계명을 대표하는 율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계명으로 주신 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으려면 그 이전에 사랑해 왔던 모든 것을 부인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하나님만 사랑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이외의 것은 모두 미워함에 있어야 하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위하는 모든 것을 미워함에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재물을 미워하면서 살 수 있는 자가 있는지요. 재물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를 위함에 있는 육을 부정함에 있는 것인데, 과연 자기를 위함에 있는 육을 부정하면서 살 수 있는가요. 우리 육이 희노애락 할 수 있는 재물 등 세상의 온갖 것을 내버릴 자가 있으며, 내버린다면 어느 정도 내버릴 수 있을까요?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여야 합니다. 그러니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땅엣 것은 바라보지 말라는 데(골 3:2), 땅엣 것 그 어느 것도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요? 땅엣 것 실컷 바라보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살고 싶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능하지도 않은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신 것인지요. 사람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명령으로 받아 순종하여 지켜 나가는 것에 온전하지 못하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한도의 선에 이르게 되면 지치고 힘겨워하며 원망과 불평을 토로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하신 본의는 이것이 끝없이 요구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실상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한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전 제단에 바치는 그 어떤 제물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기의 마음, 목숨, 생각, 힘을 미워하고, 자기를 위하는 사랑을 버리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율법사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기에 율법의 의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외에 또 다른 의인 하나님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으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실 것이다”(참조, 롬 5:8)라고 사도 바울이 깨달은 깨달음에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전 제단에 바치는 그 어떤 제물보다 더 낫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받아들여 따르는 믿음에는 있지를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의 ‘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대답을 한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그러니 네가 옳게 알고 있는 대로 행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눅 10:28)라고 해 주시는 말씀을 들었으나,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영접하여 따르는 믿음에 있지 못하므로 주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복의 선언을 받기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인인 성도는 예수님과 한 율법사 간에 오고 간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며, 그 사랑을 입고, 그 사랑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인 하나님과 원수 되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때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로 날마다 입고 있는 그 사랑으로 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기회를 가져나간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과 똑같이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으로 해나간 것으로 그리스도가 베푸신 사랑으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또한 이웃을 사랑한 그 사랑이 비록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사랑에 견줄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미미한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신 그 받아들이심으로 우리 또한 받아들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모자람이 없는 온전한 사랑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와 같이 이웃도 자기 몸을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말해지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 실행이 되고 있는지를 우리가 섬기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또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관심을 가지고 봄에 있으며,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고 있는 사랑이 있기에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행해지는 지를 여실히 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에 있으며 또한 우리 믿음의 형제와 하나 된 몸에 있는 교회입니다. (*)
*2021. 11. 14. 주일예배. 본 글은 게시판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490번 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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