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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낭군님은 일찍이 저에게 정표를 받은 후, 삼년 전 북쪽의 어느 고장에서 매우 어려운 일을 겪으신 바 있습니다. 한 여인이 이분과 혼인할 수 없으면 자결하겠노라고 말하며,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은장도를 빼들고 강짜를 부리자, 천성이 어질고 착한 저의 낭군님은 모진 마음을 먹지 못하고, 그녀가 죽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그만 실수로, 그녀에게도 한마디 말로써 혼인을 약속하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장내가 잠시 소란하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하지만 애달픈 일은 그게 아닙니다. 얼마 전 저는, 믿을 만한 지인으로부터 매우 정확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의 낭군님과 혼약을 맺은 그녀가, 중병을 앓다가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입니다.”
그녀는 다물을 흘낏 바라본 후 덧붙여 말했다.
“제가 이 슬프고도 안타까운 사건을 토로하는 이유는, 낭군께 저의 황금환화를 달아드리기 전 먼저, 여러분과 함께 그녀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그녀의 명복을 빌어, 그녀가 원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매아리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장내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 좋은 날, 슬픈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매아리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다.
다물은 매아리의 말을 듣고 가슴이 떨릴 정도로 놀랐다. 순간적으로, 삼삼촌 여인의 당돌하고도 어여쁜 얼굴과, 그녀가 은장도를 빼들고 자결 소동을 벌이던 그 날의 광경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매아리는 말을 마친 후, 물에 촉촉이 젖은 눈빛으로 다물에게 정이 가득한 웃음을 던졌다.
“어서 황금환화를 제게 주세요!”
뭇 사람들은 그녀의 가녀린 미소에 애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
다물이 잠시 망설이다가 얼떨결에 품에서 황금환화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황금환화를 높이 쳐들고 외쳤다.
“여러분, 부러우시죠?”
그녀가 대담하게도 청중을 향해 물었다.
“암, 그렇고말고요!”
몇 사람이 대답한다.
젊은 남자들 가운데는 확실히 다물을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노골적으로 질투와 분노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그 때 회중석으로부터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잠깐만요!”
사람들이 일제히 바라보니, 자리에서 일어나 우뚝 서있는, 한 준수한 귀공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는 오늘 이 자리가 매아리 아가씨의 생일축하연이라고 알고, 불원천리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약혼식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초대장에 암시조차 없었습니다. 그건, 우리를 속이고 멸시하는 처사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자리라면,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소이다.”
그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다물이 헛기침을 하며 매아리에게 말했다.
“아가씨,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다물의 입을 막으려는 듯 소리높이 외쳤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기 오신 모든 총각 분들이 오늘 공평한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춘 후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주시한다.
“저와 혼인할 수 있는 기회를!”
그녀가 명료하게 말했다.
그 순간, 장내는 물을 끼얹듯 조용해졌다가, 이내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여?”
“여러분, 잠깐 귀를 기울여 주세요. 저는 이 공자님을 저의 낭군으로 삼았지만 아직 혼약을 선언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만인 앞에 공평한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여러분께서 누구든지 저와 혼인하고 싶다면, 이 공자님과 무예를 겨루어 이기십시오. 이 공자님을 이기는 사람에게, 제 손에 들린 황금환화를 제가 직접 달아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명실 공히 저의 신랑님이 되실 겁니다!”
장내가 다시 술렁거린다. 매아리가 손을 저어 군중을 진정시키고 말했다.
“지금까지 불민한 이 소녀에게, 송구스럽게도 지체 높은 명문가의 금옥金玉같은 자제분들께서 숱하게 청혼해 오셨습니다. 그 와중에서 한편으로는, 소녀 매아리가 기생오라비 같은 가면을 쓴, 한낱 떠돌이 사기꾼의 꼬임에 빠져 미치고 말았다는 소문이, 지난 수년 간 제 가슴을 무척 아프게 한 것도 사실입니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매아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이어진다.
“그 풍문의 사실 여부를 오늘 만인 앞에서 가리고 싶습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청천백일 하에 그 떠돌이 사기꾼의 가면을 벗겨 그의 추한 얼굴을 드러내고, 즉석에서 새로운 낭군을 모시려 합니다.”
무리가 다시 술렁거렸다.
“이 공자님과 손발이나 무기를 맞추어 보고 싶은 명문자제들께서는 서슴지 말고 나오십시오.”
그 때 누군가가 자리에서 일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군중의 눈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매아리가 보니, 그는 수년 전부터 자신의 집으로 집요하게 혼담을 걸어왔던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
“네 공자님, 말씀하세요.”
“무예 하나만으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귀공의 뜻은?”
“무예시합과 아울러, 명시名詩암송, 질의응답 대결을 원합니다.”
“좀 애매한 방식들이군요. 좌우간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방식 중 어느 하나를 도전자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고, 시합은 시간 관계상 단 한 차례로 한정하되, 비기거나 패자敗者가 승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재 시합이 있겠습니다.”
그녀는 청중을 둘러보며 외쳤다.
“원하시는 분은 누구든 나오십시오. 단,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기는 분은 약속대로 저와 약혼하게 되고, 지는 분은 오늘 하루만 저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장내는 재차 고요해진다. 서로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훑어보았지만, 섣불리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소인이 불민하지만, 한번 그 공자와 겨루어보겠소!”
한 건장한 털보 청년이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 여러 젊은이들이 앞을 다투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십여 명이 넘었다. 방금 전에, 약혼식인 줄 전혀 몰랐다며 불평을 토로하던 그 귀공자와, 질의응답 대결을 제안했던 인물도 대열에 끼어 있다.
“네! 공자님들은 참으로 용기가 대단하십니다. 저는 용기있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옛말에도 미녀는 용기있는 남자가 얻는다고 했듯이, 오늘 여러분이 마음껏 기량을 발휘해 보십시오. 자, 어느 분이 먼저 이분 공자님과 겨루시겠습니까?”
“내가 먼저 겨루어 보겠소.”
맨 처음에 나섰던 털보 청년이었다.
“혹시 공자님은 남해 보배섬(진도)의, 신전神箭이라는 별명을 지닌 마량磨良공자님이 아니신지요?”
“아, 아가씨께서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그 위명이 쟁쟁한 신전 공자님을 여기에서 모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함께 올라온 젊은이들도 모두 놀랐다. 보배섬의 신전 마량이라면, 일찍이 남평양(평양)에서 열렸던 막조선의 국중國中활쏘기 대회에서 일등을 한 명궁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무엇으로 겨루기 원합니까?”
“활로 겨루고 싶소.”
“다물 공자님도 동의하시는가요?”
“저도 찬성입니다.”
“그러면, 장소 관계상 삼백 척 앞에 과녁을 정해놓고, 각각 화살 열 개를 날리기로 하면 어떨까요? 과녁의 중앙을 정확히, 다수 맞추는 자가 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혹시 두 분은 이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드디어 과녁이 마련되고 다물과 마량 두 사람은 활과 살을 들고 섰다. 먼저 다물부터 열 발을 날린다.
화살이 과녁에 꽂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사람들은 고전告傳꾼들(명중여부를 알려주는 자들)의 “명중이오!”이라는 외침을 들을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열 발이 죄다 중앙 세치 둘레 안에 박혔다.
마량도 열 발을 모두 보기 좋게 명중시켰다.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화살로는 승부를 정하기 어려우니, 다른 방안을 선택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젠 무엇으로 겨루기 원합니까?”
매아리가 마량에게 물었다.
“명시名詩암송으로 겨루어보고 싶소. 한 구절을 읊으면 바로 그 뒤의 구절을 대는 식이오.”
매아리가 동의를 구하려는 듯, 다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물이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이 무대 위에 올라섰다. 다물은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마량을 맞이했다. 먼저 보배섬의 마량이 입을 열었다.
섬섬纖纖/島島이 보배로고, 다도多島야 몇이런가
다물이 빙긋 웃으며 즉시 대구를 이었다.
옥수玉手가 보배로고, 점점이 알이로다.
마량의 목소리가 낭랑해지는 만큼, 다물의 대구도 여지없이 줄달음친다.
하늘 가 아득한 데 외로이 떠 있으니
이리저리 꿰어서 하나로 이어지고.
이 시는 옥도玉島와 수도手島(눌옥도)라는 두 섬에 서로 떨어져 살아가던 연인이, 함께 만나 지었다는 노래다. 두 남녀는 서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첫눈에 완전히 반해버렸으나, 서로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단 둘이서 만났을 때, 남성이 옥 같이 영롱한 그녀의 손가락을 칭찬하다가 먼 바다로 눈을 들어 섬들을 바라보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읊었다.
“섬섬이 보배로고, 다도야 몇이런가”
첫 낱말 “섬섬이”는 섬들을 뜻함과 동시 “섬섬옥수”의 “섬섬”을 내포하고 있다. 이중적 의미를 담은 일종의 언어유희다.
표면적으로 이 시구는 보배로운 섬들이 몇 개나 되겠느냐는 물음이지만, 이면적으로 여인의 옥 같은 손가락을 칭찬한 것이다. 여인은 가슴이 뛰어 상기된 볼로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읊는다.
“옥수가 보배로고 점점이 알이로다.”
이 구절은, 옥도와 수도(눌옥도)를 포함해,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모두 보배로운 구슬들과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여인이 자신의 섬섬옥수의 보배로움을 암시한 것이다.
남성은 곧 “하늘 가 아득한 데 외로이 떠 있으니”라는 말로, 섬들이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는 정황에 빗대어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하고, 여인은 뒤질세라, 섬들이 그렇게 외롭다면 마치 구슬을 꿰듯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노래한다. “이리저리 꿰어서 하나로 이어지고.”
시종일관 이 시는 보배로운 섬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두 남녀의 외로움과 하나 됨에의 갈망을 암시하고 있다.
동떨어진 두 섬에 살면서, 이 시구로써 서로의 외로움과 사랑을 확인한 선남선녀는 마침내 혼인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다.
이번에는 다물이 새로운 시를 읊기 시작했다. 왕문문시王文文詩(한자시)다. 마량도 거침없이 노래 부르듯 대구를 이었다.
山有花也山有花 산유화야산유화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있네)
年年又種千千樹 연연우종천천수 (해마다 심고심어 백만 그루 되었지)
春來不咸滿開紅 춘래불함만개홍 (불함에 봄이 오니 온 산에 붉은 빛)
好事天神樂太平 호사천신낙태평 (좋을시고 하나님 섬겨 태평을 누려보세)
마량이 곧 이어 역시 왕문문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어진 다물의 대구도 물 흐르는 듯했다.
神市桓雄朝天池 신시환웅조천지 (신시의 환웅님, 하나님 뵈온 연못)
檀君開天聖白山 단군개천성백산 (단군임금 개국한 성스런 백두산)
天孫萬代起耕土 천손만대기경토 (하늘 자손 만대에 강토를 일구어)
享樂別天如日月 향락별천여일월 (하늘 같은 즐거움 세세토록 누리세)
이 노래는 앞의 “산유화”처럼 매우 단순하지만, 네 구절에 모두 하늘 “天천” 자가 들어가고, 각 행의 마지막 글자가 물, 산, 흙, 달 등 대자연을 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유사 음으로 운율을 맞춘 게 아니라, 자연 물질로 운율에 대치시켰다.
다물이 이번에는 한글 시를 음송했다.
“이고리 저고리 색동저고리, 가을 물에 어여쁜 태 비칠 듯 말 듯”
음송 후 다물이 마량의 입을 응시한다. 마량의 표정이 어둡다.
“······.”
마량은 끝내 입을 열지 못한다.
매아리가 미묘한 웃음을 던지며 다물에게 요청했다.
“공자님, 나머지 행도 마저 읊어주실 수 있나요?”
다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량에게 양해를 구한 후 처음부터 다시 음송했다.
이고리 저고리 색동저고리, 가을 물에 어여쁜 태 비칠 듯 말 듯
이고리 저고리 색동옷 두른, 가을 달이 구름 속에 보일 듯 말 듯
어진 님 기다려 고운 차림에, 연지곤지 찍고서 웃을 듯 말 듯
임 그려 밤바람이 산들거릴 때, 앵도櫻桃 같은 입술은 열릴 듯 말 듯
이 시는, 사랑하는 낭군을 먼 길로 떠나보낸 어여쁜 새색시가 서방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해맑은 가을 달밤, 집 앞의 연못가에 나와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광경이다.
여인의 색동옷은 여러 고리를 두르고 있고, 가을 만월도 기이한 달무리 무지개를 색동옷처럼 두르고 있다. 여인은 행여나 오늘 밤 신랑께서 오시려나 그리운 마음에 연지곤지 찍어 곱게 단장하고 사모함이 그득한 표정으로 먼 산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본다.
시 속의 여인처럼 애틋한 연모의 정 가득 실은 완산일매 매아리의 눈길은, 시를 읊고 있는 다물의 얼굴에 두 줄기 화살처럼 날아가 꽂혀 있었다.
다물의 시 낭송이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소리 요란하고, 마량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매아리는 박수에 퍼뜩 깨어난 듯 마량을 향해 물었다.
“약속대로, 오늘 하루 저의 종이 되시는 거죠?”
“남아일언 중천금이오. 아가씨의 종이 되겠소.”
“호호호! 고맙고 용기가 가상해요. 공자님은 진정한 대장부예요. 그럼 저쪽에 가서 대기하시고 다음 분 오세요.”
또 한 사람이 호기있게 나선다.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검으로 겨룰 건가요?”
“그렇소!”
하지만 그도 역시 몇 합을 견디지 못하고 칼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무예겨루기를 신청했다가 모두 다물에게 패했다. 그 중에, 앞서 매아리에게 불만을 토로한 귀공자, 그리고 명시암송에 질의응답 대결을 제의한 젊은 선비는 다물과 구두로 대결을 벌였으나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을 때 말문이 막혔다.
마지막으로, 몸이 호리호리하고 점잖게 생긴 스물 서너 살의 군자 풍 청년이 손에 부채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온다.
“공자님은 어떤 방식을 원하십니까?”
“나도 이 분 공자와 질의응답 대결을 벌이고 싶소. 하지만 미리 말해 둘 것이 있소.”
“······?”
“난 결코 아가씨와 혼인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올라온 게 아니오. 다만 아가씨의 호언장담을 듣고, 과연 아가씨의 낭군이 그토록 빼어난 인물인지 알고 싶었소. 또 명사고제名師高弟의 학식을 듣고 싶어서 겸손히 배움을 청할 따름이오.”
“아, 참으로 존경스런 태도이군요. 그럼 공자님은 설사 이기더라도 이분에게 저를 양보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매아리가 다물에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다물이 속으로 언짢았지만, 정중하게 절하며 찬의를 표했다. 부채를 든 젊은 선비는 가볍게 목례한 후 다물에게, 군중이 모두 다 들을 수 있는 낭랑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환웅임금께서 말씀하신, ‘일신강충 성통공완 재세이화 홍익인간 一神降衷 性通功完 在世理化 弘益人間’이라는 열여섯 글자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시오.”
이건 스승님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가 아닌가. 다물이 빙그레 웃으며 간략히 설명했다. 이번은 다물이 물을 차례다.
“방금 전 매아리 아가씨가 노래를 부를 때 사용한 심법心法이 무엇이며, 그 심법의 파쇄법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시오.”
“미혼술이라 하며, 파쇄법은 신심태법神心太法이오.”
그는 방금 전과 달리 다물만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아리와 그의 일당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인 듯했다. 이 선비는 확실히 학식이 탁월한 인물인 것 같았다. 매아리의 미혼술을 간파하고 그 파쇄법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자는 다물에게 덧붙여 물었다.
“신심태법을 연마할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점, 세 가지 정도를 들라고 하면?”
“간절함과 마음의 집중, 그리고 지속성이오.”
대답과 동시 다물이 그 공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신심태법이 호흡과 맥박으로 체화되었을 때, 심령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들을 열거해보시오.”
이에 공자도 대답 후 되묻는다.
“희락, 평안, 안식, 자유자재, 진리, 빛, 힘 등이오. 신심태법의 최고봉은 어디요?”
“신神의 존안尊顔을 혼백의 눈으로 친견親見하는 거요. 귀공은 신의 존안을 친견했으리라 믿으오. 그 존안의 생김새를 설명해보시오.”
다물의 요구에, 군자 풍 공자는 아연 긴장하며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붓으로 그릴 수도 없고 사람의 언어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오.”
그는 한 차례 헛기침을 하며 다물에게 물었다.
“귀공은 신향神鄕(천국)의 세 가지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아오?”
“소리, 빛, 그리고 사랑이오. 이것은 삼신일체 하나님의 삼대三大특성이기도 하오. 삼일신三一神의 세 특성을 왕문문 한 글자로 표현하면 거룩할 성聖이오. 또 삼신일체 하나님 가운데, 장차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분을 가리켜 태일太一이라 한다 했소.”
다물이 지식을 자랑하듯 이것저것 나열하다가 마지막으로 물음을 제시했다.
“태일 하나님은 언제 어느 곳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오?”
“······.”
선비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가 되묻는다.
“당신은 그걸 아오?”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아마도 서역西域에서 태어나실 것이오.”
시합은 단시간에 끝났다. 매아리가 다물과 겨룬 선비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약속대로 오늘 하루 저의 종이 되는 거죠?”
젊은이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제자리로 들어가고 난 후, 매아리가 청중에게 낭랑하게 외쳤다.
“여러 영웅호걸, 열녀현모들께서 보셨다시피, 저의 낭군은 인품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무예와 학문까지 아주 뛰어난 천하의 영재입니다. 혹시 도전하실 분이 또 없습니까?”
고요한 장내에 봄바람만 살랑거린다.
“그럼, 이제 저의 낭군님 가슴에 제가 어릴 적부터 애지중지 간수해오던 저의 정표, 황금환화를 달아드리겠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혼약을 만인 앞에 공표합니다.”
다물이 머뭇거릴 때 매아리가 방긋 웃으며 다가가 다물의 옷깃에 황금환화를 정성스럽게 달았다. 그 동안 내내 다물은 어벙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다.
좌중에서 우레 같은 박수와 환호성, 휘파람 소리가 터져 나오고 일각에서는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에게 다시 술과 음식이 분배되고 악사들과 무희들의 공연이 재개되었다.
이 모든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낱낱이 지켜보던 완산관아의 총군 광중행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그의 육체와 영혼이 동시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있었다.
매아리라는 한 아리따운 여인의 자태는 벌써 그의 내면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짙게 착색되어 있었다. 광중행의 얼 속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던 매아리의 체취는, 시간이 흐르자 마침내 그의 내부에서 가장 높은 자리, 제왕의 자리에 올라앉고 말았다. 그런 지경에 이르기까지 광중행은 아무런 제지 없이 마음의 침방을 그녀에게 내주고 있었다. 아니 이따금씩 저항했지만 그녀의 공격은 불가항력이었다.
천하의 영웅으로 자처하며 호수 남북을 종횡무진 누빌 때 적수다운 적수를 만나지 못했던 광중행이, 일개 아녀자에게 패배해 그녀의 포로가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까마득하게 몰랐었다. 무예라면 그도 자신이 있었으나, 이건 몸싸움이 아니라 마음의 투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매아리 생일잔치에서 그는 목격했다. 일찍이 자신의 궁전을 점령한 매아리가, 그 궁실 안에 텅 빈 자취만을 남긴 채, 자신을 병들어 버림받은 노예처럼 내팽개치고, 다른 남성에게로 이토록 쉽게, 이토록 허무하게, 영원히 떠나가 버리는 것을.
세 해 전에 사해제일관에서 그녀를 만나 첫눈에 아주 가버린 후, 그 동안 여러 차례 조우하면서 광중행 자신의 방식대로 그녀와 사귀며 남몰래 정을 키워온 것이, 이제는 그의 가슴에 크나큰 후회와 자책, 통곡의 구렁텅이를 파놓고 말았다.
그러나 누가 알까? 다른 한 여인의 고독과 무너져 내림을.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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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1. 8. 12. 더우나가을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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