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누나! 를 외치며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누나의 체온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작은 누나는 이렇게 스물여덟의 짧은 인생을 마감하고 저세상으로 영원히 떠나갔다. 나는 목을 놓아 울었다. 죽었다는 사실이 슬픈 것이 아니었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세상을 오래 살거나 일찍 가거나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슬퍼하는 것은 누나의 살아온 과정이 너무 불행하였고 또 내가 살아오면서 누나에게 지은 죄가 많은데 이제 그것을 갚을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죄를 지었지만 남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큰 죄를 지은 것은 없다. 하지만 누나에 대해서는 나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누나를 누나로서 대접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어머니의 사랑은 독차지 하면서 누나를 동생보다 못하게 취급하고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누나가 몹쓸 병을 얻어 고생한 것은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나는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착하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아 나는 가증스런 위선자임을 고백하노니 돌로 나를 쳐서 응징을 해다오”…
군대에 있으면서 많이 뉘우치고 “이제는 누나에게 잘해주어야지”라고 굳게 마음 먹었는데 그럴 기회도 없이 누나는 내 곁을 영영 떠나버리고 말았다. 누나의 사망소식에도 가까운 친척 외에는 찾아올 사람이 없었으므로 다음 날 의사의 확인을 받고 바로 장례를 치렀다. 교회에서 목사님을 비롯한 신도 여러 명이 와서 기도와 찬송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누나가 병을 앓은 이후 어머니가 교회를 나가기는 했지만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집에 찾아와 시신 운구에서부터 화장에 이르기까지 궂은일을 기꺼이 도와주는 그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기독교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초상이 난 것을 보고 부정 탄다고 마당에 소금을 뿌리는 바로 옆집 아주머니의 태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누나의 시신은 당감동 화장장에서 한줌의 재로 변하여 뒷산에 뿌려졌다. 작은누나의 장례를 치르고 슬픔에 잠겨있는 중에 총무처에서는 나를 문교부로 (임용)추천하였다는 통지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곧 이어 경상남도교육감으로부터 채용신체검사서 등 임용준비서류를 작성하여 8월1일까지 가지고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기다리던 발령통지가 왔지만 나는 경황이 없어 아무 기쁨도 느끼지 못하였다. 문교부로 추천되었는데 왜 경상남도교육감이 오라고 하는지도 따지지 않았다. 임용후보자등록 때 채용신체검사서를 이미 제출하였음에도 또 다시 제출하라고 하는데 대해서 의문이 생겼으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통지공문에 있는 대로 채용신체검사서를 발급받기위해 부산시립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다음날 검사서를 받으러가자 담당의사는 결과에 이상이 있다는 암시를 하며 몇 가지 검사를 다시하자고 하였다. 재검 결과에 따라 흉부엑스선도 직접촬영으로 다시 한번 찍어보자고 하였다.
혈액검사용 피를 다시 뽑은 다음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신체검사에 이상이 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군대에서 건강한 몸으로 3년간 충성하고 제대한지가 1년여 밖에 안 되었고 불과 9개월 전에 같은 곳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상이 생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국가에서 혹시 나를 떨어뜨리려고 일부러 병원과 짜고서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어떻게 해서 얻은 공무원시험합격인데 발령을 눈앞에 두고 신체검사불합격으로 임용이 좌절된단 말인가? 나는 그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민한 끝에 다음날 병원에 갈 때에 친구를 데리고 갔다. 엑스선촬영을 다시 할 때 친구를 대신 들여보낼 생각이었다. 만약 그것도 안 되면 신체검사서를 위조할 생각도 했다. 형법을 보니 공문서위조죄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징역이 아니라 사형이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떨어진다면 억울해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내 눈에는 독기가 가득하였다. 담당자는 혈액검사 재검 결과도 역시 이상이 있다고 하면서 내과의사를 한번 만나보라고 하였다. 내과의사는 나에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폐에 이상이 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전문병원에 가서 반드시 검사를 다시 해보라고 당부하였다.
내과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신체검사실로 다시 갔더니 담당자는 의논을 한 다음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휴게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머리에 쇠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가해지면서 지난겨울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지난겨울 가슴에 참기 어려운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감기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기침을 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폐병이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였다. 특별한 감기몸살로 생각하고 약국에서 감기약을 지어먹고 끝냈다. 그런데 그것이 말로만 듣던 폐병이었다니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신체검사 사무실에서는 담당의사와 간호사들이 모여 오랫동안 갑론을박하며 논쟁을 벌이는 것 같더니 30분이 훨씬 지나서야 문을 열고 나를 불렀다. 담당자는 얼굴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합격이 표시된 채용신체검사서를 나에게 주었다. 치료 잘 받으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신체검사서 ‘흉부X선’란에는 ‘폐결핵 경증 활동성 미정’이라는 애매한 말이 적혀있었다. 나를 구제해주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며칠 후 전문병원에서 검사한 결과는 ‘폐결핵 중등도’였으며, 이것은 공무원채용신체검사규정상 불합격 판정기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당시 신체검사 담당의사와 간호사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 엄격히 따지면 그들은 나를 구제하기 위해 법을 어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융통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만약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나의 공직생활은 폐결핵 투병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