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악몽
(11) 모스크바에서의 새해 첫날 (1994.1.1.(토) 흐림.)
1994년 새해 첫날이 밝았지만 특유의 찌푸린 날씨가 창밖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많은 돈들이고 머나먼 모스크바까지 와 대사관에 가서 상의를 했건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나보고 해결하라고 한다. 그래서 인맥을 통해 외무성 관리를 만나 부탁해보기로 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런 일이 처음이라 제대로 처리를 못해서인가 별 진척이 없다 보니 해가 바뀌어 새해 첫날이 되어도 별다른 감흥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다. 밤새 러시아인들이 송년회 소리가 들리더니 아침이 되니 조용해졌다.
94년 새해, 사할린 한국 교육원장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시작하는 첫해라 잘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졌지만 전망이 좋은 편이 아니라 씁쓸하기만 하다. 오기 전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힘든 나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정말 힘든 나라다.
집주인 여(呂) 선생은 아침 식사 후 딸 여주와 아들 동욱이를 데리고 사진 찍는다고 거리로 나서기에 따라나섰다. 집 근처 마이 곱스 지역 그리고 푸 스킨 역을 지나 조금 가니 바로 크레므린 궁이었다. 여선생 집이 이렇게 중심부에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죽 걸어서 인투리스트, 모스크바야 호텔 등을 지나 항상 사람들이 붐비는 굼백화점과 멀리 볼쇼이 극장을 보면서 백화점 옆 붉은 광장에 섰다. 크레므린 궁 앞 붉은 광장, 감회가 남달랐다. 아마 6.25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6.25가 언급될 때마다 북한이 언급되고 그리고 종주국인 소련이 언급되면서 나오던 곳이 아니던가.
그 당시 공산주의 상징처럼 언급되던 이곳, 항상 독재자 스탈린이 언급되고 공산주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매년 웅장한 군사 파 레이드가 펼쳐졌던 이곳에 내가 서있다니.... 이곳에서 뻗은 붉은 마수로 6.25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비극이 한반도에서 일어났던가.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격랑 속에서 보낸 나의 아픈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광장 서쪽 편에 우편엽서에서 보던 아름다운 사원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 가 기에 따라 들어가 보니 언제인가 TV에서 보았던 러시아 정교 사원이었다.
사람들이 100루블에 초 하나씩을 사들고 들어가 불을 붙여 초를 꽂고 촛불 더미 주위에 죽 둘러서서 합장을 하며 무얼 빌고 있었다. 공산주의 70년 동안 종교탄압으로 없어진 줄 알었더니 오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DNA가 되어버린 신앙은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더 많은 정성을 보이고 싶은 마음에 2개를 사들고 들어가 불을 붙여 꽂고는 새해 소원성취와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2 게를 꽂고 빌자 어느 중년 러시아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무어라고 자꾸 말을 걸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고 초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다. 영어로 나는 외국인이라 못 알아듣는 다고 몇 번을 반복하니 체념한 듯 물러서 간다.
나중 사할린으로 돌아와 그곳 동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초를 하나만 꽂아야 하는데 2개 꽂았다고 나무라는 소리였을 거라고 한다. 좋은 일에는 홀수로 꽂아야 하고 안 좋은 일에는 짝수로 꽂는다고 한다. 그것을 모르고 2개를 꽂았으니 러시아 사람들이 기분 나빠 할 수밖에.... 내 딴에는 2개 꽂으면 복이 배로 돌아오는 줄 알고 꽂았으니... 그 뒤 그곳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하고 나서 보니 무슨 일이던 애사에는 짝수, 경사에는 홀수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상갓집에 갈 때 꽃은 2,4,6송이로 반드시 짝수고, 생일등 경사에는 홀수의 꽃을 들고 갔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도 장미꽃 1송이 아니면 3송이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야 했고 심지어 경조금까지도 그 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원 세상에 비과학적이라고 종교까지 배척하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아니 러시아에서 이런 미신 같은 관습을 금과옥조로 지키고 있다니.....
크레므린궁 관람을 600 루블 내면 할 수 있다고 해서 나도 줄을 섰다. 한참을 쫓아다니다 안내하는 러시아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뒤처져 그냥 혼자 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궁 뒤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보니 가스불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주위에 꽃들이 놓여 있다. 안내판을 보니 호국 선열들을 추모하는 영원의 불이란다. 당시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못 보던 처음 보는 광경이라 한참이나 신기하게 보다가 걸어서 푸 스킨 역 입구에 있는 맥도널드 햄버거집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길게 줄을 서있다. 햄버거 4개와 음료수 4개 애플 피자 4개 감자 프라이 4개를 16.000 루블을 주고 여선생 가족과 둘러앉았다. 러시아인들한테는 비싼 감이 드는데도 항상 만원이다. 오랫동안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해서 철저히 배격했던 서구화의 상징물이 공산주의 소련이 자본주의 러시아로 바뀌면서 제일 먼저 들어왔고 오랫동안 서구화에 목말라하던 러시아인들에게는 서구화를 체험하는 공간이라 항상 인기가 많은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니 4시가 넘었고 5시가 되자 온다던 여선생 여행사 친구 부부가 왔다. RUSKOA 여행사를 운영하는 변성복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자연스레 교육문제가 화제가 되었다. 나는 마침 모스크바대학교(엠게오)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다는 부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문과 출신으로 상당히 공부를 한 것 같이 보이는데 너무 자기주장이 강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모스크바 대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 유학을 오기는 하는데 그중 러시아 문학을 공부한다고 오는 사람들이 많이 포기하고 돌아간다며 쉽게 생각하고 왔다가 상상외로 어려워 포기하는 것 같다고 한다. 일례로 러시아 17~18세기 문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은 한국에서 러시아의 고전문학부터 시작해서 17~18세기 이전까지의 문학책 정도는 다 통달하고 와야 하는데 근세 문학책 몇 권 읽고 오다 보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포기하고 귀국하는 것이 다반사라고 한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러시아 학교의 모든 평가가 주관식이다 보니 독서를 정말 많이 하고 있었고 특히 문학 독서는 필수였다. 문제집 몇 권 달달 외고 임하는 우리나라 학생들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늦게까지 이야기와 윷놀이를 하다 내일 낮 12시에 사할린 주인집 아주머니 동생인 김진희 씨와 러시아 외무성 관리를 만나 비자 문제를 협의하기로 한 약속을 생각하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첫댓글 1994. 1. 1 ~ 1921. 10. 28. .. 27년 전으로 돌아가
모스크바 여행 잘 하고 있습니다
한만희 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