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인상 출신의 제송희 시인이
첫 시집 <거미는 날개가 없다>를 발간했습니다.
◉출판사 서평
지난 2024년 《사이펀》 신인상으로 등단한 제송희 시인의 첫 시집 『거미는 날개가 없다』(사이펀)가 사이펀현대시인선 29번으로 발간됐다. 사이펀출판사에서 내보내는 배재경 시집에 이은 두 번째 출간물이다. 제송희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은 등단 2년 차 신인의 시집이라는 선입견을 가볍게 뛰어 넘긴다. 그녀의 작품에 담긴 문학성에서 물리적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만큼 첫 시집의 설레임만큼 퇴고와 퇴고를 거치며 완성형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작품마다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늦은 시집만큼 세월에 녹아든 시인의 육성이다. 삶의 깊은 부분을 경륜과 체험으로 육화시킨 그녀의 언어는 현대시의 또 다른 집약체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러한 제송희 시인의 문학적 성과를 정훈 문학평론가는 “제송희의 시편을 이루는 기반이 생의 비극적인 인식과 아울러 슬픔이 눅진한 고독이라면 이번 시집은 그러한 마음의 형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언어의 뭉치”라면서 “유년의 쓰라린 기억과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 그리고 애증의 그늘을 남기고 떠났거나 함께 보내는 사람에 대한 시적 형상화를 통해 시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계의 풍경을 엿볼 수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한편 시인은 “시를 만난 지금이 내 인생의 절정이지만 다음 시집을 위한 마음을 다잡는다”며 첫 시집 『거미는 날개가 없다』의 소회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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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사소한 것을 심중에 두고 살았더니
곧이곧대로 주름이 졌다
그때를 유배지라 말하긴 싫다
마음을 열고 보니 지금이 절정이다
놀랄만한 일은 내가 중심이란 것
끝나가는 연극 따위 얽매이지 않고
열심히 다음 장을 준비해야지
나를 위한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
2026.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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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비평
제송희의 시는 현대 시의 특징, 즉 모던한 언어 실험의 자장에 놓여 있지 않으면서도 의식 내부에 현실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거나 살짝 비틀어서 허무하고 공허한 세계 인식의 실마리가 들끓어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줄글로만 된 시와 행갈이로 갈음한 시가 배합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 배열에서 무의식과 잠재의식 및 현실 인식의 경계가 순조롭지 않고, 세계와 화합하지 못하는 내면의 부정성이 그런 형식의 작품을 창작하게 된 듯하다. 이 점은 오랜 세계 경험을 통한 체험이 정렬된 세계 인식보다는 파편화되고 일그러진 형식으로 그 체적의 부피를 키워온 사실과도 관계가 깊은 듯하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이 세계는 완성된 형식의 존재 체계가 아니라 언제라도 허물어지거나 변형되기 쉬운 물렁물렁한 표피에 감싸인 무정형의 방식으로 놓여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감성 또한 19세기 파리를 가득 메웠던 플라뇌르(Flâneur, 도시산책자)처럼 목적이나 방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심히 세계의 표면을 훑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세계 대응 방식이 아니라, 내면화된 고독과 외로움이 대상을 슬픔의 무대에 올려져 있는 소품으로 인식하는 방식에 가깝다.
-정훈(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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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약력
시인 제송희는 1956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2024년 《사이펀》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현재 사이펀문학회, 양산문학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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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으로
비의 종점
비 묻어온다
건물 사이로 비의 숲이 걸어 나온다
꽃 빛이 움츠러들고
빗방울이 꽃 내를 잡아 가두면
청개구리를 낳고 싶었지
퍼붓는 비를 바라보다
넌지시 손 내밀어 등 토닥이면
어여쁜 짐승들 날개를 턴다
적막은 시야를 넘어 흩어진다
버릇없는 바람이
가지를 훑고 지나갔네
빗소리에 놀란 고라니
낮잠 깨어도 꿈속이다
처마 밑에서 빗물의 간격을 재던
아이는 아직 거기 서 있고
꿈을 향해 비상하는 물구나무들
막 당도하는 물결이 헉헉대는 소용돌이
방파제가 완강히 파도를 막아서는,
울음의 벼랑으로, 종종걸음치는 비였다
운김을 따라 진득한 해무가 감도는 거기
비의 종점이 있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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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데려가요
거기 들어섰을 때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빽빽한 책들이 고행 중이다
수염깨나 만지작거리다
서책을 꺼내 읽던 양반들
수상한 시절을 만나
책으로 변신했다
그들은 독심술도 펼치는데
책이 한꺼번에 팔려나간 날이
술책을 쓴 그날이다
얼굴들 근엄하거나 발랄하다
진지한 표정일수록
그 자리에 오래 머문다
날 뽑아 줘요 날 데려가요
낮은 진열대엔
겹겹이 포갠 무게가 저릿하고,
손이 닿지 않는 선반에는
해탈한 책들도 보인다
저들은 변방에 있어도
자기 세계를 잃지 않았다
목이 긴
몇 권을 골라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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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는 날개가 없다
나비들은 뭐든 앞질러 갔다 그들 무리 중 잘난 쟁이는 호랑나비였다 그는 나비 날기 대회에서도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눈만 뜨면 나비, 그들 세계를 기웃거리며 그와의 독대를 노렸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석진 곳에서 여린 벌레나 낚아채는 거미라는 정체성에 신물이 난다 나는 일찍이 우리들의 한살이에 대해 불만을 품어 왔다 거미들은 진정 어리석다 에오라지 거미줄에만 매달리다 마지막엔 마른 풀잎처럼 나뒹굴고 말 것이다 이 우라질, 가깝고도 먼 경계를 뚫어야 한다 끝없이 나풀거리는 나비 세계를 훔쳐보다 시퍼런 바람에 목이 베일 뻔한 적도 있었지 이참에 저들처럼 생을 즐길 수 있다면 저 나비 세계에 반드시 편입해야 해 흠, 그 이적이라던가, 뭐라던가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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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후견인이 있다
고뿔 든 봄비가 막 물러서려는데
유별난 것 없는 아침의 발밑이
송곳처럼 뾰족하다
새들이 깃을 털며 입을 다물고
때아닌 뻐꾸기가 새벽부터 울더라니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소환된 봄비가
그를 증언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마 됐다 안카나
앞섶에 숨긴 뻔뻔한 손가락이
체념을 가리킨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될 일을
하필 왼쪽으로 갔느냐는 말은
워낙 터무니없었다
날 것들 낑낑거리며 마을을 뜨고
풀 길 없는 매듭의 끝을 붙든 채
서녘으로 서둘러 떠난 사람아
나는 아직 믿는다
연옥을 거쳐 순결해진 영혼이
더러 이승을 후견한다는 전설을
흐드러진 이생은 기왕 다하게 두고
감긴 태엽의 시간이 바랠 때까지
그가 몰고 올 은하와 별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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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마우스
사람을 만나면
입술을 쳐다보게 돼
쓰린 기억이 있거든
곱슬머리에 비교당한 그 후로
나는 입술에 매달렸어
슬리퍼에 그려진 스마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겠지만
웃지 않아도 입이 귀에 걸렸다면
의술도 난처하겠네
내 꿈은 작은 입을 가지는 것
작고 예쁜 입술과 친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지
멀쩡한 입술로 대상을 흠집 내고
저의를 집어넣는 수다쟁이들
콩과 팥을 오판하는 인자를 가졌어
눈을 더 크게 떠 봐
지구를 떠멘 사람들이 있어
그 아래를 떠받치는 지층들
많은 것을 물고 있는
저들이 빅 마우스
어쩐지 입이 크다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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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차
제송희 시집
거미는 날개가 없다
목차
제1부
이기적인 힘
호박꽃
비의 종점
302호 여자
작달비 내리는 날
날 데려가요
강 건너는 사월
구멍 보감
나도 후견인이 있다
2인용 식탁
물통이 있는 풍경
이런 아집
빅 마우스
즐거운 부활
거미는 날개가 없다
새벽
제2부
난 외롭지 않아요
회색 편들기
가방끈이 긴 청소부
단봉 낙타에게
새벽달
사거리 신호등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모과나무 집 그는
등짝
어느 흐린 날
증후군
들목에 서다 -물금
슬픔을 이기는 법
환도
사라진 그 집
벵골
제3부
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개안
단감
머나먼 서정
당근 마켓 24시
동행
백로
바람의 집
증상
손맛
넝마의 세계
불을 놓으러 간다
더위 그리고 가을
열여덟 번째 이삿날
회전의자
저 화석의 정체
제4부
앨리베이터는 착해
옛 애인을 위한 방화
천수답
그 애, 도연이
산길 스케치
짝사랑
그늘을 기다리며
그런 때가 있었다
천사 김밥
고개를 넘어
부채
내면의 시간
안시리움
감옥
조력자
해설 - 젖은 마음이 머무는 세계, 그 정처 없는 생의 고독에 대하여 / 정훈(문학평론가)
첫댓글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