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27. 청주정씨 노변문중, 충효재·모운당·정충각·정효각
송은석 (대구향교장의·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시 수성구 노변동 148번지. 고층 아파트와 노변공원 사이에 향토사와 문중사(門中史)를 간직한 멋진 공간이 있다. 재실인 충효재(忠孝齋), 모운당(慕雲堂)과 정려각인 정충각(旌忠閣), 정효각(旌孝閣)이다. 이 건물들은 충효재를 중심으로 한 담장 안에 모두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는 청주정씨 경산종중(慶山宗中) 노변문중(蘆邊門中)을 대표하는 유적인 충효재·모운당·정충각·정효각에 대한 이야기다.
400년 내력 청주정씨 노변문중
수성구 향토사 자료에 의하면 노변동에 처음 터를 잡은 성씨는 고려시대 의성김씨였고, 조선시대에 와서 청주정씨가 세거했다고 한다. 한때 갈변동으로도 불렸던 노변동은 고대국가 압독국이 있었던 곳으로 고려·조선을 거쳐 근대까지 경산 땅이었다가 1981년 대구에 편입됐다.
노변동에 청주정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은 약 400년 전이다. 청주정씨 17세인 대명거사(大明居士) 정유약(鄭惟爚)이 1639년(인조 17), 당시 경산 땅이었던 곡계촌(曲溪村·지금의 수성구 대흥동)에 처음 입향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1648년(인조 26) 정유약의 손자인 정호(鄭鎬)가 아들 정이태(鄭以泰)를 데리고 곡계촌을 떠나 노변동에 입향, 청주정씨 노변 입향조가 됐다. 이후 노변동 청주정씨는 노변동을 대표하는 문중으로 성장해 지금에 이르렀다. 참고로 한강 정구선생은 경산 입향조 정유약의 종조부이자 노변 입향조 정호의 종고조부가 된다.
▖정유약(17세)→정석규(18세)→정호(19세)→정이태(20세)→정동범(21세)→정지섭(22세)
(경산곡계입향조) (노변입향조) →정지언(22세)
청주정씨 노변문중 랜드마크, 충효재와 모운당
충효재(忠孝齋)는 1996년 건립된 요즘 건물이요, 모운당은 250년 전에 처음 지어진 옛 건물이다. 본래 이 터에는 모운당·정충각·정효각이 있었고, 가까이 서쪽 언덕에 청주정씨 노변문중 선영이 있었다. 하지만 1991년 시작된 택지개발로 선영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고 모운당 일원은 지금처럼 충효재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비됐다.
충효재는 청주정씨 노변문중의 성역(聖域)이며 랜드마크다. 정문인 성신문(省身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충효재가 있다. 충효재는 정면 5칸 규모의 큰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 모운당이 있으며, 우측에 별도 담장을 두른 정충각과 정효각이 있다.
모운당(慕雲堂)은 지금은 충효재에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과거 이 공간의 주인이었다. 노암(蘆庵) 정동범(鄭東範·1710-1793)을 기리는 재실 모운당이 처음 건립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의 일이다. 노변 입향조 정호의 손자인 정동범은 이인좌의 난 때 19세 백면서생(白面書生)의 신분으로 창의해, 당시 성주 목사 이보혁(李普赫) 휘하에서 큰 공[합천전투]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노암은 난이 끝난 뒤 모든 상훈을 사양하고 고향 노변동으로 돌아와 강학과 부모 봉양에만 전념했다.
모운당은 처음에는 ‘후련정(後連亭)’이었다가 뒤에 ‘모련정(慕連亭)’으로 이름을 고쳤다. 모련정이 다시 ‘모운당’으로 바뀐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인 1803년(순조 3)이다. 노암의 후손들이 낡은 모련정을 개축하고 종선조(從先祖)인 한강 정구의 망운(望雲)의 뜻을 취해 모운당으로 현판을 바꾸어 단 것이다.
부자(父子) 정려, 정충각과 정효각
충효재 동쪽 정려각 건물은 정면 3칸짜리 한 동이지만 내부에 두 개의 정려각이 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가운데 한 칸은 사당이고, 왼쪽이 정충각(旌忠閣), 오른쪽이 정효각(旌孝閣)이다.
정충각의 주인공은 앞서 살펴본 노암 정동범이다. 이인좌의 난이 마무리된 후, 노암은 “선비는 학문으로 이름이 나야지 군공(軍功)으로 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든 상훈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인물이다.
노암의 충은 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으로 이름이 나 많은 일화를 남겼다. 4세 때 잔칫집에서 얻는 밤과 대추를 먹지 않고 챙겨와 부모님께 드렸고, 8세 때는 사략을 공부하던 중 후예(后羿)의 폐륜을 접하고는 칼로 책에 있는 ‘후예’ 두 글자를 도려냈다고 한다. 15세 때는 국상을 당하자 ‘군친일야(君親一也)’라며 3년간 저녁마다 북향배곡(北向拜哭)을 했으며, 어버이 병환 6년에 하루 같이 약시중을 했다. 부모상 때는 슬픔이 지나쳐 기절했다가 이틀 만에 깨어나기도 했고, 3년 시묘 때는 그의 눈물이 떨어진 곳에는 봄풀이 돋지 않았다. 또 큰 눈에 묘소를 지키던 노송이 쓰러지자 그가 껴안고 통곡하니 큰바람이 불어 쓰러진 노송이 다시 일어났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정효각의 주인공은 노암의 둘째 아들인 면암(勉庵) 정지언(鄭之彦·1740-1814)이다. 면암 역시 하늘이 내린 효자였다. 조부모와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온갖 재롱을 부리며 어버이를 즐겁게 했다고 한다. 약물 봉양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어버이 내의는 반드시 손수 세척했다고 한다. 또한 조부모상에 아버지 노암이 6년 시묘를 할 때 면암이 곁에서 시종을 했다고 한다.
면암 역시 전설 같은 일화가 여럿 전한다. 한번은 아버지 노암이 숙환으로 백약이 무효하자, 면암이 조왕신과 북두칠성에게 지극정성 빌었다. 그날 밤 면암의 꿈에 조부가 나타나 “네 아비의 병에는 개 기름이 즉효약”이라 알려주었다. 놀라 잠에서 깬 면암이 마당을 내다보니 범이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개 한 마리를 물고 와 던져주고 가는 것이었다. 그 개를 지져 낸 기름을 먹은 노암은 이내 쾌차했다고 한다. 또 부모상을 당했을 때 묘소의 소나무를 붙잡고 통곡하니 소나무가 고사했다가 상기(喪期)가 끝나자 다시 소생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면암은 우애 또한 남달랐다고 한다. 백씨(伯氏) 정지섭(鄭之燮)을 지성으로 섬기고 함께 상체시(常棣時·형제 간의 우애를 노래한 시)를 외며 평생 우애를 키웠다고 한다. 노암은 1796년(정조 20) 충신으로, 면암은 1892년(고종 29) 효자로 정려를 받았으며, 지금의 정충각과 정효각은 1892년 건립됐다.
에필로그
‘효자 밑에 효자 나고 충신 밑에 충신 난다’, ‘충신을 찾으려면 효자집으로 가라’는 옛말이 있다. 청주정씨 노변문중을 대표하는 노암 정동범, 면암 정지언 두 선생은 나라에는 ‘충’, 어버이에는 ‘효’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수성구 노변동 아파트 단지 사이에 이런 소중한 유적이 있건만 주민들조차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다. 세상 변화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유림만이라도 주변에 산재한 이런 문중 유적에 무한 애정과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