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26. 금서헌과 묘골 회화나무 이야기
혹시 ‘회화나무’를 아시는지? 아마도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아니라면 잘 모를 것이다. 회화나무를 다른 말로는 ‘홰나무·회나무·괴나무·괴화(槐花)·괴목(槐木)’이라고도 한다. 세상에 그 많고 많은 나무 중에서 하필이면 이름도 낯선 회화나무를 이번 이야기의 머리말로 끄집어낸 것일까? 느티나무도 있고 은행나무도 있고 또 소나무도 있는데 말이다.
회화나무가 격조 있어 보이는 이유
회화나무는 일명 ‘학자수(學者樹)’ 혹은 ‘정승나무’라고도 불린다. 앞서 홰나무니 괴목이니 하는 이름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품격(?)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런데 아무런 까닭 없이 회화나무에 학자수니 정승나무니 하는 이름을 붙였을 리는 없다. 다시 말해 다 그 까닭이 있다는 것이다.
옛말에 ‘삼괴구극(三槐九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 그루의 회화나무와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라는 뜻이다. 이는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조정의 뜰에 회화나무 세 그루 심어 ‘정승 3인’을, 가시나무 아홉 그루를 심어 ‘고급관료 9인’을 그 아래에 세웠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삼정승(三政丞)과 구경(九卿)을 삼괴구극이라 하였다. 의정부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삼공(三公)이며, 의정부 좌참찬·우참찬과 육조(六曹)의 수장인 6판서와 한성부판윤을 구경이라 했다.
실제로 우리 주변의 회화나무 고목을 살펴보면 이러한 유래를 영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회화나무 고목은 주로 궁궐·문묘·관아를 비롯한 명문가 고택 등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회화나무를 좋아한다. 그 이유는 회화나무 수형에서 느껴지는 ‘예측불허’·‘자유분방’함 때문이다.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회화나무를 한 번 바라보라. 미끈하게 잘 빠진 몸매에 아카시나뭇잎을 닮은 작은 크기의 푸른 잎을 달고 있는 회화나무. 그 수형은 느티나무처럼 풍성하지도 않고, 대왕참나무처럼 반듯하지도 않다. 회화나무 수형에서는 불규칙성이 느껴진다. 한마디로 ‘파격(破格)’이다. 바로 이러한 회화나무 가지의 불규칙적인 파격의 멋 때문에 다른 나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격조(格調)가 회화나무에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화나무를 묘골에서도 볼 수 있을까? 물론이다. 묘골 육신사 외삼문에서 남쪽으로 약 30m 정도 떨어진 길가에 아주 잘 생기고 키가 큰 고목이 한 그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무를 보고 아카시나무라고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 나무가 바로 회화나무이다. 묘골에는 현재 두 그루의 회화나무 고목이 있다. 이 나무 말고 다른 한 그루는 이 나무에서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어느 개인집 안에 있다.
이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하나 있다. 수령이 3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묘골의 회화나무 두 그루. 바로 이 두 그루의 회화나무 고목을 좌우에다 끼고 앉아 있는 저 집은 과연 어떤 집일까?
사람들 속으로 내려온 한 마리 학(鶴), 금서헌 박광보
앞서 언급한 두 그루의 묘골 회화나무 고목은 그 수령이 200-300년 정도 되어 보인다. 그런데 보기와는 달리 경우에 따라서는 이 나무의 수령을 300-400년으로까지 높여 잡기도 한다. 이는 나무가 뿌리를 내린 땅이 청석지대인 탓에 나무의 생장속도가 극도로 느린 탓이라고 한다.
여하튼 묘골의 이 두 그루 회화나무 고목은 ‘금서헌(錦西軒)’이라 불리는 집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각각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 그루는 금서헌 사당 아래에 있으며, 다른 한 그루는 금서헌 동편 마을 안길 가에 서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두 그루 회화나무가 서 있는 곳이 풍수적으로 묘골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점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옛날 묘골 박씨 종택을 지을 즈음 마을의 수호목이자 종택의 수호목으로 심은 것이 바로 지금의 이 회화나무라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옛사람은 회화나무를 아무 곳에나 심지 않았다. 큰 인물이 나기를 고대하면서 심은 나무가 바로 회화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그루의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는 금서헌은 어떤 집일까?
금서헌(錦西軒)은 박팽년 선생의 12세손인 박광보(朴光輔)의 집에 붙은 헌호(軒號)이다. 박광보(朴光輔)[1761-1839]는 자가 맹익(孟翼), 호는 금서헌(錦西軒)으로 앞서 살펴본 삼가헌 박성수의 3남 중 장남이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 여러 번 경상도 관찰사에 의해 천거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등용되지는 못했고 평생을 처사의 신분으로 고향에서 부모 봉양과 강학에 힘쓰며 보냈다. 선생의 행장(行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선생의 인물됨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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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 사람의 무리 속에 내려온 것 같으며, 용이 못가에 숨어 있는 것 같으며… [계당 류주목]
▪언론은 둥근 구슬이 판상을 구를 듯이, 문장은 보슬(寶瑟)이 채를 퉁기는 것 같으며, 기억력의 풍부함은 무고와 청상도 당할 수 없고, 변명(辨明)[명백하게 판단함]함은 폐석과 황월도 그보다 더 엄할 수가 없었다. [한주 이진상]
▪노부(老夫)가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깨닫지 못했다. [백불암 최흥원]
▪지금 세상에 드물게 보는 선비라. [입재 정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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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보는 향년 79세의 나이로 졸하였는데 임종 시 자리에 일어나 앉아 “일평생에 근심과 즐거움을 하늘에 맡겼도다.” 하고 또 “편히 죽고 순하게 사는 것을 서명에 맡기노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생사의 이치를 통달한 군자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의 유적으로는 현재 묘골에 복원되어 있는 ‘금서헌’이 대표적이다. 또한 그의 작품으로는 대구 성서 강창교 옆에 있는 이락서당 일대의 풍광을 노래한 ‘이락 16경’이 유명하며, 문집으로 금서헌집이 있다. 참고로 선생의 동생인 노포 박광석(朴光錫)[1764-1845]은 정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선대부 한성부우윤[지금의 서울부시장격]에까지 이르렀다.
에필로그
현재 금서헌은 절반의 복원에 머물러 있다. 사당·안채·큰사랑채까지는 복원을 했으나 중사랑채를 아직 복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금서헌은 1664년[현종 5]에 박팽년 선생의 8세손인 대흥 군수 박중휘(朴重徽)가 건립한 집이다. 이후 박광보의 재실로 사용되다가, 1909년에 후손 박최동(朴最東)이 중수하였다. 그리고 2010년대 초에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금서헌 안에 있는 회화나무는 사당 아랫단에 서 있다. 그 늠름하고 고고한 자태가 마치 ‘군계일학(群鷄一鶴)’을 보는 듯하다. 참고로 회화나무의 한자명인 ‘괴목(槐木)’의 ‘괴(槐)’자를 파자해보면 ‘나무[木]+귀신[鬼]’이 된다. 그래서 회화나무를 잡귀신을 쫓는 나무라고도 했다. 그런데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정말 묘골에는 애시 당초부터 회화나무가 두 그루만 있었을까?
첫댓글 묘골 육신사 이야기
아주 아주 오래전에 딱 한번 들렀던곳.
이 자그마한 골짜기 안에 어마 무시한
스토리텔링이 숨어 있을 줄이야!
단순한 이야기의 전달이 아닌 이야기의
역사적, 문헌적 사실관계에 대한 규명을
위해 흘린 땀방울이 느껴집니다.
송선비 글 따라가다 가랭이 찢어지고
있습니다
하하하^^
이곳뿐만이 아니라 대구 곳곳에 산재한 400여 문중재실마다 이런 류의 역사, 문화, 스토리가 다 숨어 있죠^^ 아는만큼 보인다고 현대인들이 관심이 없다보니 눈에 띄지 않는거죠. 향토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늘보님^^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무탈하시고 행복하십시오.
대구선비 송선비 송은석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