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이냐? 죄인이냐?
(롬5:19)
목회를 하면서 강대상에서 설교를 할 때에 귀신에 대해서 설교를 하면 베뢰아 귀신론 때문에 조심스러웠고, 종말설교를 할 때에는 시한부 종말주의자 때문에 조심스러웠고,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는 사도행전시대에 모든 성령의 역사는 끝났다는 전통주의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이제는 구원파 때문에 죄인이냐? 의인이냐? 에 대해서 설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불건전 집단이나 이단들은 성경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통교회가 잘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포교활동을 한다.
귀신론도 그렇고 종말론도 그렇고 성령론도 그렇고 구원론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을 하겠는가?
마치 구원파들이 하는 질문과 같아서 약간 껄끄럽긴 하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나도 십자가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의인이라는 말을 쓰기가 왠지 이상했고 죄송스러웠다.
오히려 죄인이라는 말을 쓰면 마음이 편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롭게 된다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인이 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죄를 지으니까 의인이라고 하기에 부끄러워서 죄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의 정한 것이 있다. ‘우리는 죄인이면서도 의인이고 의인이면서도 죄인이다’라고 신학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성도들에게 가르쳤다.
물론 여기에서 의인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말로 했고 죄인을 강조했다.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목사님이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다고 설교를 하면 인정하면서도 약간의 거부감을 느꼈었다.
그 정도로 교인들에게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을 세뇌가 될 정도로 교회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날 대표기도를 하면 “이 죄인이 이 자리에 설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고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이 죄인이 일주일동안 죄지은 것을 먼저 용서해 주시고 이 부족한 죄인이 감히 대표기도를 합니다. 이 죄인이 기도를 마칩니다. 이 부족한 죄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를 올렸사옵나이다. 아멘!”
보통 이렇게 기도를 한다.
왜 이렇게 죄인이라고 하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환영을 하고 의인이라고 하면은 왜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을 깨달은 어떤 장로님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장로님을 치유사역으로 귀하게 쓰시고 있다.
한국에서 차세대 교회로 촉망을 받는 교회에서 장로님이 설교 하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그때 장로님이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입니다”라고 설교를 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장로님이 설교하는데 힘들어하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깨어 있는 교회도 의인이라고 하면 알르레기 반응을 일으킨다.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죄인이라는 생각보다 의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다.
사도바울이 표현한 것 중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표현을 썼을 때에는 내가 죄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정도로 겸손하다는 표현이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은 옛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것을 생각하고 한 것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괴수 중에 괴수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고백을 가지고 사도바울도 죄인임을 강조했다고 하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의인” 사상은 사도바울의 핵심이다. 물론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죄인의 심정으로 철저하게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죄인 된 마음으로 통회 자복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를 지었다고 ‘의인’이 본질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 되었으니까 계속 죄를 지어도 천국 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하면 안된다. 그러면 구원파나 다름이 없다.
진짜 의인은 점점 거룩해져서 실제로 의인의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을 잘 구분하시기 바란다.
말씀대로 못살았을 때에 이렇게 표현을 하면은 어떠할까?
“연약한 의인”
십자가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위대한 장소이다.
십자가의 핵심은 구원이다.
구원은 무엇인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죄인이 죽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마귀의 형상이 죽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죄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가 있는가?
죄인은 무조건 마귀의 형상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9절을 보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
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 말씀은 죄인이냐? 의인이냐? 할 때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한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인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이다.
죄인은 마귀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고 의인은 하나님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오셨다.
십자가가 바로 죄인을 죽이고 의인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염소가 죽고 양으로 태어나듯이 죄인이 죽고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의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의인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의인이 되었음을 만천하에 선포를 해야 한다. 마귀에게 다가가서 나는 십자가에서 의인이 되었다고 선포를 해야 한다. 그래야 마귀가 벌벌 떨고 도망간다.
내가 의인임을 믿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믿지 않는 것이다.
믿는다고 해도 반쪽짜리 믿음이다.
의인이 되어야 의의 나라인 천국에 갈 수 있다.
죄인은 절대로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
의인만이 가는 곳이다.
십자가 복음은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말씀
이다. 자꾸 죄인! 죄인! 하지 말라. 마귀가 좋아한다.
죄를 지었을 때에는 죄인의 마음으로 철저하게 회개하시기 바란다.
평소에는 의인의식을 가지시기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의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내가 의인이라고 하면 교만하지 않느냐고 반문을 할 것이다.
십자가에서 ‘의인’이 되는 것하고 바리새인처럼 자기의 의로 율법을 지켜서 자기를 의롭게 생각하는 ‘의인’하고는 천지차이이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대다수의 교인들이 이런 바리새인의 의를 가지고 있다. 죄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실제로는 의인 행세를 하고 있다.
주일 잘 지키고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더 나아가서는 새벽기도도 하고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하고 헌금생활을 잘 하면 이런 교인은 속으로는 내가 이정도면 됐다고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진정한 의인’으로 확신을 한다.
이것은 바로 교만이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의인의식’에 빠져서 교만해진 것이다.
십자가 복음을 깨달으면 절대로 이런 의인의식에 빠져들지 않는다.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으로 바뀐 것을 알게 되면 교만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의’는 내 열심에서 나온 ‘자기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자기의 의’로 신앙생활 할때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흉악무도한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 저주 받을 인생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알면 철저하게 자신의 죄악 됨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십자가 앞으로 간다. 자기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안다. 내가 아벨을 죽인 가인이요, 내가 예수를 판 가롯 유다요, 내가 완악한 바로왕이요, 내가 버림받은 사울왕이요, 내가 이세벨이요, 내가 아합왕이요, 내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내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헤롯 왕이요, 내가 십자가 밑에서 조롱한 이스라엘 백성이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잔인한 로마군인이요, 내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머리 열뿔가진 교만한 짐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참된 의인은 이것을 깨닫는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아직 십자가에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 복음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의인이 무엇인지를 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이 ‘의’를 믿을 때에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만해 질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감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를 의롭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바로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나온 의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 바로 로마서 6장을 통해서 나온 의인이다.
죄인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의인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의인만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의인만이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마친다는 것이다.
의인은 반드시 믿음으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씀드리면 죄인은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직 죄인은 불의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표현을 할 수가 있다
평소에 자꾸 죄인 죄인 하니까 죄를 지어도 양심을 가책을 느끼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내가 죄인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조금만 죄를 지어도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에서 나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셨는데 죄가 묻으면 구원의 옷이 더러워진 것을 알고 십자가의 은혜를 욕되게 할까봐 성령으로 회개를 해서 자신을 깨끗케 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의인의 의미를 안다면 더욱 겸손해 질 수밖에 없다.
당당함과 교만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당당함을 교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다윗은 교만 중에 교만해야 한다. 사도바울도 교만 중에 교만해야 한다.
다윗은 자기가 의롭게 살았다고 했고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이들의 고백은 사실이다. 당당함이다. 진정한 의인은 이런 당당함이 있다.
다시는 죄인! 죄인! 하시지 말기 바란다. 십자가 복음 깨달았으면 당당하게 만천하에 “나는 의인이다”라고 외쳐야한다.
의인이라고 해야 진정으로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죄를 지으면 마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십자가에 다시 못을 박는 행위이다.
마귀에게 속지 말라. 마귀는 겸손한 체하게 한다. 겸손한 척하게 한다.
“척척신앙”을 빨리 버려라. 척척신앙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요 더욱더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당하라. 십자가에서 부활하라. 십자가에서 의인이 되라.
그래서 거룩하게 살아야 진정한 의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