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 : 9 - 23절
“성령님의 말씀하심”
우리가 두 주 동안 봤던 지도는 조금 왜곡 된 부분이 있어서 예루살렘과 욥바의 거리는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고 욥바와 가이사랴의 거리는 상대적으로 짧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지도를 준비했는데 이 지도에서는 예루살렘과 욥바와의 거리가 65km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주 전에 설명을 드릴 때는 55km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제가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니고 보시는 것처럼 두 주 전에 말씀을 드린 것은 직선거리이고 오늘 보는 지도는 코블랑 코블랑하게 만들어진 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보다는 짧은 50km이지만 결코 가까운 거리이지는 않습니다. 걸어서는 12시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그런 거리였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 처음 시작이 “이튿날” 이렇게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환상을 본 즉시 사람들을 베드로에게는 보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 날 오후 12시 즈음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곳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각 베드로는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시각이 제육 시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 시간 계산은 새벽 6시가 0시였기 때문에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제육 시는 지금의 오후 12시에 해당하는 시간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전통에 따라서 아침 9시에 기도를 했을 것이고 오후 12시에도 기도를 하러 지붕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그런 전통을 가지고 기도하러 올라갔더니 하나님께서 환상 한 가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보면 정한 동물이 있고 부정한 동물이 있습니다. 부정한 동물 같은 경우는 상종 자체를 하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동물이 돼지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들 중에서도 독수리, 솔개, 매, 까마귀, 타조, 학, 부엉이, 황새, 박쥐…. 이런 것들은 부정한 짐승들이었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고 있는 시간에 환상을 통해 이런 것들을 보여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잡아먹으라고 명령을 하셨고 베드로는 지금까지 이런 부정한 것들을 먹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먹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이런 일이 무려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상태였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베드로였지만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라 온전히 살아갔던 것입니다. 율법뿐만 아니라 기도의 전통도 그대로 쫓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그런 습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전통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보여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른 일을 계획하더라도 정해진 기도 시간을 먼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한 번 더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대화인지라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맺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수시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정해진 기도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보여 주고 있는 기도의 전통과 습관을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환상을 본 베드로는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17절에 보면 그 환상 때문에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의아해 했다”는 의미는 “길을 잃었다, 오락가락했다” 이런 의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혼란이 되었고,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애간장이 탔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기도자라면 이런 과정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이 우리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환상이든, 말씀이든, 또는 사람을 통해서든, 사건을 통해서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다면 우리가 그 뜻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 뜻대로 행동하며 나아가야 우리의 기도가 참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도 않고 산다면 그 기도는 100% 실패한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을 성령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베드로는 특별히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듣고서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성령 충만함으로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정확한 뜻과 계획을 알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뜨겁게 기도를 하고 나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으면 그런 기도는 일방통행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방통행 길을 보면 막힘이 없습니다. 모든 차가 한쪽 방향으로만 운전을 하기 때문에 운전을 하는데 방해될 것도 없고 양방향 길보다 더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굉장히 편리한 길이 일방통행이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돌아오려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일방통행 길의 단점입니다.
기도가 일방통행이 되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방통행식 기도를 하면 기도할 때는 엄청 편합니다.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습니다. 그냥 내 뜻대로 구하다가 돌아가면 됩니다. 어려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잘못된 기도가 되어서 잘못된 길에 접어들게 되면 쉽게 멈출 수가 없고 쉽게 그 방향을 틀수가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기도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할 때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님의 말씀하심에 귀를 기우리고 기도를 해야지 이런 기도의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종교적인 행위로서의 기도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뜻을 알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는 쉽게 누릴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말씀하심을 들은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율법을 지키면서 부정한 짐승은 멀리하고 구별된 삶을 살았던 베드로였는데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방인이 보낸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곳으로 불러 들여서 함께 잠을 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평생 부정한 짐승은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을 정도로 율법 정신이 투철했던 사람인데 부정한 음식조차도 안 먹었던 사람이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렸을 것 같습니까?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의아해 하다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순종함으로 그들을 맞이하여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가운데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더니 평생 고집스러운 삶을 살았던 베드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내려놓지 못하고, 과거를 내려놓지 못하고, 육신의 삶을 내려놓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성령님의 말씀하심을 귀담아 듣지 않고 농담처럼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처럼 성령 충만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고집 센 베드로가 그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내려놓고, 육신을 내려놓고, 과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지가 않습니다.
능력 있는 기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생각 가운데 주시는 것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 됩니다. 그렇게 반응을 하려면 오로지 내 뜻만 구하고 이루겠다는 고집부터 꺾어서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집스러운 율법의 삶을 꺾었던 것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 편견, 가치, 습관 같은 것을 꺾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말씀하심을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원래부터 영적 분별력이 좋았던 사람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을 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나댔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을 들으며 망신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랬던 베드로가 어떻게 성령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사람이 될 수 있었냐면 오순절에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성령님에 대해서 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베드로가 어떤 상태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까?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보여 주신 영적인 현상에 대해서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고 영적인 갈급함와 목마름을 가지고 알아가기 위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열심을 보시고, 그 열정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경의 저자이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성령 충만에 대해서 너무 신비로운 현상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면서 살면 성령님을 통해 분별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지가 않습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의 뜻을 이루겠다는 고집을 꺾고서 우리가 지난 날 가지고 살던 이전의 것들은 다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베드로처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갈급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누구든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베드로가 경험했던 이런 경험들을 우리도 엄청나게 많이 경험하면서 살 수 있었을 텐데 우리의 무지함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런 영적 경험들을 수시로 할 수 있도록 성령님과 교제, 교통, 역사, 충만함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무엇보다도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누리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