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술 꽤나 펐을 것이다. 그럴 소질이 다분하다.
할아버지는 하얀 수염에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출타하셨다가 비만 오면 앞마당 흙탕물에 드러누우시곤 했다. 술의 힘이란 이성 가지고는 못 말린다. 며느리들을 꿇어 앉혀놓고 공자왈 맹자왈 “서는 이렇고 후는 이러니라” 훈계에 밤은 깊어가고 새벽닭이 울어야 주무셨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말수가 적었다. 맨 정신으로는 잔정이 없다. 술이 들어가야 눈이라도 마주치는 위인이다. 평상에 앉아 소주 한잔 털어 넣는 순간 유명을 달리했다고하니, 좋아하는 기호품과 같이 간 아버지는 술복이 많은 사람이다.
남동생은 대학 다닐 때,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 학교 언덕인줄 오른 곳이 하필이면 청와대 뒷산을 기어들었다. 철꺽 총을 장전하고 “손들어!” 소리에 놀라 “대한민국만세! 대한민국… ” 만세 삼창으로 수도 사령부 경비 대원에게서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사촌오빠는 동료 기자들과 사흘을 퍼 마시고 구렁텅이에 쳐 박혀 자동차를 들어내 폐차를 시켜도 모른 채 취해 있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가문의 피 속에 어느 정도는 붉은 포도주가 섞여 흐를 법도 하다.
친정 식구들은 남의 살 한 점만 있으면 술을 마신다. 어쩌다가 삼겹살이라도 굽는 날은 잔칫날이다. 하다못해 멸치조림이나 오이소박이 속의 새우젓 눈만 봐도 술이 고프다. 술이 우리식구들을 쫓아다니는 것이 틀림없다.
엄마는 평생 술에 질려 술 마시는 사람만 아니라면 딸을 혼사 시킬 것이라 하더니, 이강주, 두견주, 문배주… 이름 다른 술들을 모아 놓고 밤잠을 핑계로 술을 마신다. 친정식구들의 만남은 늘 술로써 돈독해진다.
나는 어떤가. “전 술을 못해요” “대낮부터 어떻게… ” 따위로 술 앞에서 내숭을 떨어본 적은 맹세코 없다. 간혹 술이 안 받는 날 “오늘은 마시고 싶지 않아요” 로 거절한다. 술 앞에 얼마나 당당한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낮술로 반주를 하고 오후 수업을 진행해도 아무도 술기운으로 음률 맞춰 읽는지 눈치 채지 못한다.
남편은 신기하다. 술을 못 마신다. 술로 인한 기분 내기나 실수가 있을 턱이 없다. 늘 한결같이 맨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시댁은 제사 지내고 나서 음복(飮福)도 안하는 집안이다. 신혼 초에 촛불까지 켜 분위기를 잡아놓고 음주연습을 시켜봤다. 온통 얼굴부터 빨개져 곧 폭발할 것 같아 진즉에 포기하고 말았다. “도대체 그 쓴 걸 왜 마시냐.”며 아직도 술 마시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연말 모임이 많을 때는 술 마신 아내를 싣고 다닌다.
주당(酒黨)모임이 있다. 본래는 배(yacht)를 타는 동호인 모임이다. 휴일을 빼앗긴 아내들이 뱃놀이 방해차원에서 뭉쳤다. 만나자마자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보고는 술을 마시러 간다. 별을 보며, 파도소리를 들으며, 때론 가랑비나 눈발이 희끗거리는 날에도 바닷가 노천카페에서 생맥주를 들이킨다. 배에서 내린 남편들이 부리나케 단속하러 온다. 이 술은 취하지 않는다. 계수나무 노와 목란나무 상앗대로 남편들을 툭툭 치며 돛단배 표표히 나부끼는 분위기를 마시기 때문이다.
내 주량이라고 해봐야 기껏 소주 한두 잔, 맥주 두어 병, 양주 한잔 정도가 고작이다. 술꾼들이 보면 가소롭게 여길는지 모른다. 그러나 술을 즐김에는 틀림없다. 술 구성원이 된다는 자체에 벌써 사람들에게 취한다.
나는 평소 말이 많다. 늘 사람들이 듣는 편이다. 그러나 술 마실 때만은 거꾸로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 술기운이 감돌면 말수가 적어진다. 그러다 술이 술을 마실 즈음부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한다.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결코 술이 나를 마셔버리는 일은 없다. 술기운을 빌어 술술 풀어놓는 이야기가 다 듣기 좋다. 허풍을 떠는 모습은 더 재미있다. 그 중에 술 빨 받아 열 내는 모습이 제일 신난다.
문득 술이 고픈 날이 있다. 마땅한 벗 없이도 가끔은 혼자 홀짝인다. ‘풍다우주(風茶雨酒)’*라고 했던가. 느닷없이 바람이 마음을 흔들어 놓은 날, 풍로에 차 주전자 올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코끝을 스치는 차향에도 스산한 바람 잦아들지 아니하고, 마음속에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면 진한 고량주 한 모금이 목젖을 뜨겁게 한다. 부슬부슬 속울음이 술에 젖는다. 이런 날을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 했던가. 달 없는 밤이기에 이백(李白)이 술벗으로 찾아올 만하다.
나에게 술 마시는 시간은 ‘25時’이다. 내 일상에는 없는 시간이지만 덤으로 주어지는 술시이기도 하다.
*바람 부는 날은 차를 마시고 비 오는 날은 술을 마심
첫댓글 *바람 부는 날은 차를 마시고 비 오는 날은 술을 마심 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 배웠으니 실천해봐야겠어요 비오는 날의 술한잔 정말 맛날것 같아요 술을 모르는 사람은 돈도 술 잘 먹는 사람에 비해 적게 번다고 하니 저도 열심히 마시고 있습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분위기에 잘 취한답니다. 언제 한잔 합시당
겨우 소주 한두잔이라뇨? 가문의 혈통을 보아 한 병은 그뜬하실 것 같은데요..... 오늘같이 바람부는 오후 차보다는 술 생각이 나는 재미있는 글...잘 보았습니다.. 오늘 저녁 냉장고에 식혀둔(?) 매실주 한 잔 해야 되겠는데요...
중국어 반의 맛은 역시 白酒! 제주도 소주 '한라산'이 냉장고에 있네요.
그 술을 제가 주문 신청합니다. 한라산은 맛을 아는 사람만이 마시는 것입니다.이백의 장진주의 시를 읇프면서.기대합니다.
화양연화님! 친정댁 술 내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술 실력은 물론 유전적인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리 술을 못하시는 분도 조금씩 조금씩 술 마시는 량을 늘려나가면 어느새 상당한 주당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 마시는 연수를 하시던 낭군님께서 불가능하신 것으로 생각을 하셨어 아예 신혼초에 포기를 하셨다고 하셨는데 댁에서 마시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직장 관계로 동료들과 직장일로 다른 관계자들과 술을 마셔야 하는영업사원들의 경우 아무리 술을 못하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안마실 수가 없고 이런 일이 거듭되면 회사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술꾼이 됩니다
큰일 났네요. 술꾼이라고 소문나면.... 사실 말로만 잘 마셔요. 아직 취해보지 못했습니다.
화양연화님! 왜 이러십니까 직접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를 하시고선 호들갑을 떠십니까 학교 재직시 오후 수업시간에 술 기운에 음율을 맞추어 읽을 정도라면 알아모시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술꾼이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술을 좋아하신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남자건 여자건 술을 전연 못하시는 것보다 조금은 마실 줄 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건강에도 좋고요 우리나이에 술 한잔 못마신다면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나이가 들수록 너는 것은 술이요 담배라고 하지 않습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노인정에서 서로 만나시면 담배와 소주로 소일을 하고 지내시지 않습니까 화양연화님께서 취해보시기를 원하신다면 제가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만!
부슬 부슬 속울음이 젖을때 고량주로 ㅆ어 볼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