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이 발전하고 젊은 학생들이 그에게 배우고 훈련받기 위하
여 몰려들자, 점차로 그의 관심을 과학적 세부에서 행위와 성격에 대한 광범위하
고 애매한 문제로 돌렸다. 그는 물질세계의 문제보다도 특히 '최선의 삶은 무엇
인가?' '삶의 최고선은 무엇인가?' '덕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행복을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 중의 문제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윤리학에서는 소박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과학적 훈련을 받았으므로 초인
적 이상을 설파하거나, 공허한 완전성을 권유하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인간 본성의 개념은 완전히 건전하며, 모든 이상은 자연을 기초로 하고 있
고 자연적인 모든 것은 이상의 발전을 보고 있다.」고 산타야나 (Santayana)는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삶의 목표가 선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출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선 자체만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며, 다른 어떤 목적도 바라고 있지 않
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가 명예, 쾌락, 지성 등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그를
통하여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시학) 하지만 그는 행복을 최고
선으로 부르는 것이 진부한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필
요한 것은 행복의 본성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설명이며, 또 행복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는 인간과 다른 생물과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찾고, 인간의 행복은 이 특
수한 인간 특성을 완전히 발휘하는데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이 방법을 찾고자 하
였다. 인간 특유의 우수성은 사고력이다. 그리고 인간이 다른 모든 생물을 압도하
고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사고력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 능력의 신장에 따라
그에게 우월성이 주어지는 것처럼, 그 능력의 발달로 행복을 실현하게 될 것이라
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
이때 행복의 주요 조건은 어떤 육체적 선행조건을 제외한다면, 사람의 특별한 영
예와 힘인 이성적 생활이다. 덕망, 혹은 탁월함은 올바른 판단, 자기 억제, 욕망의
조절, 세련된 방법에 의존할 것이다. 탁월성은 단순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고,
순박한 열정의 선물도 아니며, 충분히 개발된 사람의 경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탁월성에 도달하는 데에는 거리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중도, 즉 중용이다. 성격의 특질은 세 갈래로 분류될 수 있다. 그 중
첫 번째와 마지막 성질은 극단이며 악덕일 것이고, 중간 성질이 덕, 또는 탁월성
일 것이다. 따라서 비겁과 만용 사이에 용기가 있고, 인색과 낭비사이에 관후(寬
厚), 나태와 탐욕사이에 포부, 비열과 자만사이에 겸손, 비밀과 다변사이에 정직,
침울과 경거망동사이에 쾌활, 호전성과 아첨사이에 우정, 햄릿의 우유부단과 돈키
호테의 저돌사이에 자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리나 행위에 있어서의 '올바름'
은 수학이나 기계에서의 '올바름'과 다를 바 없다. 최고의 행위가 최선의 결과에
이르게 하는 정확성과 적절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중용은 수학적 의미에서의, 그러한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두 극단의
정확한 평균은 아니다. 중용은 각 상황의 부대적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며, 단지
그 자체로 원숙하고 유연성 있는 이성에서만 발견되어 진다. 탁월성은 훈련과 습
관으로 인하여 획득되어지는 기술이다. 우리가 덕이나 탁월성을 지니고 있기 때
문에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함으로써 이 덕목
들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덕목들은 인간이 그에 관련된 행위를 함으로써만
형성된다.」(윤리학) 현재의 우리는 반복적 행위의 소산이다. 그런데 탁월성은
행동이 아니라 반복이다. 「인간의 선은 탁월성을 수단으로 완전한 삶을 이루려
고 하는 영혼의 활동이다…… 한 마리의 제비나, 또 하루의 화창한 날이 있었다
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듯이 하루아침에 인간은 축복 받을 수도, 행복하게 될
수도 없다.」(윤리학)
청년기는 극단의 시기이다. 만일 청년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것은 항상 과도와
과장 때문이다. 청년의 가장 큰 어려움은(많은 장년에게조차도) 상대편의 극단에
빠지지 않고, 현재의 극단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한 극단은 '지나친 교정'이나
다른 길을 통하여 다른 쪽의 극단으로 쉽게 통하기 때문이다. 불성실을 너무 많
이 비난하면 수치심은 자만의 벼랑에서 방황한다. 한 극단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중용이 아니라 반대쪽 극단에 덕의 영예를 부여 할 것이다. 우리가 한 극단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가끔 그것도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극단을 목표로 해야만 한다. 그래야 중도에 도달할 수 있다. 마치 굽은 목재를 곧
게 하려는 사람처럼.」(윤리학) 하지만 자신이 극단주의자임을 의식하고 있지 못
하는 자 들은 중용을 최대의 악덕으로 보고 「중도에 서 있는 사람을 반대쪽 극
단으로 몰아 부친다. 겁쟁이들은 용감한 사람을 경솔하다고 하고, 경솔한 사람들
은 겁쟁이라고 부르며,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윤리학) 현대 정치에서도
'자유주의자'는 '급진주의자'에 의해서 '보수주의자'로 불려지고, '보수주의자'들
에 의해서 '급진주의자'로 불리워진다. 이 중용주의는 그리스 철학의 거의 모든
체계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태도를 공식화한 것임은 명백하다. 플라톤이 덕을 조
화로운 행동으로 불렀을 때, 소크라테스가 덕과 지를 동일시했을 때 이 중용설을
염두에 두었다. 칠현인(七賢人)은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과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라고 새겨 넣음으로써 이 전통을 확립했었다. 아마도 니체의 주장(비극의
탄생)처럼, 이 모든 것은 격렬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억제하기 위한 그리스의 시
도였을 것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정열은 그 자체가 악덕이 아니라 그
것이 과도와 부절제로 기능하느냐, 아니면 수단과 조화로 기능 하느냐에 따라 악
덕 또는 덕의 원료가 된다는 그리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같은 관념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 가치는 결코 절대적이 아니라 오직 상대적일 뿐이다…… 인간성
의 어떤 성질은 당연히 있어야 할만큼 풍부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는 이러한 성질에 가치를 두고…… 함양, 계발한다. 이러한 평가의 결과로써 우리
는 이러한 성질을 덕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같은 성질이 지나치게 풍부하면 우리
는 이것을 악덕이라 부르고 억압하려고 한다.)-카버, 사회정의론
하지만 중용은 행복의 비결의 전부는 아니라고 우리의 사무적인 철학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역시 상당한 정도의 속세적 재산을 소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재산
이 귀족적 관심과 매력의 근원이 되는 빈민과 탐욕으로부터 사람을 자유롭게 하
는 반면에, 가난은 사람을 날카롭고 욕심 많게 만들기 때문이다. 행복에 대한 가
장 고귀한 외적 지원은 우정이다. 사실상 우정은 불행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사람
에게 더 필요하다. 그것은 행복은 공유함으로써 배가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정은
정의보다도 더 소중하다. 그 이유는 서로 친구일 때 정의는 필요 없지만, 사람들
이 공정한 경우에 여전히 은총이며, 벗은 두 몸 에 깃 든 한 개의 영혼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우정은 많은 사람들보다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하다. 많은 친구
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 명의 친구도 없는 사람이며, 많은 사람들과의 친구관
계는 완전한 우정의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아름다운 우정은 발작적인 집중보다는
오히려 지속성을 요구하며, 이것은 성격의 고정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정이 만
화경으로 변화하는 원인을 성격의 변화로 돌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감사하는 마
음은 불안정한 기반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선가는 대개 그들이 받는 것보다
자신들이 친절을 베푸는 대상들에게 더 많은 우정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
부분 사람을 만족시키는 이 문제에 대한 설명 은 채권자이고 한쪽은 채무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채무자는 채권자를 계속 보존하려고 열망하지만, 채무자는 채
권자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설명을 거부한다.
그는 예술가의 자기 작품에 대한 사랑, 또는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유추
해서 자선가의 부드러운 온정을 설명하려 하였다. 사람은 자신이 만든 것을 사랑
한다.
하지만 외부적인 재산과 관계가 행복에 필요하다 할지라도 행복의 본질은 우리의
내부, 즉 원만한 지식과 깨끗한 영혼에 남게 된다. 분명히 감각적 쾌락은 그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순환도로이다. 소크라테스가 조악한 에피쿠로스적 관념을 비꼬듯
이, 우리는 긁으면 가려워지고 가려워 지면 긁는 것이다. 정치적 경력도 그 길이
될 수 없다. 민중만큼 변덕 스러운 것은 없으며, 정치적 길에서는 그 민중의 변덕
에 얽매여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반듯이 정신적 쾌락이어야 하며, 그것이 진리
획득의 추구로부터 올 때에 만 믿을 수 있다. 「지성의 작용은 그 자체 외에 어
떤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자체 내에서 더 나은 움직임으로 지성을
자극하는 쾌락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기만족, 의연함, 휴식능력 등의 속성은……
이러한 이성적 작용에 속해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완전한 행복이 그 안에 있음
에도 명백하다.」(윤리학)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인간은 단순한 형이상학자는 아니다. 그가 충분
히 마음을 쓰는 일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므로 쓸데없이 위험에 뛰어 들지는 않지
만, 큰 위기가 닥치면 기꺼이 목숨조차도 바친다. 어떤 조건하에서는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에게 봉사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
지만, 남에게 봉사하려는 기질이 있다.
친절을 베푸는 것은 우월성의 상징이고, 친절을 받는 것은 종속의 상징이다... 그
는 공개적인 선전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그는 혐오와 호의에 공개적이며, 사람들
과 사물을 경멸하기 때문에 언행에 솔직하다. 그의 눈에 위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므로 결코 찬양에 열렬하지 않다. 그는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공손
하지 않다. 공손은 노예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악의를 느끼지 않으며,
모욕은 항상 잊어버리고 지나친다... 그는 토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칭
찬 받거나, 다른 사람들이 비난받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의 적에게조차도 직접 대하지 않고는 결코 험담을 하지 않는다. 그의 태도는
침착하고, 그의 목소리는 굵고, 그의 말은 신중하다. 그는 서둘지 않는다. 단지 소
수의 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열정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중요한 일
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음성과 급한 걸음은 근심에 싸인
자들의 전유물이다... 그는 훌륭한 전술로 제한된 군대를 지휘하는 노련한 장군처
럼, 위엄과 품위로써 인생사를 견뎌내며 그의 환경을 최선의 것으로 만든다... 덕
또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 그 자신의 최대의 적이어서 고독을 두려워
하는 반면에 그는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이므로 은거를 좋아한다. (윤리학)
이러한 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인이다. -출처:윌 듀란트의 哲學이야기 중
아리스토텔레스(BC384∼322)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아테네 북쪽 200마일쯤에 있는 마케도니아의
도시 스타기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의 왕이며 알렉산더의 조
부인 아민타스의 친구이자 주치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대 의료 단체인
아스클래피아드의 일원이었던 것 같다. 그는 후세의 많은 철학자들이 신성한 분
위기 속에서 자란 것과는 달리 약 냄새 속에서 자랐다. 그는 과학적 성향을 개발
시킬 모든 기회와 자극을 가지고 있었으며, 처음부터 과학의 창설자가 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제자로 그의 학파를 소요학파(Peripatos)라고 함.
▲저작으로는 논리학 오르가논으로 종합되고, 제일 철학은「메타피지카」와 합
쳐서 후에 형이상학이라 불렀고, 자연과학에 관한 것으로는「피지카」,「생성과
소멸에 관하여」,「동물지」,「영혼에 관하여」등이 있음. 또 윤리학에는「니코마
코스윤리학」, 「에우데모스 윤리학」,「정치학」등이 있고 창작에 관해서는
「詩學에 관하여」가 있음.
【논리학】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
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3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3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 한 공리
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
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운동·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
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 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
로 자연 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 인 엔텔레
케 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
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형이상학】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
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
되는 존재자 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
나, 영원 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
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
극 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
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
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
이다.
【정치학】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
된다. 그런 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
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
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학】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
이 불행에 빠져 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
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
(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
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
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
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
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
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
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
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