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난롯가에서 띄우는 소박한 몽상
아직 아침 햇살이 저 멀리 산 너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시간이다. 세상이 온전히 깨어나기 전, 거리의 가로등조차 제 빛을 다하고 가물거릴 즈음이면 나는 홀로 가게를 정리한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목도리를 여미며, 이곳에 새로 놓인 낯선 물건이라도 보듯 흘긋거리며 지나친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든 나에게 이 이른 아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의 시간이다.
어제의 장사가 어떠했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매출 장부의 숫자들은 어둠과 함께 덮였고, 시간이 지나버린 그 자리에는 오직 정적만이 감돈다. 이 고요한 틈을 타 하루를 뒤돌아보며 나만의 사색의 늪으로 깊이 빠져든다. 그 늪은 축축하고 어두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어지러운 마음을 정화해 주는 맑은 옹달샘에 가깝다.
새벽녘 대기 중에 한두 개씩 흩날리던 눈발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다시 추워질 것이라는 기상 예보대로 기온은 가파르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열어둔 문틈으로 스미는 칼바람에 몸이 오그라든다. 난로 옆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난로의 온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올 때쯤, 가만히 눈을 감아 본다.
닫힌 눈꺼풀 너머로 아득한 지난날의 풍경이 상영되기 시작한다. 고향 집 뒷산, 소나무 향이 알싸했던 그 언덕에 올라 멀리 내다보이는 들녘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의 나는 참으로 당당했다. 지평선 끝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며 이다음에 무엇이 될까를 고민하던 소년의 가슴 속에는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아도 모자랄 커다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물론 그때의 생각대로 이루어진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꿈들의 가치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때의 포부는 정말 대단했다. 어릴 적 희망이란 계절마다 바뀌는 옷과 같은 것이라지만, 나의 희망은 유독 거창했다. 한마디로 ‘세계를 내 손안에 휘어잡는’ 사람이 되겠노라 호언장담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터져 나올 만큼 터무니없는 희망이었지만,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른다. 불가능을 몰랐던 그 시절의 순수함이, 비록 지금은 작은 가게의 난로 옆에서 발을 녹이는 중년의 사내가 되었을지언정 나를 지탱해 온 힘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거창했던 희망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던 기억 때문일까. 나는 자식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얘들아, 너무 큰 욕심보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렴.’
훗날 아이들이 자라서 아빠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며 쓰라린 회한 대신 즐거운 웃음을 지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상실감을 아이들이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아비의 소심한 배려인 셈이다.
그러나 아내는 이런 내 교육관이 영 마땅치 않은 모양이다. ‘이왕이면 꿈을 크게 가져야지, 왜 애들 기를 죽여요?’라며 뭇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르침을 내세운다. 큰 꿈을 가져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아내의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꿈을 크게 가진 자는 큰 세상을 보게 되지만, 그만큼 낙심의 골도 깊을 것이다. 반대로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은 성취의 기쁨을 자주 맛보며 자족하는 삶을 살겠지만, 자칫 매사에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인생은 결국 그 두 극단 사이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새벽부터 난롯가에 앉아 별 말도 안 되는 철학적 사색에 잠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나에게 허락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 행복하게 다가온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직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이 새벽의 고독은 나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난로 옆에 바짝 붙어 있는데도 발끝이 시려 온다. 양말 속으로 파고드는 찬 기운을 보니 아마 이삼일간은 매서운 한파가 몰아칠 모양이다. 추운 것을 질색할 정도로 싫어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추위가 싫지 않다. 차가운 공기가 있어야 난로의 따스함을 더 절실히 느낄 수 있고, 어둠이 짙어야 곧 다가올 아침 햇살이 더 눈부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일은 아이들에게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꿈의 크기가 크든 작든, 네가 그 꿈을 꾸며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식어가는 차 한 잔을 들이켜며, 나는 졸고 있는 햇살이 산등성이를 넘어 빌딩숲을 헤쳐 나오기를 조용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