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씨 일가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청계동성당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1898년 교인수 140명이었던 것이 1900년에는 청계동 본당의 교세는 25개 공소에 영세 신자 800여 명, 예비 신자 600여 명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1902년에는 영세신자 1,200여 명, 인근에 사는 신도들까지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주일 예배 행사 때에는 넓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신도들이 마당에까지 가득 찰 정도가 되었다. 이처럼 놀라울 정도의 교세 신장은 안태훈의 열정과 안중근의 전도역할이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인근 백성들이 안씨 가문과 외국인 신부의 보호를 받고자 신자가 된 사람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천주교 청계동 본당과 교우
청계동 성당의 교세가 크게 늘어나고 빌렘과 안태훈이 지역 주민들의 신망을 받게 된 것은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1897년 11월 어느날 뮈텔 주교가 청계동을 찾는 길에 신천군(청)을 방문할 때 군수가 직접 나와 영접한 것이 알려지면서 천주교의 위상이 더욱 크게 높아졌다.
안태훈과 천주교의 위상이 강화될수록 정부기관의 감시와 질시는 심해졌다. 마침내 해서교안(海西敎案)이 일어났다. 1890년부터 황해도 지역에 천주교도가 급속히 증가되면서 관리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교도들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벌어졌다. 3년여 동안 교도들의 반발이 일어나면서 이 지역 천주교의 본부 역할을 하던 안태훈 형제들에게 고난이 닥쳤다.
신천군 일대에서 천주교도와 지방정부의 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안태훈, 안태건, 빌렘신부는 거의 매번 주역의 역할을 하였다. 안태훈이 동학농민운동 때의 악행 때문에 신천군 감옥에 갇히자 빌렘신부가 군수에게 항의하여 안태훈을 석방시켰다. 또 안태훈은 "천주교 신자가 되면 빌렘신부를 통해 관청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며 해주민들을 상대로 전교활동을 펼치다 해주감영에 투옥되었는데, 이때도 빌렘신부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또 1899년 2월 안태건은 빌렘신부와 함께 무리 100여 명을 거느리고 안악군아에 돌입하여 도적혐의로 구금된 천주교도 3인을 석방시켰다. 이때 안태건의 요청으로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을 대질 신문한 결과 천주교도들의 범법행위가 드러났다. 그러나 안태건은 천주교도들의 무죄를 고집하며 자의로 죄수를 데리고 나갔다.
마침 이날은 장날이라 그 사건을 목도한 많은 이들이 안태건의 무법행위를 개탄했다고 한다. 또 1903년 1월 15일에 조선정부는 군아에 난입하여 군수를 협박하고 행패를 부린 천주교도 6인을 잡으러갔다가 사로잡혀 무수히 구타당한 순검들에게 "다시 오면 결단코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협박한 빌렘신부의 소환을 청하는 조회문을 프랑스공사관에 보냈다. 이처럼 서양신부를 배경으로 하는 천주교도들의 토호활동은 대한제국 정부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주석 7) 안태훈 가문과 천주교세력, 그리고 정부사이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정부는 사핵사 이응익을 파견하여 그동안의 분쟁과정을 자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이응익은 고종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안태훈 형제와 빌렘신부 등을 체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천주교 청계동 본당
이번 교도들의 소요는 옛날에 없던 변고로, 무리를 모아 각각 교파를 세우기도 하고, 관청에서 하는 것처럼 송사를 처결하기도 하며, 형구를 만들어놓고 평민들을 못살게 굴기도 하고, 사사로이 사람들을 잡아들여 남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고, 심지어 땅주인을 위협하고 관청에서 보낸 사람에게 대항하여 쫓아내기까지 하는 등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안태건은 교사(敎士)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억누르고 무기를 가진 사람들을 모집하여 제 몸을 보호하고, 이용격은 이웃고을에까지 호령하며 노약자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무리를 모은 것이 무슨 의도였겠습니까.
이들은 마치 강도들과 흡사하고 명분없는 재물을 모은 것이 남의 집 재산을 도적질 하는 것보다 심했습니다. … 안태훈은 청계동 와주라는 말을 듣고 있는 자로 황해도의 두목이라는 지목을 받고 있는데 아직도 잡히지 않고 있으니 끝내 관대히 용서해 주기는 어렵습니다. … 이른바 홍교사(洪敎士) 라는 자는 프랑스 사람인데 청계동에 살고 있습니다. 8, 9개 고을들이 모두 그의 소굴이 되고 6, 7명의 교사가 그의 손발이 되었습니다.
전도를 핑계로 연줄을 맺고 폐단을 키우고 있으며, 행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소송도 그가 직접 판결하고 손을 묶고 발에 형틀을 채우거나 무릎을 꿇라는 형벌을 평민에게 함부로 시행했습니다. 이는 천하의 법률을 남용한 짓으로 우리 나라와 프랑스 양국 간의 조약에도 실려 있지 않은 바입니다. 또 곽교사 라는 자는 홍교사의 못된 짓을 본떠 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외부로 하여금 프랑스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두 사람을 잡아다 조사하고 그 나라의 율례에 따라 심리하고 판결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사리에 부합될 것입니다.(주석 8)
관리들이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이긴 하지만, 안태훈 일가가 세력을 믿고 지방에서 다소 행세를 했던 것 같다. 안태훈은 해서교안의 주모자로 지목되고, 1899년 3월 안태건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빌렘신부의 노력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그러나 안태훈 일가의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은 아버지와 삼촌이 관가에 끌려가는 등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서울로 뮈텔주교를 찾아가 구원을 요청하는 등 몇 해 동안 '해서교안'에 매달려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이 기간 신앙심을 크게 향상되었다. 그렇다고 안중근의 교리나 맹신하는 그런 신앙생인은 아니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천주교를 탄압하는 관리들이나 심지어 빌렘신부의 오만 무례한 행위에 대해 심하게 규탄하기도 하였다. 이무렵 안중근의 활동 중에서 몇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금광의 감독이라는 자리에 있는 주 씨라는 사람이 천주교를 비방하고 다녀 그 피해가 자못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대표로 주 씨가 있는 곳으로 파견되었다. 그에게 사리를 따져가며 질문을 하고 있는데 금광 인부들 사오백 명이 험악한 기세로 각기 몽둥이와 돌을 들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도 전에 나를 두들겨 패려고 나오니, 이것이 바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경우였다. 다급해진 나는 다른 방도가 없어 오른손으로는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고 왼손으로는 주 씨의 오른손을 잡고서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네가 비록 백만 명의 무리를 가졌다고 해도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려 있는 줄 알아라."
주 씨가 대단히 겁을 내며 둘러선 인부들을 물리쳐 내게 손을 못대게 했다. 나는 주 씨의 오른손을 움켜 쥔 채로 출입문 밖으로 끌고 나와 십여리를 함께 간 다음에 그를 놓아 보내고 나도 무사히 돌아왔다.(주석 9) 여기에서도 안중근의 상무적인 기풍과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그는 어떠한 위급한 경우에도 물러서거나 몸을 사리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옹진군(甕津郡)에 사는 교인 중의 하나가 서울의 중앙 대관(大官)에게 돈 5천냥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상대가 중앙의 고관인지라 교인은 돈을 빼앗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안중근은 서울의 대관 집에 찾아가 당당하게 이치를 따져 대관을 굴복시킨 다음 돈을 돌려주겠다는 확약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주석
7 - 안영섭, 앞의 책, 253~254쪽, 재인용.
8 - <승정원일기>, 1903년(음) 6월 30일, <고종실록>, 1903년 8월 21일자.
9 - <안응칠역사>. 40~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