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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짓이겨서라도 하느님 사람을 만드신다.
하느님 사랑안에 머물게하신다."
----김수환(추기경님)이야기중에서
21차 평화의 마을 "비움의 잔치"
09 새해맞이 영성 공동단식 참가 후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태 공동체 마을
2009년 1월 1일(목)
18:55
권 관장님이 마이크를 잡았다. 황대권 선생을 소개. 야생초 편지 저자다. 시국 사건으로 14년 옥고를 치뤘다. 생태공동체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작년 쿠바를 함께 여행하였다. 즉문즉설 행사 김경재 목사 백미였는데, 진행과 사회를 이끌었다. 영동에 자리를 잡았다가 영광으로 옮겼다.
18:59
황대권 선생 강의를 시작하다.
나는 강의를 할 때 같은 얘기를 하지 않고 현장에서 청중과 교감을 통해 얘기를 주로 한다. 10여간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했다. 현장에서 청중들이 관심을 가졌을 때 강연이 좋았다. 85-98년까지 감옥에서 지냈다. 엠네스티에서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되어 많은 편지를 받았다. 답장을 꼬박 영어로 보내 많은 사람에게 보냈다. 출소후 전라도에서 농사 짓고 있는데, 그들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위로하기 위해 쓴 편지로 보낸 사람이 위로받았다. 3개월 동안 유럽을 돌다가 영국에 갔을 때다. 어느 고등학교에 초청받아 갔는데, 엠네스티가 그 학교에서 행사를 한다. 인권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을 회원 가입하게 하고(우리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연설을 하라고 했던 것 같다. 분과 토의가 끝나고 강당에서 퍼포먼스를 한다. 제3세계 독재정권 아래서 잡아서 고문하는 장면을 연극하는데, 얼마나 사실적으로 하는지 나도 깜짝 놀랐다. 감옥 나온지 1년도 채 안 된 시점이라 그걸 보고 나는 쇼크를 받았다. 연극은 1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끝나자마자 조명을 켜더니 나보고 나와서 연설을 하라고 하였다. 유럽을 다니면서 몇 번 연설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5분 동안 ...감탄사만 몇 번 하고 겨우 '인권을 위해 힘써 달라'하고 내려왔다. 스스로는 최악의 연설을 했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후 주최자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아이들에게 감명 깊었다. 덕분에 많은 아이들이 가입을 해서 성공적이었다'는 내용이다.
얘기 내용보다 관중과의 교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청중이 준비만 되어 있으면 아무 얘기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사실 강연에서 번잡한 이론을 얘기해봐야 몇 개월 지나면 남는 게 없다. 순간 강사를 통해 기운을 얻어가는 게 더 크다.
오늘 나누고 싶은 얘기는 죽음에 대해서다. 사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삶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글을 쓰며 강연하며 제일 많이 한 얘기가 앞으로 몇십년 후에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구 환경이 급속히 파괴되어 인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총체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게 '죽음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일부는 십승지를 찾아 떠나기도 하는데, 생태계가 통째로 붕괴하는데 안전한 곳이 어디 있을까? 안전한 곳은 없다. 죽을 때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해보자.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살아오면서 죽을 뻔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도 여러 번 고비가 있었다. 세 번 기억난다. 두 번은 감옥이고 한번은 사회에서였다. 첫 번째 고비는 미국 유학시절, 80년 초반 유학을 갔는데, 플로리다에 있는 친구가 초청하여 플로리다 해변에 갔다. 비치가 환상적이고 멋있었다. 특희 모래 사장에 야자수 풍경에 황홀하여 바닷가를 드라이브 하다가 차를 세우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경치에 홀려 바다에 들어갔는데, 사구 꼭대기에서 바다로 들어갔는데 발이 닿지 않고 육지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죽었구나 생각하니까 아름다운 풍경이 칼라에서 흑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놀래긴 했지만 순간 생각을 시작했다. 우선 나의 능력을 파악하였다. 5미터쯤 헤엄치면 힘이 빠진다. 그렇다면 물에 떠 있어야 한다. 숨을 크게 쉬고 떠 있었다. 두 번째는 육지 위치를 알아야 한다. 예전에 배웠던 해풍과 육풍을 떠올렸다. 바닷 바람을 판단하여 방향을 잡고 물장구를 치며 천천히 쳤다. 5분-10분 물장구치니까 사구가 보였고 살아났다. 나중에 돌이켜보면서 많은 사실을 깨우쳤다. 첫째 죽는 게 너무 간단하다는 것이다. 자연이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언제든지 데려갈 수 있다. 우리는 그걸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두 번째로 죽음의 문턱에서 하늘을 봤을 때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흰구름이 떠다니고 있다. 나는 죽을지 모르겠지만, 저들은 그대로 살고 있구나. 살 수 있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따랐기 때문이다. 내 힘에 의지하여 몸부림쳤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만약 죽었다면. 나를 온전히 맡겼을 때는 죽든지 살든지 큰 문제가 안 된다. 어느 고승이 호랑이를 만나, 자진해서 호랑이에게 먹혔다. 스님은 삶과 경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죽을 인연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자연의 법칙인 먹이 사슬이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가 물소 떼를 잡아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연의 흐름이다.
생태주의 시대에 인간이 살아남으려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생각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생각을 했다면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지금도 당시 갈매기나 흰구름이 그림처럼 생각이 난다. 일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순간이었지만 명상의 요체가 집약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죽음을 경험한 것은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전두환 정권이 엮어 만들어 끌려가서 남산 지하실에 두 달 동안 고문을 받았다. 60일간의 고문의 기간은 두 번째 겪은 죽음의 경험이다. 아직도 그 당시 기억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다. 두 달 전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고문 피해자 증언을 했다. 홍성담 화백과 *** 모두 셋이 얘기를 했다. 오래전 얘기라 담담한 심정으로 갔다. 몇 마디 하고 고문 장면에 들어가니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났다. 간신히 증언했다. 홍성담 화백은 성격이 외향적인데, 그 역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홍화백은 그림으로 고문 당한 그림을 남겨두었고, 슬라이드로 보여주었다. 나도 언젠가는 글로 쓰고 싶은데 그런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옆에 있던 정신과 의사 세명이 (고문피해자를 돕기 위한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 얘기를 듣더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상처를 건드리면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증세라고 한다. 상처가 그대로 있어 시간이 정지된 것이다. 평상시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기억을 끄집어 내면 상처가 말을 한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국가보안법으로 수십 만 명이 기소되어 고문을 받았는데, 아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 이 얘기는 너무 길어 생략하고자 한다. 이 경험이 인생관을 바꾼 중요한 경험이다. 이전까지는 서양 합리주의 교육을 받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계획하고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저지르지도 않는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받으니 엄청난 혼돈이 왔다.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직후에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신을 받아들여, 신을 상정하지 않으면 헤어날 수 없었다. 지나고 보니 하느님이 아니어도 그만인데,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을 보는 눈이 겸손해졌다고 할까. 20대 후반이었지만 머리 속에서 멋대로 세상을 뒤짚어 엎을 때였는데,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인간의 머리로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세계를 인정하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새롭게 구축하였다. 하느님이 뭔가 신이 뭔가 생각하였다. 가톨릭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인데 만약 옆에 이슬람 수사가 있으면 이슬람을 믿었고, 스님이 있으면 불교를 믿었을 것이다. 나는 독방에 있었기에 (방안엔 플라스틱 식기 4개와 목침 밖에 없었다)...책도 없고 아무 할 일도 없었다. 하루는 벽을 보니 신문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게 가톨릭 신문이었다. 연재소설이 가톨릭 순교사였다. 읽으면서 가톨릭 역사에서 그렇게 많은 순교자가 나온 지 처음 알았다. 나의 처지를 순교자들의 처지와 동일시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 유교가 국교였는데, 천주교는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없앤 것이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사상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그들과 금방 동일시하게 되었다. 분단 시대의 순교자로 생각하여 바로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순교자의 종교로 생각하여 받아들였다. 징역 사는 동안 열심히 신앙 생활을 했다. 성서 공부, 기도 생활, 봉사 활동도 열심히 참여했다. 안동교도소에서 천주교 회장까지 지냈다. 받아들이긴 했지마 본당 활동은 잘 모른다. 가톨릭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징역 생활하면서 형량, 죄목에 납득하지 못했다. 내게 맺힌 응어리, 억울함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것을 풀어보려고 갖은 짓을 했다. 안에서 정치 투쟁을 많이 했다. 문짝을 차고, 단식 투쟁하고, 밀서를 내보고 했지만 결국은 다 허사로 5년을 보냈다. 장기수라 다행히 변화될 수 있었다.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5년째 되던 해, 아내도 떠났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가정도 파괴되고 건강도 무너졌다.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난동을 계획하였다. 감옥 안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기소가 되어 추가 징역을 받는다. 감옥 안에서 사람을 죽여도 추가 징역은 3년밖에 나오지 않는다. 무기수가 추가 징역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추가 징역을 받기 위해 범죄를 모의하는 것이다. 당시 독방에 갇혀서도 김일성 만세 부르면 추가 징역 3년을 받았다. 무기수 이**이라는 동료는 '북한도 먹고 살 만하다'고 말해 추가징역 3년을 받았다. 우리 국민들은 보수 세력들의 사고방식을 잘 모른다.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정도다. 상식의 수준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오늘 같은 설날에 삶은 계란을 사서 돌렸다가 간첩으로 또 고발당했다. 간첩이 사람 포섭하기 위해 계란 돌렸다고..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양심수 석방하라는 구호를 개신교 집회를 점거해서 삐라를 뿌리고 난리를 쳤다. 밤새 볼펜으로 150장 만들어 뿌렸다. 그 정도면 충분히 기소될 줄 알았다. 사건 이후 강경대 열사 사건이 터지고 한 달 동안 분신 정국이 펼쳐졌다. 안기부에서는 감옥 일에 신경 쓸 일이 없어 자체 처리하도록 했다. 나는 공개 변론하는 목적으로 일을 벌였는데, 기소는 커녕 자체 해결하라고 해서 징벌방에 들어갔다. 제일 긴 기간이 두 달이다. 고문도 60일인데, 난동 벌여 징벌방에 60일 들어갔다. 이 시점이 최악의 상태였다. 일반수 두 명은 엄청나게 맞았다. 12년 짜리인데 나 때문에 형기를 다 채우고 나왔다.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열심히 살고 있다. 나를 담당하던 보안과 계장이 취조하면서 때리지는 못했다. 정치수는 인권 문제 시비가 벌어질까봐. 주먹을 부르르 떨면서 욕을 하는데, 분노의 불빛에 눈에서 일어났다. '너 같은 빨갱이 간첩은 무조건 싫어'하면서 증오의 눈빛을 쏘는데 진짜 무서웠다. 그런 상황에서 더욱 냉정해졌다. 그 계장의 별명이 게슈타포다. 에프엠대로 근무하기에 재소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나 입장에서는 평소 존경하고 호의적으로 봤다. 그런데 취조하면서 증오하는데 미칠 정도였다. 그가 증오한다고 하면 나는 '사랑한다'라고 붙들면서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줄다리기를 했다. 결국 사랑이 이겼다. 나는 진심이었다. 징벌방에 갇히고 나서 계장이 찾아와 그날 흥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견지하면 결국 이긴다.
19:54(눈물과 흐느낌)
그 분이 그 말을 하고 다음날 출근하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19:55
그 분의 사망이 나하고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련의 과정이 그 사람의 생애에 좋지 않은 파동을 일으켰지 않나 생각한다.
극을 달리는 경험 속에서 징벌방에 갇혔다. 교도소 징벌방 한 평짜리 방에 수갑을 채우고 몸을 가슴에 붙이고 포승줄로 팔하고 몸통을 같이 묶는다. 남은 포승줄을 등에 또아리를 틀어놓는다. 천장에는 감시 카메라가 24시간 돈다. 형광등도 24시간 켜져 있다. 밥을 먹으려면 숟가락을 들 수 없어 개처럼 엎드려 먹어야 한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60일 생활하면 죽음이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누워잘 수 없는 것이다. 옆으로 누워서 잔다. 그날 평생에 해야 할 기도는 다 드린 것 같다. 성모송과 주기도문을 하루 종일 외웠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대들 것이다. 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욥과 같은 행동을 했다.
징벌방에서 나와 보니 초파일 가석방으로 1/3이 나가서 사동이 비어있었다. 징벌방에서 피같은 기도를 드렸는데, 하느님으로부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느님은 침묵이다.'를 느꼈다. 엔도 슈사쿠가 한 말이다. 일본도 바쿠후[幕府] 시절에 천주교인들을 많이 죽였다. 그걸 목도하면서 왜 저런 걸 보고 하느님이 가만히 계시는가 회의하면서 하나님은 침묵이다고 한 것이다.
나는 한발 더 나가, '하느님은 안 계시다'까지 나갔다. 야생초 편지는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살아지는 건 아니다. 내가 바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야 바뀐다. 내 의지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속의 티끌 만한 희망, 기대가 없어지니까 새로운 삶이 열렸다. 기대, 미련, 억울함이 가득 차 있으니 변화가 없었다. 그때부터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당시는 변화의 내용이 뭔지는 몰랐다. 죽지 말고 살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자연의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 결정적으로 책을 보는데 심장이 뛰다가 갑자기 섰다. 죽는구나 생각을 했는데, 좀 있다가 다시 심장이 뛰었다. 협심증이 왔다. 약을 먹어야 하는데, 한약을 분석해보니 야생초였다. 한약은 못 구해도 야생초를 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운동장에 난 풀을 가지고 와서 키우기 시작했다. 농대 나왔지만 대학에서 그런 건 배우지 못했다. 내 몸을 낫고자 풀을 기르는데, 풀이 자라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그리고 키우고 뜯어먹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세계관이 바뀌었다. 바뀌는 과정은 모른다. 생명의 세계관, 생명의 철학, 생태주의 철학을 갖게 되었다. 정치 이론으로 무장된 상태에서 누가 생태주의 얘기를 했다면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변하는 나를 비우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비우면서 모든 것인 변화하였다. 투쟁의 장소인 감옥, 이곳을 어떻게 벗어날까 생각하면 늘 괴로움의 장소였는데, 야생초를 키우면서 감옥은 나를 실현하는 장소로 바뀌었다. 감옥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마음을 바꾸니까 다른 세상이 되었다. 일체유심조. 꼭 그랬다. 출소할 때까지 마음이 상당히 편하게 징역 생활을 했다.
죽음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것이 나온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을 뻔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단순히 넘겨버리지 마시고 깊이 묵상해보십시오. 왜 그런 위기가 닥쳐왔는지, 그 위기를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러면서 죽음을 깊이 생각하면 많은것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출옥 인사로, 억울하지 않았느가? 허송세월 보내지 않았는가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경험을 어디 가서 하겠는가? 당시는 괴로웠지만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인생이 억울해 살맛이 나지 않는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이 사랑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하고 나왔다. 마지막으로 가진 신앙관의 요체다. 신앙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가지.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이 관념 밖에 없다. 그것이 감옥에서 나를 지탱해왔던 힘이고, 아무리 어려움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는...어려워도 잘 되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덕을 톡톡히 봤다. 신앙 생활하면서 ...
20:14
(휴식)
20:33
학생운동 출신이라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81년 전두환 정권이 유학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찾을 수 이싿. 1979년에 미국의 지배력이 약화된다. 이란 혁명, 니카라구아 혁명이 일어나고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지배권이 약화된다. 미국 보수층이 위기를 느껴 압도적으로 레이건을 당선시킨다. 레이건이 소련 공산주의를 미국의 군사력과 자본력으로 몰아붙이기 위해 무기 경쟁한다. 복지, 교육 예산 삭감하여 미국 대학이 어려움을 겪는다. 재정이 모자라는 부분을 제3세계 유학생에게 떠넘기게 된다. 레이건이 제3세계 국가에 유학 장벽을 철폐시킨다.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다. 토플이 뭔지도 모르면서 82년도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웨스턴 일리노이 유니버시티(주립대학)에 갔는데 한국 학생만 천명이 넘었다. 지금은 몇십 명도 안된다. 토플도 없이 받아들였다. 랭귀지 코스도 레벨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이용하였다.
그 학생중 하나가 랭귀지 코스 탈락하는 바람에 귀국하면서 평양 방문하면서 귀국해서 간첩단 사건으로 연결되었다. 나도 랭귀지 코스에 배정되었는데, 벼락치기로 토플 공부하여 바로 본과로 들어갔다. 과목을 보니 미국 보수주의 정치 과목밖에 없다. 배울 게 없어 미국 대학 카타록을 뒤져서 커리큘럼을 살펴보았다. 제3세계혁명론, 자본론, 제국주의론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는데, 이름이 무슨 스쿨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70년대 워싱턴에서 박동선 게이트가 났을 때(73년) 한국대사관 공보관이었던 이**. 유신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소환 명령이 떨어졌는데, 미국에 망명을 하였다. 의회에 나가서 박정희 대통령이 미 의회 매수한 것을 까발렸다. 이 박사가 미주 한인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 학교의 신방과 교수로 있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 때 외교관으로 발탁되어 외교 경력이 화려하다. 반체제 인사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일급 한국통이다. 나는 이 박사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봤다. 미제국주의의 빌붙어 한국의 정보를 소개하는 관점으로 봤다. 뉴욕에 있는 뉴스쿨로 갔다.
구미유학생 간천답 사건이 터지고 나서 워싱턴 정가 상원의원 15명의 서명을 받아 석방 탄원서까지 보내주었다. 우리 사건을 두 명은 사형, 두 명은 무기징역을 받았다. 판결 내리는 날 나는 서열상 3번째다. 두 친구는 3년간 사형수 생활을 했다.
20:50
생태마을은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로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갈 길은 마을 공동체라고 본다. 마을공동체가 희망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은 유학시절이다. 제3세계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주로 제3세계 혁명을 들여다봤다. 베트남 혁명을 집중적으로 봤다. 베트남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미국을 이긴 나라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을 베트남 민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강력하고 끈질기게 자기 주권을 지킨 나라가 없다. 역사 이래 최대의 제국을 다 물리쳤다.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을 다 물리쳤다. 시점에 모두 지상 최대의 제국이었다. 당시 호치민을 가장 존경했다. 왜 미국이 졌을까? 미국은 250회 전쟁을 통해 건설한 미국이다.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무적인데, 베트남에서 졌다. 미국의 정치인에게 베트남은 치명적 상처다. 미국 역사에서 유일한 패배였다. 막강한 미국이 베트남에서 진 이유를 다각도로 연구해보니, 그중에 '마을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베트남 전쟁을 빌리지 워라고 한다. 미국이 마을을 점령하지 못해서 졌다. 폭격을 해도 마을의 하드웨어만 파괴한 것이다. 마을 공동체라는 소프트웨어는 다시 살아나고 복구된다는 것이다. 마을은 정글을 통해서 네트워크화되었다. 미국은 공중에서 폭격만 하다가 물러선 것이다.
그렇기에 제국주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막강해도 마을만 지켜내면 우리가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은 프랑스가 바로 접수하여....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던 시기다. 자본주의 발달 역사는 공동체 해체 역사다. 마을을 쥐고 있으면 외세의 침입, 제국주의 침입으로 지켜낸다고 생각했는데,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마을 공동체가 없다. 그러면 없어진 마을을 만들자. 그래서 생태 공동체 운동이 생겼다. 새로 만드는 것이 엄청 힘들다. 많은 시도들이 대부분 실패했다. 성공한 것은 종교 공동체다. 종교라는 도그마가 있기에 마을에서 일어나는 차별이나 이견을 종교 지도자가 권위에 의해, 도그마에 의해 눌러줄 수가 있다. 그게 없는 일반 공동체는 조정이 안되어 다 깨진다. 그동안 많이 돌아다니며 보았다. 해외 공동체를 들여다보면 잘 되는 이유는 개인주의에 있다.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지만, 서양의 공동체 운동은 개인주의가 극에 달하면서 자본주의 속에서 소외현상이 나타나 공동체로 간 것이다. 각자가 개인주의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식민지에서 바로 현대로 넘어왔다. 50년 압축되어 개인주의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몸속에 공동체와 개인주의가 뒤범벅이 되어 있다. 유교적 봉건주의가 뒤섞여 있다. 공동체에서 만나면 서양은 문제가 생기면 합리주의로 해결한다. 합리주의 바탕이라 서로 인정하며 합리적으로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는 개인주의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기에 족보부터 따진다. 고향, 학교, 나이로 형, 아우, 선후배, 아저씨, 조카로 상하 관계를 맺어지면 합리주의가 실종한다. 문제가 생기면 종씨, 후배라고 감싸주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가 문제 생기면 파벌이 되어 결국 쪼개진다. 이런 서양식 공동체 모델이 잘 맞지 않는다. 종교 공동체는 성직자의 카리스마와 종교적 원리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커버된다. 그것에 대한 회의로 사람들이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었지만 기존 마을을 복원하자는 쪽으로 힘을 쏟았다. 그것도 힘든다. 기존 마을이 워낙 텃세가 심하다. 10년을 같이 살아도 공동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귀농자가 압도적으로 차지하지 않는 한 마을을 변화시키는 일은 거의불가능하다. 마을에 들어가기가 힘든다. 마을은 비어도 집을 팔지도 않고 빌려주지도 않는다. 전통 마을을 바꾸는 것도 힘든다.
그래서 나온 전략이(대세인 것 같다) 지역 공동체 전략이다. 귀농자가 마을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지역(면이나 군 단위)을 묶어 지역 공동체로 만들자는 게 가장 현실적 방법으로 현재 주된 흐름으로 되어 있다.
세 가지 모두 일장 일단이 있다. 세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다고 본다. 기존 마을에 들어가 어려운 것은 마을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기에 변화를 할 수 없다. 새롭게 만든 새로운 공동체는 들어오는 사람의 인간 관계가 처리할 수 있다면 환상적이다. 그게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모델은 기존 마을 근처에 생태 공동체를 건설한다. 기존 마을과 연계를 한다. 장기적으로 연대 속에서 생태 공동체를 건설하여 지역 전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이다. 개별적으로 마을에 들어가서는 힘을 쓸 수 없기에 그렇다.
이렇게 하고 있는 확실한 모델은 한국에는 없다. 이런 꿈을 가지고 시작을 했으나 가시적 성과는 아직 없다. 생명평화결사에서 시도하려고 한다. 이러한 사상을 자기가 사는 곳에서 실천하자는 것이다. 생명평화 마을이 공동체 마을이다. 올해부터 이런 것들을 영광(대마면)에서부터 시도해보려고 한다. 공동체 운동은 한 세대 지나야 성과를 말할 수 있다. 우리 나라 공동체 운동 30년 되었지만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다.
의견 있으면 말해달라.
21:09
질문 : 이스라엘 공동체와는 어떤가?
황 : 키부츠와 모샤브 . 키부츠는 공산주의 모델이다. 사적 소유가 없다. 이스라엘이 안정되면서 사적 소유 인정하는 모샤브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봐도 주기가 있다. 지금도 사적 소유가 강화되는 주기인 것 같다. 사적 소유를 많이 인정하는 공동체가 잘 되고 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사적 소유 용인하는 공동체가 아직은 없는 것 같다. 작년에 미국의 이타카 에코빌리지를 방문하였다. 지역화폐로 유명한 곳이다. 이타카는 대학 도시다. 코넬 대학이 있다. 인구 80%가 대학과 관련되어 있어 지적 수준이 높으니까 대안적 지역 화폐가 통용되고 생태 공동체가 가능하다. 구성원들이 보수가 많은 직업(교수, 변호사, 목사, 프리랜서 등)을 갖고 있기에 생계에 걱정이 없어 공동 노동 필요 없이 집집마다 개별 경제이지만, 한 자리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생태적 규칙을 지키고 살고 있고, 정기적 마을 모임을 하고, 커뮤니티 센터에서 세탁기 사용, 필요한 물건 서로 바꾸어쓰기 등을 하고 있다.
미국 공동체의 원조인 더팜(The Farm)은 철저한 공동체다. 68혁명 이후에 생긴 공동체로 공동 노동,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단체로 신천지를 찾아서 떠난 전설적 얘기가 있다. 테네시주 서머타운에서 천명이 넘는 청년이 공동체 생활를 했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탈하고 남은 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가보니까 피폐해진 상태다. 해먹을 짜서 팔고 있다. 커피살 돈이 없을 정도로 어렵다.
영국의 브르더호프 공동체(bruderhof community)는 잘 굴러간다. 공동체 경제를 기업식으로 운영한다. 주력 사업이 아동용 장난감 만들기다. 친환경적 기업을 운영하며, 원목으로 만든 장난감을 생산한다.
더팜은 자발적 가난을 나타낸다. 나는 자발적 가난과 자본주의 중간 쯤에 있다. 둘 사이의 긴장과 균형이 필요하다.
한농복구회는 안식교인들이 만든 공동체로 사적 소유가 없다. 회사는 자본주의적으로 운영한다. 친환경농산물을 가공해서 판매한다. 전세계에 12개 지부로 펼쳐나가고 있다.
21:24
권 관장 : 교육공동체가 퍼지고 있다. 성미산마을, 부산, 평택 느티나무, 대전 민들레육아공동체 등. 부산 화명동 공동육아팀도 있다. 생태 육아와 공부방을 운영한다. 24 가구가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참여자의 아이들이 서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황 : 한국의 특수성이다. 교육을 중심에 놓고 지역 공동체 만들어 가야하는 게 일반적 형태다. 간디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도시는 성미산 마을과 부산 화명동이 경이적 사례다. 도시에서는 공부방, 공동육아, 대안학교 등 도시 지역에서 많은 움직임이 있다. 부산 화명동은 아파트 운동과 관련이 있다. 가구수가 늘어나면 아파트 지역의 학교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 도시의 지역 공동체 운동도 상당히 중요하다.
21:31
백배 절하기를 한다.
* 잘 생긴 이효진 농부가 춘천에서 도착했다.
(퍼온글)
(기록 연오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