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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둘째 날(8월 5일)
(19)
안심로 보성다향길
호남정맥 종주때 이후 다시 맞게 된 보성의 여름밤을 평상 위에서 보낸 후 배낭 꾸리는
소리에 주인 영감이 잠을 깼나.
먼동이 터올 때 메모만 남기고 나오려 했는데 아침식사를 하고 떠나라며 말리는 그.
배낭을 메고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잠시 기다리라더니 누룽지팩(판매용)을 들고 왔다.
간밤에 나눈 대화중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누룽지 얘기를 기억했나.
그는 자기의 비상식량을 내 배낭의 겉주머니에 쑤셔넣으며 무탈하기를 빌어주었다.
기약은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그와 재회하기 위해 다시 찾게 될 것 같은 군학마을.
마을 버스정류장에 모여있던 첫버스 노파들이 버스에 오르면서(밭일 가는 중인 듯)
"영감님은 왜 안타요?"
삼남대로 종주때 노성면(충남 논산시)의 이른 아침에도 같은 말을 들었는데.
그 때는 마치 낙오자가 된 듯한 감상에 젖어들었는데 이 아침에는 왜 별무감각이었을까.
감성마저 둔해진 늙은이가 되어버렸는가.
남부관광로(18번국도)와 방조제를 번갈으며 해안을 따라 명교해수욕장을 지났다.
율포해수욕장까지 부분적으로는 '다향길1코스'로 조성된 길을 걷게 되어 있다.
호남정맥이 통과하는 봇재와 그 주변의 대규모 다원(茶園)들이 북(北)과 서(西)로 지근
이기 때문인지 녹차향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듯한 길이다.
다원 주변에서 차문들을 활짝 열어놓고 잠자기를 정기적으로 한다던 청년이 생각났다.
호남정맥 종주때 나를 봇재에서 보성읍내 까지 태워준 그는 숙면과 피로 회복에 지대한
효과가 있는 녹차향이라고 했는데 검증이 된 효과인지?.
녹차가 생명의 차로,보성이 다향(茶鄕)으로 불리는 까닭이며 일명 삼보의 향(三寶鄕)에
다향이 포함되는 이유일 것이다.
무릇 차는 물빠짐이 좋은 토양과 주야의 온도차가 큰 안개지역에서 자라야 색과 미(味),
향이 탁월하다는데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지역이 바로 보성이란다.
보성은 우리나라 차 생산량의 약 60%를 점유할 정도로 절대적인 차 생산지라는 것.
(보성은 다향과 함께 충신 열사와 선각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하여 의향(義鄕), 서편제를
비롯해 보성소리의 고장이라 해서 예향(藝鄕) 등 삼보향으로도 불린다)
내 식습관으로는 이례적으로 아침에 점심을 먹었다.
서남동 해안길에서도 아침식사는 거르고 점심과 저녁의 식사를 빵과 매식으로 한끼식
나눠 하고 있다.
그러나, 해안에서는 1인용 메뉴 만나기가 용이하지 않아 굶거나 라면 끓이기 일쑤다.
그러니, 회천면소재지의 육식 곰탕집을 보고도 아침이라는 이유로 지나칠 수 있겠는가.
득량만 청정해역 바닷가라 하지만 율포해수욕장 해안 역시 신물난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방부목 일색이다.
그래도,회천면 동북단인 서당리 한하고 해안따라 조성된 7.7km'다향길2코스'가 내게는
더없이 다행이었다.
이 길이 없다면 아마도 갓길이 전무하여 위험천만한 845번 지방도로(충의로)를 따라야
할 것이니까.
동율리(東栗)를 지나면 규모는 미니지만 신장개업한 듯 깔끔한 가게가 있다.
해안따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뭔가를 사먹고 싶은 마음이 가장 들게 한 가게.
쭈쭈바도 사먹고 맥주도 사마셨다.
실은 갈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팔아주고 싶었다 할까.
초로의 주인여도 순박한 인상대로 방금 삶은 옥수수를 내게 권했다.
가게 이후의 길은 득량만 바다를 끼고 얼마간 지압로(指壓路)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맨발로 걸어봄직한 구간이다.
마을로 잠시 들어섰다가 옛 방조제를 따라가는 금광마을과 석간마을 길이 이어진다.
마을앞 바다에 바위가 옹기종기 모여있어 석간(石間/돌틈)이라 했다는 마을이다.
석간마을과 마산마을의 휴식대를 지나 당도한 원산마을, 연동마을 길에서는 쭈쭈바를
여러 개 사들고 거푸 빨며 걸을 정도로 더위가 맹렬했다.
마을 정자에서 잠시 무더위를 피하고 싶었으나 나그네가 낄 자리가 없을 만큼 촌로들로
만원을 이루어 그냥 걸을 수 밖에.
복층 구조의 거금대교
비록 맹위를 떨치는 더위라해도 안심로인 다향길2코스를 걷는 동안은 행복했으나 조성
면으로 가는 득량면 길에서는 폭서와 공차(恐車)의 이중고를 겪으며 걷고 있었다.
해안은 접근조차 할 수 없고 갓길이 전혀 없는 차로(공룡로)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걷는 사람이 없는데 인도가 왜 필요한가"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듣는 말이며 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인데 여기에도 해결사가 대기하고 있었는가.
고흥으로 간다는 신형 산타페 1대가 내 옆에 멎으며 타라는 것.
염천에 좁은 아스팔트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늙은이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내 계획은 득량면과 조성면을 거쳐 벌교읍에서 일박하고 순천만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고흥반도는 제외되었던 것.
고백하건대 고흥을 제외한 것은 소록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여생을 보내고 싶은 유일한 곳이면서도 제도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땅이기 때문에
피하고 싶어서.
그러므로 곧 하차해야 하는데 산타페는 고흥까지 동행할 것을 타진해 왔다.
막 나누기 시작한 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던가.
엉겁결에 동의한 나는 득량만 간척지역을 통과해 고흥군 땅에 들어섰다.
이 간척지는 질좋은 조선쌀에 탐닉된 일제가 1928년에 득량만 방조제 공사를 벌여 확보
한 2.000ha의 거대 옥토다.
호남정맥 종주때 주월산에서 내려다본 조성면의 바둑판같은 간척들판이 한폭의 수채화
처럼 보였는데 주마간산으로 통과한 것.
산타페는 나를 거금대교 저쪽 끝 금산면 땅에 내려놓고 금산해안 경관을 찾아 떠났다.
도양읍 소록리(소록도)와 금산면(거금도)을 잇는 이 다리의 개통으로 27번국도가 거침
없이 거금도로 달려감으로서 새로이 걱광받게 되었다는 고흥7경(景)이다.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섬을 뭍으로 잇는다는 거금대교 역시 섬과 뭍(陸地)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섬에 묻혀 기나긴 잠을 자던 빼어난 경관들이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되는 것이 단지 다리
하나의 위력이니까.
비록 의외의 반토막 여정일 망정 추가된 고흥땅의 걸음은 2011년 12월 16일에 개통되
었다는 거금대교 남단에서 시작했다.
대교 개통기념 조형물을 비롯해 다양하고 다채롭게 꾸며놓은 공원에서.
국내 해상교량 중에서 자전거, 보행자 도로(1층)와 차도(2층)로 구분된 최초의 복층교.
인도교가 하층이므로 햇볕이 차단되고 막힘 없는 해풍은 폭서를 까마득히 잊게 했다.
바다에 떠있는 상화도와 하화도가 오순도순하고 섬사람의 발을 자임하며 푸른 바다를
열심히 가르고 있는 근해연락선이 눈 아래인 인도교.
조망권도 빼어나며 아스라한 바다위 2.028m가 이 늙은 나그네에게는 낭만의 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다리야 말로 눈비에 아랑곳 되지 않는 전천후 길이다.
특히 왕복 10리가 넘는 이 교량로가 보행자에게는 다목적 다용도의 길이다.
그늘진 난간을 따라 옹기종기 앉고 서서 미팅을 즐기는 청소년들이 있는가 하면 장기로
소일하는 노인들도 있다.
내게 의외의 멋진 기회를 안겨준 산타페 한쌍이 마냥 고마웠으나 흔적 없이 가버렸으니
애석하게도 이 마음 전할 길이 없구나.
복층교를 만든 이들이 가상하거니와 이제껏 무수한 교량을 건설하면서 이같은 발상(복
층구조)을 왜 진즉 하지 못했을까.
기술력은 경이롭게 발전했으나 복사판처럼 천편일률적이었으니 말이다.
관계자들이 체질화된 차존인비(車尊人卑) 의식을 버리고 사람 위주의 도로와 교량 건설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잖은가.
미적 감각의 배양에도 진력해야 한 배(金型)에서 나온 듯 하나같은 현수교(懸垂橋) 또는
사장교(斜張橋)의 모습이 다양해질 것이다.
이베리아반도 폰테베드라(스페인)의 레레스 강(rio Leres)에 놓인, 마치 하프의 현처럼
현란한 티란테스 다리(Puente dos Tirantes)를 나는 잊지 못하겠다.
1994년, 스페인의 교량건축가 레오나르도 페르난데스 트로야노(Leonardo Fernadez
Troyano)와 하비에르 만테롤라(Javier Manterola Armisen)가 만든 사장교인데 우리
나라에서도 보게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염원한다.
소록도 유감
소록도 주차장으로 가는 산책로 안내판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여정에서 고흥을 제외하게 한 주범(?)과 재회한다?
그럼에도 발길은 이미 소록도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팔영산 등산후에 들렀던 1990년대 이후 처음인 소록도는 배를 타고 건넜던 당시와 달리
연육교 소록대교(1.160m)의 개통으로 전혀 다른 환경으로 변했다.
시내버스와 빈번하게 드나드는 차량들은 이곳에 대형 주차장까지 갖추게 했다.
오붓한 오솔길들은 흉칙한 시멘트 포장차로로 바뀌었고 산비탈에 띄엄띄엄 들어선 그림
같은 집들도 활짝 웃는 모습이 사라지고 음산하게 방어적으로 변했다.
18시가 넘은 석양에 도착한 내게는 서릿발같은 즉시퇴도령(退島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입장시간(17시?)은 물론 섬을 떠나야 하는 시간도 이미 지났다는 이유지만 고의
(故意)일 리 없는 늙은이에게 살벌하고 위압적이어야만 권위(?)가 서는가.
녹동과 지호지간인데도 배를 타야만 했던 때의 소록도는 참으로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천형이라는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일제의 잔혹사, 당사자들의 피를 토하는 한과 비애의
흔적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음에도 나는 이곳을 한국의 밴쿠버(Vancouver)라 불렀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캐나다 뱅쿠버의 미니어처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백두대간과 아홉 정맥 자락에 산재한 산촌과 열개 대로변의 무수한 마을, 팔도의 방방
곡곡을 누비듯 보아왔지만 이처럼 안온하고 평화로움을 느껴본 마을이 없었다.
그 때, 나는 소록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뭉클했다.
거주자 여러 분을 붙들고 방법을 물었으나 반응은 싸늘했다.
전혀 불가능하다며 나를 엉뚱하고 이상한 영감으로 보는 듯 했으니까.
기어이 관철하려면 내가 환자가 되거나 내 가족중 누군가를 환자로 만들어야 한다는데
될 법한 일인가.
실낱같은 가능성이란 소록도의 어느 분야에 종사하는 것인데 천신만고로 자격을 구비
한다 해도 이미 나이에 걸려 있단다.
귀가한 후에도 외골수인 내 머리와 가슴에는 한동안 소록도뿐이었다.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곳으로 가려 하는 늙은이의 황당한 욕구가 진정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잠재운 욕구가 다시 살아날까봐 여정에서도 제외할 만큼 여전하였던 "소록도가
한국의 밴쿠버"라는 생각이 회복 불능의 카운터펀치를 밎게 될 줄이야.
소록도는 더 이상 한국의 밴쿠버가 아니다.
연육교 소록대교 때문이다.
연육교의 두 얼굴,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언급했거니와 다리를 통해
점령군처럼 달려오는 차량들이 소록도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양지 바르고 한가로운 전원의 맑은 공기는 매연으로 혼탁해졌고 만만디한 여유로움은
질주하는 차량들에 의해 모두 앗겨버렸다.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섬의 지형이 작은 사슴의 형국이라 해서 소록도(小鹿島).
일반 주민의 거주는 전혀 불가하며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셈병 환자들과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들만이 거주하는 100% 국유섬.
1급 관광지로 손색이 없으나 관광지가 아니며, 복덕방(부동산중개사)이 필요 없는 우리
나라 유일의 아주 특수한 곳이다.
따라서 녹동항과 배로 5분 거리에 불과한 이 섬에는 불요불급(不要不急)한 연육교다.
하물며, 이(利)보다 해악이 더 많은 두 얼굴의 연육교 공사를 왜 서둘렀을까.
거금대교와의 연계 때문에 불가피하다면 소록대교는 통과 전용으로 만들었어야 한다.
그리고 소록대교야 말로 보행자 전용이 포함된 복층구조가 되어야 한다.
관광지가 아닌 특수 사회를 방문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1km 남짓한 거리쯤은 인도교를
걸어서 방문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선박으로 운송하던 물류는 중간 하치장을 개설하고 지역내 이동은 전기차 또는 무공해
운송구를 운행하면 될 것이다.
우주산업의 메카를 꿈꾸는 고흥
녹동항으로 돌아오는 걸음이 아주 무거웠다.
피로가 쌓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괴물처럼 느껴지는 소록대교를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록도에 대한 미련이 말끔히 정리된 것은 다행이지만 사라져버린 유일한 무공해 청정
지역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바다에 붉은 파문을 길게 뿌리고 있는 저녁노을마저 귀찮을 정도였다.
게다가 연계도로도 차량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보행자의 진입과 탈출이 불편하다.
어차피 찜질방에서 편히 휴식을 취하도록 점지된 날인가.
녹동항에 찜질방이 있다는데 집지을 정자를 왜 찾아 헤매겠는가.
천막은 단지 찜질방 대용일 뿐 선호하는 잠자리가 아니니까.
호남정맥종주때 존제산에서 짙은 무우(霧雨)에 막혀 탈출한 벌교에는 찜질방이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하다는 그곳에서 여독을 풀려했는데 뜻밖에도 고흥땅으로
버뀌었지만.
비로소 소록도 생각에서 벗어나 고흥의 이모저모가 닥치는대로 명멸했다.
실은, 단 한번 다녀갔을 뿐인 내게 고흥은 팔영산(八影山)과 소록도가 전부였다.
여덟 암봉으로 이루어진 해발 609m 팔영산은 고흥의 진산이며 최고봉이다.
암릉 종주도 20여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아련할 뿐이나 정상에서 바라본 국립해상공원
다도해의 절경은 여전히 생생하다.
그 때, 귀로에 들른 소록도는 내 생애를 통틀어 최고의 등산 보너스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때 소록도에 매료된 나는 한동안 딴 일을 못할 지경이었으니까.
소록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녹동항에서 사온 어린 동백나무 한
그루가 내 집 앞마당 한 귀에서 아직도 명을 이어가고 있다.
난동때는 핏빛 꽃도 피웠으나 혹한에 시달리느라 성장은 커녕 오그라드는 듯 해 짠하기
그지없으며 이 놈이 수시로 소록도 생각을 자극했는데 곧 그 임무를 종료할 것 같다.
소록도는 더 이상 나의 이상향이 아니니까.
강산이 2번이나 변했을 세월이며 지방자치 체제의 시행 이후 변화는 더욱 가속화 되고
있는데 고흥땅인들 답보하고 있겠는가.
경직성 경비마저 벌어들이지 못하는 지자체들도 표면적으로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데
고흥의 괄목할만한 점은 단연 남동쪽 끝 나로도(봉래면)에 건설된 우주센터일 것이다.
우주를 순항하며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인공위성을 소유는 하고 있으나 남의 나라
발사대를 전전함으로서 셋방살이 하는 느낌이었는데 내 나라에서 쏘아올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기술제휴라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거듭된 실패를 놓고 티격태격 공치기
하는, 수치(羞恥)에 다름아닌 책임전가 몰골을 다시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발사대가 왜 한반도 남쪽 끝자락 중에서도 고흥에 서게 되었는지 무지한 늙은이는 알리
없지만 특화된 국가 시설들이 지방에 균형있게 배치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겠다.
한국의 항공우주산업의 메카라면 단연 경남 사천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고흥의 꿈 또한 야무지단다.
우주센터를 중심으로 한국 우주산업의 메카로 도약하려는 꿈이.
천형(天刑)의 수용소가 우주를 향해 비상의 나래를 젖고 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