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리포트 pt.15 (최종편)
[Beijing Report,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래피드 남성, 여성 단체전 준결승전 및 결승전이 오전 10시부터 있었다. 나는 여자 준결승전 제2대국을 맡았다. 준결승전 및 결승전과 같은 보드는 언제나 경험이 풍부한 시니어 아비터들만을 배정하는데, 나 같은 햇병아리를 배정해주어서 영광이었다[물론 토마스 호, 피터 롱, 안젤라, 에드문도 등의 시니어 아비터들이 대거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서 나를 넣어준 것이다].
물론 인도네시아의 세만쥰타크氏처럼 경험이 풍부한 심판과 함께 같은 보드를 맡았기 때문에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다만 오전 중에 배가 고플 경우를 대비하여 어제 밤 짐을 싸느라 정신없었던 송진우씨의 방에서 몰래 사탕을 한 움큼 훔쳐왔는데, 그 캔디를 몽땅 빼앗겨[??]버리는 일이 생겼다. 대국 시작 전 캔디를 대국장 옆의 데스크에 수북하게 쌓아 놓았는데, 때마침 우크라이나 대표팀 선수단장으로 오신 아인고른[Eingorn]씨와 투크마코프[Tukmakov]씨께서 그 자리에 앉아 나의 캔디를 몽땅 먹어치우고 만 것이다. 곧 배가 고파져서 배에서 소리가 났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미안했다. 아무튼 연로하신 분들이 그렇게 단 사탕을 마구 드셔도 되는지 모르겠다.
여성부 준결승전의 흥미로운 사건은 우크라이나 팀이 코스테뉵과 포고니나 등으로 이루어진 최강 러시아 팀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와 중국이 여성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편 남성부에서도 우크라이나가 중국과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는 우연이 일어나게 되었다.
“심판은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솔직히 우크라이나가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네요. 이제까지 거의 모든 메달은 중국이 따갔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말은 공식적으로는 할 수 없겠지만.” 나는 로버트 기븐스씨에게만 들리도록 소리죽여 말했다.
“맞아요. 우크라이나가 금메달을 따면 균형이 맞고 좋겠죠.” 기븐스씨가 맞장구쳤다. 중국의 메달 싹쓸이를 곱게 보는 사람은 중국인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듯 했다.
중국과 우크라이나 여성부 결승전은 중국인 심판이 모니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와 세만쥰타크씨가 맡게 되었다. 이제 보니까 우크라이나 여성선수들이 새삼스럽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대회도 거의 끝나가고 긴장도 풀리고 나니까 이제 여성들이 눈에 들어오는 듯 하다. 우크라이나와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주길 내심 기대하였다. 솔직히 중국인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중화사상에 도취되어 21세기 전 세계 맹주가 되려는 오만한 마음만 갖지 않는다면 당연히 이웃나라 사람으로서 그들을 응원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편파적인 심판이다.
나의 기대와는 어긋나게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압도하며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여성부 래피드 단체전
우승 : 중국
준우승 : 우크라이나
3위 : 러시아
남성부 래피드 단체전
우승 : 중국
준우승 : 우크라이나
3위 : 이란
남성부 래피드 3위 결정전에서 이란과 미국이 동점을 이루며 연장전 아마겟돈으로 들어갔다. 이제까지 아마겟돈이라는 시스템으로 대국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던 듯 하다.
아마겟돈은 연장전에서 반드시 순위를 결정지어야 할 경우 쓰게 되는 시스템으로서 백이 6분, 흑이 5분을 갖고 다투게 된다. 백은 반드시 정해진 시간 내에 상대방을 이겨야 상위 순위로 진출하게 되며, 흑은 비기기만 해도 상위 순위로 올라가게 된다. 당연히 증분[增分]없는 서든 데스[Sudden death]이다.
흑백의 순서를 제비뽑기로 가린 이후, 이란이 2개의 보드에서 백을, 미국이 1개의 보드에서 흑을 잡게 되었다. 2번과 3번 보드에서 모두 흑이 백을 이기며 미국과 이란은 1-1로 팽팽히 맞섰고 마지막 1번 보드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상황이었다. 1번 보드의 백은 이란의 GM 바엠 가에미 에산[Bhaem Ghaemi Ehsan], 흑은 미국의 유진 페럴쉬테인[Eugene Perelsteyn]이었다. 둘이서 팽팽한, 거의 비긴 끝내기를 두고 있는 도중 서로 시간이 단 수 초밖에 남지 않게 되자 미친 듯이 기물을 움직이게 되었고 거의 동시에 양 쪽에서 디스-플레이스먼트[displacement]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번 대회의 규정에 의하면 디스플레이스먼트가 발생했을 경우, 이에 대한 즉각적인 클레임이 없으면 두 선수 모두에게 실격패를 주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선수가 뒤늦게 이란선수의 디스플레이스먼트에 대하여 클레임을 걸려고 하는 순간, 그의 시간이 다 되었고 이란선수는 미국선수의 시간패를 클레임하였다.
이렇게 되어 장내가 잠시 시끄럽게 되었지만, 이윽고 심판장은 두 선수에게 모두 실격패를 주면서 승부는 재연장전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마겟돈이 단 한 보드, 즉 1번 보드에서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한판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동메달 결정전이 금메달 결정전보다 더욱 박진감이 넘친다는 사실은 흥미로웠다. 결국 미국과 이란의 대결이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스포츠 이벤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장내에 한 사람도 없었다.
재연장전에서는 미국선수가 오프닝에서 실수를 저질러서 싱겁게 이란이 동메달의 주인공이 되었다. 모든 미국선수들은 의기소침해져서 대회장을 빠져 나갔고 이란선수들과 이란출신 아비터이신 후세인씨 등은 어린 아이들처럼 좋아하였다. 미국을 이겼으니 그 기분은 이해할 만 했다. 나는 심판이라는 신분 때문에 공개적으로 기뻐할 수는 없었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란 심판에게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이것으로 나의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났다. 처음 베이징에 도착하여 잠시 길을 잃고 헤매던 순간에는 이렇게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의 이번 베이징 대회 참가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 되었다. 우선 내 생애 최초의 국제 대회 심판으로서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대회진행을 하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점, 두 번째로는 세계 일류 선수들의 대국을 직접 관전하고 세계적인 규모의 마인드 스포츠 대회의 진행과 행정 등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 세 번째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의, 비록 가장 번화하고 국제화한 곳에서만 머물렀지만, 발전상과 중국전체의 발전 속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는 점, 네 번째로는 바쁜 시간에도 잠시 틈을 내어 천안문 광장, 기년탑, 왕푸징, 중국의 화폐시장 등을 방문하여 원하던 것들을 사진에 담거나 직접 구입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다. 한 마디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관광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보너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체스계가 너무나도 빈곤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비록 한국의 에이스인 GM 김알렉세이와 CM 이상훈씨 등이 빠져서 2군의 수준으로 참가한 대회였지만, 한국 남성 단체팀의 블리츠와 래피드에서의 성적은 차마 글로 남기기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짧은 시간 내에 세계 정상권에 진입할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지금 현재의 만성적인 인프라 부족과 체스에 대한 낮은 인지도를 고려한다면,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결코 밝지만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체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긍정적인 이미지의 확산이다. 지금처럼 바둑에 견주며 체스를 비하하고 단순한 두뇌를 가진 서양인들만이 하는 이류 보드게임이라는 잘못된 편견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한국 체스계가 세계 정상권에 진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아무 생각 없이 체스를 즐기던 일개의 동호인이었던 내가, 이제 거창한 담론을 들먹이며 한국 체스계의 앞날을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한심하다. 솔직히 누군가가 이런 일[체스에 대한 홍보와 보급]들을 대신 해주었으면 좋겠다. 세월을 물처럼 흘려보내며 체스나 두던 옛 시절이 그립다. <끝>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최준일 선생님 덕분에 제가 체스에 더 관심을 갖게 된 한사람입니다. 계속 좋은일 많이 해주시고, 날씨도 추운데 건강하십시요.
흑기사님 곧 제대하시죠? 제대하시고 나면 꼭 한번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