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 짓기에 적합한 땅 크다 : 끄다 주(Negeri Kedah)
고고학적 발견들로부터, 홍적세(Pleistocene : 빙하기) 시대 이래로 고대 인류가 이미 정착한 말레이반도의 북부 지역임을 가리키는 증거들이 발견됐다. 발견된 도구들 중에 땅을 찍어 곡식을 심는 재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연구를 통해, 그 지역의 거주자들은 원시 말레이(Proto-Malay) 인들의 무리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들은 강가 주변에 낮은 내륙 지역에서 경작을 하며 살았다. 최초의 거주자들이 청동으로 만든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그들은 번영하기 시작했다.
고대 왕국 끄다(Kedah)에 대한 언급은 A.D.2세기 후반에 쓰여진 타밀 시 빠띠나빨라이(Pattinappalai)에 처음 기록되었다. 그것은 촐라(Chola)왕국의 주도인 넓은 거리들에 함께 쌓아 올린 까다람(Kadaram : Kedah)으로부터 온 물건들을 묘사한 것이다. 까다람(Kadaram), 끄다(Kedah)는 또한 인도 문학에 여러 번 다른 이름들로 알려졌다. 까까따하-나가라(Kaumudi Mahotsava drama에서 Kataha-Nagara으로), 안다-까따하(Agni Purana에서 Anda-Kataha로), 까따하-디빠((Samar?iccakah?에서 Kataha-Dvipa로), 그리고 까따하(Kathasaritsagara 에서 Kataha로) 등등으로 끄다(Kedah)를 표현하고 있다.("Kadaram and Kataha". Sabrizain. Retrieved 2 February 2014.)
름바 부장(Lembah Bujang)에서 발견한 고고학적 증거는 A.D. 110년보다 일은 시기부터 힌두-불교 왕국이 고대 끄다(Kedah) 지역을 다스렸다. A.D.110년 이전의 대장간들, 점토벽돌로 된 묘지들이 남아 있는 짠디 부낏 바뚜 빠핫(Candi Bukit Batu Pahat)의 발견은 그 시기에 이미 인도 남부의 타밀 왕국과 해상무역 항로가 상설되었음을 보여준다(New interest in an older Lembah Bujang, 2010/07/25 Archived 29 June 2011 at the Wayback Machine). 름바 부장(Lembah Bujang)에서의 발견들은 또한 서남 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서 고대 끄다(Kedah) 왕국으로 만들었다("Asia Research News - USM discovers earliest civilisation in Southeast Asia". Researchsea.com. 10 March 2010. Retrieved 2 February 2014.).
많은 역사학자들은 말레이반도에 가장 오래된 도시로서 끄다(Kedah)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의견은 A.D.4세기 이래로 규칙적인 지명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끄다(Kedah)에 연루된 지역들에 있는 고고학적 발견에 기초하고 있다. 전통에 의하면, A.D. 630년 경에 끄다 왕국(Kerajaan Kedah 혹은 Kadaram) 건립이 이루어졌다. 끄다(Kedah) 왕국은 랑까수까 고대 왕국(kerajaan kuno Langkasuka)을 대신했다.
마하라자 두르바 라자(Maharaja Derbar Raja)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데, 페르시아(Persia)에 있는 게메론(Gemeron : 현재 Bandar Abbas으로 알려짐.) 출신인 그는 전쟁에 패했다. 그는 스리랑카(Sri Lanka : 실론)로 피신했다. 그는 힌두교 추종자였다. 끄다(Kedah) 힌두 왕국은 9대 왕, 시암(Siam) 사람에 의해서는 "Phra Ong Mahawangsa"이란 호칭이 주어진, 두르바 라자 2세(Derbar raja II) 때, 끝났다. 1136년에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 왕국으로 이어 갔다("Kedah: Intro and Background". Go2Travelmalaysia.com. Capslock Sdn Bhd. Diakses tanggal 2011-03-04.)
그 후에 그는 항해도중 폭풍에 “낄라”(Qilah), 즉 끄다(Kedah)에 있는 꾸알라 숭아이 (Kuala Sungai)에서 멀리 떨어진 강 기슭으로 떠밀려 왔다. 끄다(Kedah)의 원주민들은 현명하고 지식이 많은 그를 발견했다. 그들은 그를 끄다(Kedah)의 왕으로 세웠다. 634년에, 끄다(Kedah)에 새로운 왕국이 힌두 신앙을 지닌 말레이 원주민과 페르시아(Persia) 왕족으로 구성되었다. 끄다(Kedah)는 랑까수까(Langkasuka)의 주도였다.
중동 문학에서, 고대 끄다 왕국(Kedah Kuno)은 Ibn Khordadbeh이 Kitab al Mas?lik w’al Mam?lik에서 Qilah로, Soleiman Siraf & Abu Zaid al Hassan은 Silsilat-al-Tawarikh (travels in Asia)에서 Kalah-Bar로, 그리고 Abu-Dulaf Misa'r Ibn Muhalhil는 Al-Risalah al-thaniyah에서 Kalah로 각각 언급했다("R.O Winstedt - ''History of Kedah'' - Extracted from No. 81 Straits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SBRAS), March 1920" (PDF). Retrieved 2 February 2014.).
688년에서 695년 사이 말레이 군도를 방문한 당나라의 유명한 불교 승려, 이징(Yi Jing)은 또한
말레이반도 북부 지역에 있는 까-차(Ka-Cha : 현재 끄다로 추정됨.)로 알려진 한 왕국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스리보가(Sribogha:Srivijaya, 스리비자야 ; 현재 슬라오 지역으로 추정됨.)의 주도인 보가(Bogha:Palembang, 빨렘방)로부터 뱃길로 30일이었다고 한다(I-Tsing (2005). A Record of the Buddhist Religion As Practised in India and the Malay Archipelago (A.D. 671-695). Asian Educational Services. pp. xl – xli. ISBN 978-81-206-1622-6.).
메롱 마하왕사 사기(Hikayat Merong Mahawangsa) 또는 끄다 연대기에 따르면, 메롱 마하왕사(Merong Mahawangsa)라 이름하는 힌두 왕에 의해 끄다(Kedah)가 세워졌다. 얼마 동안 점유한 인도 남부에 있는 코로만델(Coromandel) 출신인 촐라 왕, 라젠드라 촐라(Rajendra Chola)에 의해 1025년에 끄다(Kedah) 도시가 정복되었다(A history of Malaya, Richard Winstedt, Marican, 1962, p. 36). 두 번째 침범은 촐라 왕국(Chola dynasty)의 비라라젠드라 촐라(Virarajendra Chola)에 의해 일어났다. 그는 11세기 후기에 끄다(Kedah)를 정복했다. 11세기 후기에, 꿀로뚱아 촐하 1세(Kulothunga Chola I) 통치동안, 촐라(Chola) 봉건영지가 스리비자야(Sri Vijaya) 끄다(Kedah) 주에 세워졌다.
마침내, 1136년에, 술탄 왕국이 시작되었는데, 9대왕 쁘라 옹 마하왕사(Phra Ong Mahawangsa)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술탄 무드자파 샤(Sultan Mudzafar Shah)이란 이름을 채택했다. 그 후에 끄다(Kedah) 지역은 15세기 믈라까(Melaka)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하기까지는, 시암(Siam)의 지배 아래 있었다. 믈라까(Melaka) 통치 이후, 아쩨(Aceh)에 의해 점령되었다. 17세기에는, 끄다(Kedah)가 포르투갈(Portugis)에 공격을 받았다.
18세기 후반인 1786 년에, 끄다(Kedah) 술탄은 시암(Siam)과 버마(Burma)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영국의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고, 영국은 끄다(Kedah) 술탄으로부터 삐낭(Penang)과 스망 쁘라이(Semang Perai : 현재 Wellesley)를 임대하기로 한다. 그러나 1821년에 시암(Siam)이 끄다(Kedah)를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방관하였으며 마침내 끄다(Kedah)는 시부리(Syburi)라는 이름 하에 시암 통치 아래 들어갔다. 1896년에, 끄다(Kedah)는 쁘를리스(Perlis)와 사뚠(Satun)과 함께 시암(Siam) 왕국의 몬똔 시부리(Monthon Syburi) 주 안에 병합되었다. 그러나 시부리(Syburi, Kedah:끄다) 정황에서 많은 문제점으로 인해, 1833년에, 국왕 라마 III세(Rama III)는 시부리(Syburi)를 꾸방 빠수(Kubang Pasu), 시부리(Syburi), 쁘를리스(Perlis) 그리고 사뚠(Satun) 등 4부분의 Mueang으로 분할할 것을 명령했다. 그는 Mueang Satun을 낚꼰 시 땀마랏(Nakhon Si Thammarat) 아래 두었다. 1897년에 출랄롱꼼 라마 4세(Chulalongkorn Rama V) 국왕은 새롭게 세워진 몬똔 시부리(Monthon Syburi) 아래 네 도시를 재통합했다. 1909년에 영국과 시암(Thailand)이 1909년 앵글로-시암 협약(the Anglo-Siamese Treaty of 1909)에 합의할 때, 단지 사뚠(Satun)은 시암에 존속했다. 그 후에 1910년에 사뚠(Satun)은 몬몬똔 뿌껫(Monthon Phuket) 아래로 옮겨졌다. 꾸방 빠수(Kubang Pasu), 시부리(Syburi), 쁘를리스(Perlis)은 영국에 넘겨졌다.
2차 세계대전(World War II) 중에, 끄다(Kedah: 끌란딴Kelantan을 포함한)는 일본에 침략을 받은 말레이반도의 첫부분이었다. 일본은 끄다(Kedah)를 시부리(Syburi)라 불렸던 타이 연합에 반환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끄다(Kesah)는 영국의 통치로 돌아갔다. 1948년에, 끄다(Kedah)는 말레이 연합에 첨가되었다. 1958년 이래, 끄다(Kedah)의 세습 술탄은 뚜안꾸 압둘 할림 무앋잠 샤(Tuanku Abdul Halim Mu'adzam Shah)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