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서(Gemser)와 플뢰거 (Ploeger)는 1:1-6을 1-9장까지의 서문으로 보지만, 링그렌, 머피, 와이브레이 (Whybray 35), 클리포드 (34쪽)는 1:1-7을 서문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7절은 첫 서문의 절정이 된다.
I. 표제(1:1)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잠언 1:1은 중요하다. 저자는 지혜를 언약 공동체의 눈으로 본다. 잠언은 결코 율법과 상반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세운다 (29:18). 저자는 왕으로 소개된다.
여기에 나타난 표제의 형식은 "X가 그의 아들 Y에게 준 가르침의 시작이라"는 이집트 지혜문헌과 유사하다(Clifford 34). 잠언 1장에서는 표제, 저자, 목적, 그리고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유익을 담고 있다.
"솔로몬의 잠언". 열왕기 기자에 따르면 솔로몬은 구약에서 가장 탁월한 지혜자이다 (4:30-34). 그는 지혜로 공정한 재판을 하며, 다른 나라와 조약을 유리하게 협상하고, 자연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4:33), 수천편의 잠언과 노래를 지었다 (4:32). 스바 여왕은 "소문은 사실의 절반도 못된다" (왕상 10:17).
"잠언"(마샬)은 이 책 전체의 제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용어가 잠언서의 내용을 묘사하는 데 충분히 적합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책 속에는 다양하 자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 용어가 지혜문학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총칭으로 사용된 것 같다 (맥케인 31쪽을 보라). 클리포드는 "잠언"이 이 책 전체의 내용을 묘사한다고 본다. 왕상 4:32 (히, 5:12)은 솔로몬의 문학적 업적을 "잠언"과 "노래"로 분류한다.
기본적으로 '마샬'이라는 히브리어는 "비교"를 말한다 (11:22; 12:4). 그러나 격언, 지식, 설교, 경구 (겔18:2), 교리적 묵시 (시 49:4), 슬기로운 진술 등을 뜻한다.
비평학자들은 이 표제가 솔로몬에게 돌려진 것으로 본다. 클리포드에 따르면, "솔로몬"과 "다윗"과 "이스라엘"을 숫자로 환산하면 "930"이 되며, 이것은 마소라 사본의 934절에 약간 못미친다고 본다 (35쪽). 그리고 "10:1에 있는 솔로몬은 375로 환산되며, 이것은 이 단락 (10:1-22:16의 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본다 (35쪽. 그는 Skehan의 입장을 가져왔다).
II. 서언 (1:2-7)
알렌소 쉐켈은 2-7절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짰다.
(1) 배움 (2-3절), (2) 가르침 (4절), (3) 지혜의 스승(5절), (4) 기록된 지혜 (6절), (5) 절정: 야웨를 경외함 (7절). 이런 구조로 보면, 이 책은 청중으로 지혜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많은 주석가들은 5절의 구문이 다른 절과는 다르기 때문에 후대의 첨가라고 한다.
클리포드는 2-7절에서 지혜가 삶의 다양한 차원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1) 지혜 (2상, 4-6절), (2) 윤리 (3절), (3) 종교 (7절).
이 책의 목적이 2절에 나타난다. 목적과 이 책을 연구함으로 얻는 여러 유익들이 나타난다. 지혜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신입생들에게 개강 강의 같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자에게 만 하지 않는다. 상류 계층이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 하고 있다. 특히 젊은이에게 가르친다. 남녀 노소를 모두 포함한다.
지혜의 여러 측면을 여러 용어로 가르친다.
"지혜"가 대표적인 단어이다. 지혜자의 가르침의 내용과 목표를 잘 요약하는 말이다. 지혜가 무엇인가? (특강 참조)
"지혜를 "알게하며" (2상) 지혜의 표현을 "깨닫게 한다" (2하). "지혜와 훈계"는 3-5절에 설명된 도덕적 요소를 포함한다. 학생과 아들(3절), 부모나 선생 (4절), 지혜자 (5절)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는 6절에서 설명된다. 4절은 2상과 "훈계"(instruction)로 이어지며, 2절하는 6절과 "분별"로 이어진다. 3-4절은 "받다"와 "주다"로 이어진다.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1) "지혜를 "알게하며" (2상), 지혜의 표현을 "깨닫게 한다" (2하). "지혜와 훈계"는 3-5절에 설명된 도덕적 요소를 포함한다. 학생과 아들(3절), 부모나 선생 (4절), 지혜자 (5절)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2)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는 6절에서 설명된다. 4절은 2상과 "훈계"(instruction)로 이어지며, 2절하는 6절과 "분별"로 이어진다. 3-4절은 "받다"와 "주다"로 이어진다.
(3)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2절)에서 "알다"는 개인적인 경험적 지식이다. 순전히 인식적인 지식과 대립된다. 지혜를 내면화 하는 심리적 과정은 2:1-4에 나타난다. "훈계"(무사르)는 징계로 번역할 수 있다. 지혜습득은 인간의 본성과 대립되며, 언어적이고 신체적인 "책망"을 때로 요청한다. 클리포드에 따르면, "'훈계'는 제자가 스승에게 순종하며 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 (process)과 그들이 가르치는 '전통'이라는 '내용' (content)을 모두 포함한다" (35쪽).
"알다"는 개인적인 경험적 지식이다. 순전히 인식적인 지식과 대립된다. 지혜를 내면화 하는 심리적 과정은 2:1-4에 나타난다.
"훈계"(무사르)는 징계로 번역할 수 있다. 지혜습득은 인간 본성과 대립되며, 언어적이고 신체적인 "책망"을 때로 요청한다. 맥케인은 이 단어가 이집트어 가르침 (sb'yt)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263쪽). 이것은 "학생들에게 '수용'과 선생의 권위에 복종을 요청하는 것"과 연관된다 (5절). 이 권위를 행사하는 자는 '부모' (8절)와 '지혜의 스승'이다. "여기에서는 종교적인 권위가 주장되고 있지 않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순종을 자연스럽게 요청할 수 있다" (맥케인 264).
와이브레이: "이 단어는 구약성서 전체에서 보다 잠언서에서 더 자주 나타난다. 특히 1-장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며, 핵심단어 중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명령하는 자가 행사하는 교정이나 훈계 형식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잠 22:15에는 '훈계의 매'가 나타나며, 13:24에서는 '매를 아끼다'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잠언 1-9장에서는 교육이나 가르침이란 보다 부드러운 뜻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지혜'와 '통찰의 말씀'과 평행을 이룬다.
"말씀"
"명철의 말씀"(<표준>)은 "슬기로운 가르침" (<공동>), "지적으로 예리한 말씀"(perceptive sayings; McKane)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학생으로 이해를 하도록 도우는 말씀이다. '명철'이란 분별력과 간파력을 뜻한다 (맥케인 264). 선지자들은 이 용어들을 종교적인 조명으로 재해석하였다.
3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이 절은 번역이 대단히 까다롭다. 먼저 상반절은 직역하자면, "지혜의 훈계를 받기 위하여"라는 절이 나타나며, 이어 하반절에서는 "의"(tsedeq), "공평"(mishpat), "정직"(mesharim)이라는 세 개의 명사가 나타난다.
"지혜의 훈계"(musar haskel)에서 '지혜"는 부정사 절대형이 명사형으로 사용된 경우이다 (GK 113e, Whybray 32). 우리말 번역에서는 "지혜롭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개역>), "지혜롭게 실행하도록 훈계(를 받게하며)" (<표준>), "교육으로 사람을 깨우쳐" (<공동>)로 의역되고 있다 ('instruction in wise dealing'[RSV]). 임승필은 "현철한 교훈"으로 제시한다. 여기의 "훈계" 혹은 "교훈"은 뒤에 나오는 부정사 "지혜롭게 하는"으로 꾸밈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는 "연계형"과 "부정사" 용법을 좀 더 찾아보라. 나는 "분별력을 주는 교훈"으로 보고싶다. 겜서와 링그렌은 "유익한 교훈"(salutary discipline)으로 번역한다 (McKane 265). 링그렌은 결과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효과적이라는 사상이 '분별하다'(sakal)는 동사의 기본적인 뜻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지혜'는 단지 사실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올바로 분석하여 실천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우리 말에서 '지혜롭게 행할 일'은 "지적인 기능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Whybray 32). 맥케인은 "교육적인 훈련 보다 경건 훈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265쪽). 그러나 와이브레이의 설명이 더 좋아 보인다.
하반절의 세 단어는 상반절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나는 상반절이 포괄적이며, 하반절이 설명절이라고 생각한다. 즉 "분별력을 주는 교훈"에 있어서 "분별력"이란 바로 "의"와 "공평"과 "정직"을 가리킨다. 이 세 단어는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 (<개역>, <개역개정>), "정의와 공평과 정직" (<표준>, 임승필), "무엇이 옳고 바르며 떳떳한지" (<공동번역>)로 제시된다. 나의 최종번역은?
지혜가 가르치는 덕은 주로 법적이며 예언적인 가르침에 나타난 것과 일치한다. 지혜는 "옳게 행동하는 것을 아는 것이며," 어리석음은 "무지가 아니라 잘못 행동하는 것"이다 (Clifford 35).
와이브레이는 이것들이 "순수한 도덕적 특질"로서 이 본문의 문맥에 제시된 다른 추상적인 용어들과 구별된다고 본다. 나는 이 세 용어가 인간 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표현하는 윤리적 가치들이라고 생각한다. 시편에서 이 용어들은 주로 언약의 배경 속에서 나타난다.
이 세 용어들은 2:9에도 함께 나타나며, "첫 두 단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행동의 종류를 요약한 것"으로 본다(Whybray 33). 세번째 단어는 구약에서 정직하고 공평한 판결을 가리킨다 (잠 8:6; 23:16).
이 용어는 맥케인이 제시한 것처럼 (the untutored) 아직 체계적인 지혜 교육을 받지 않은 자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임승필은 "경험이 부족하여 자기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쉽게 받아 들이는 사람을 말한다"고 본다.
"어리석은 자"는 "젊은 자"와 평행을 이룬다. "젊은이들" (<표준>), "철부지" (<공동>). 이 두 용어는 그 자체로서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잠언에서 이들은 "경험이 부족하여 어리석고 파괴적인 행동을 쉽게 하지만, 설득을 받아들일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자들이다" (1:22; 21:11).
이들에게 지혜는 "슬기"와 "지식"과 "근신"을 약속하고 있다. "슬기"(`orma)는 가끔 나쁜 뜻으로 "간교함"(창 3:1)과 "속임수"를 뜻한다. 그러나 잠언에서는 항상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뜻으로 사용된다. 형용사형은 '어리석음'과 '단순함'과 대조를 이룬다.
"지식"과 "근신"에서 "근신"은 "분별력" (<표준>)을 뜻한다. 이것 역시 중립적이고 부정적인 뜻을 둘 다 가지고 있으나, 잠언에서는 항상 긍정적인 뜻으로 나타나며, 실천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12:2; 24:8을 제외하고).
맥캐인은 "교육적인 과정은 도덕성 보다 지적인 태도를 성숙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은 건전한 판단을 배양하고 힘차고 효과적인 개인을 만드는 데 있다. 그것은 기존하고 있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기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도록 키우는 데 있다"고 한다 (265쪽).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5절은 부정사 연계형으로 시작된 2-4절과 달리, 미완료형으로 시작한다. 주어도 "솔로몬의 잠언"이 아니라, 이제 "지혜로운 자"(chakam)와 "명철한 자"(nabon)로 변하고 있다. 이 둘은 "비전문적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Whybray 33).
"솔로몬의 잠언"은 "초보자" 뿐 아니라 "고수들"과 "성숙한 자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그의 "잠언"은 어떤 특정 계층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진다.
"학식"(leqach)과 "모략"(tachbulot)은 "학식"과 "지략" (<개역개정>), "학식"과 "지혜" (<표준>), "학식"과 "남을 이끌 힘" (<공동>)으로 새롭게 제시된다. "학식"이란 단어는 "얻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모략"과 유사어로 번역된 단어는 70인역에서 "운행하다", "운전하다" (steering, pilotage)라는 뜻을 가진 단어 (kubernesis)로 번역된다. 히브리어는 어근이 "끈" (chebel)과 "항해사"(chobel) 즉 "줄을 끄는 자"와 연관되며, 여기에서 "싸이버"라는 현대어가 나왔다. 이것은 "인도함" 혹은 "인생의 길을 성공적으로 항해하는 능력"을 뜻한다.
여기에서 "듣다"는 "구두교육"을가리킨다. 지혜자는 자신의 스승에게 직접 구두로 배웠다 (4:1-9). 기록된 가르침도 구두로 전해졌을 것이다.
6 잠언과 비유와
지혜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5절에서 미완료형으로 깨어졌던 구문구조가 6절에서 다시 부정사 연계형으로 시작되어 4절과 이어진다. 즉 주어는 "솔로몬의 잠언"이며, 이 잠언이 주는 유익을 다시 한번 더 말해준다.
이 절에서 동사는 "깨달으리라"(lehabin) 하나 뿐이며, 5개의 명사가 여기에 걸려 있다. 이 "깨달음"은 단지 "이해력"이 아니라, 특수한 정황 속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먼저 "잠언"(mashal)이란 단어는 "솔로몬의 잠언이라.... 잠언을 깨닫기 위하여"라는 구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불필요한 반복으로 여겨진다.
마소라 사본은 6절을 "잠언"과 "비유"(melitsa), 그리고 "지혜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의 평행법을 만들고 있다. "비유"는 일반적으로 "조소하다" (lyts)에서 나왔으며, "조롱자", 혹은 "오만한 자"라는 명사형과 연관된다고 본다. "비유"와 동일한 형태는 여기와 하박국 2:6에만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뜻은 여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리차드슨은 malats에서 나왔다고 보며, "미끄러운 말" 혹은 "모호한 말"(allusive saying).으로 보지만, 이것 역시 분명하지 않다. "비유"(melitsa)는 "풍자"로 볼 수도 있다 (합2:6). 동사는 "거만하다" (2:2).
여기에서 "잠언"과 "비유"의 관계도 분명하지 않다. 전자는 "단순한 말씀"이며, 후자는 "모호한 것"인가?
하반절에는 "지혜자의 말"과 "그들의 오묘한 말"이 평행을 이루며 나타나고 있다. "지혜자"는 히브리어로 복수형으로 나타나며, 우리말 성경에서는 모두 단수형으로 번역된다.
"오묘한 말"은 삼손의 수수께끼 (삿 14:12), 스바 여왕의 어려운 문제 (왕상 10:1)를 가리킨다. 해석이 어려운 말이다. 따라서 이 잠언서는 독자로 하여금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자극해 준다. 기지, 역설, 상식, 상징을 통해 지성을 자극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반절의 "비유"와 하반절의 "오묘한 말"은 좋은 평행을 이루고 있다.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이 절의 문학적인 위치에 대해 다양한 토론이 있다. 현재 BHS 역시 7절을 다음 단락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8-9절은 새로운 교훈의 시작 형식에 일치하기 때문에 (4:1-2; 6:20-23), 7절을 1-6절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으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Whybray 35).
1:7은 이 책의 표어이며. 지혜 문학의 총괄적 표어이기도 하다 (9:10; 15:33; 시111:10; 욥28:28). 이것은 교회 학교의 입구에 새겨볼 만 하다. 교육의 표어로 첫 머리에 있다. 9:10 결론 부분에서 약간 달리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여기에서 "경외함"은 단순한 "두려움"과 "공포"가 아니며, 인격적인 "경외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며 느끼는 두려움과 그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고 언약에 충성하며 율법에 순종하는 양면성을 가진다. 주님에 대한 존경과 헌신, 충성과 복종을 말한다.
여기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식"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러나 "신앙심"은 "지식"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지식의 시작"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기에서 "시작"은 시간이나 질에서 첫째 되는 것을 뜻하며, 어떤 "핵심"이나 "요약"이란 뜻은 아니다. 우리말 성경은 주로 "근본"으로 번역하며 임승필은 "근원"으로 제시한다. "근본" 역시 "핵심"이 아니라, "시작"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근본"은 으뜸가는 지배 원리로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리이지만, 이것은 시작이지 완성은 아니다. 즉 "믿음"을 가져야 올바른 지식에 대한 시작이 가능하며,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가졌다"고 바로 "지식을 통달한 것"이 아니라, 지식을 계속 연마할 수 있는 시작을 가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반절에는 갑자기 "미련한 자"('ewilim)가 등장한다. 1:1-7의 문맥을 보면, "미련한 자"는 "지혜자"와 "명철한 자" (1:5)과 대조된다. 잠언에는 "미련한 자"에 대한 세개의 용어가 나타나며('ewil, kesil, nabal), 이들 사이에 의미론적인 구별은 별로 없다. 어리석은 자는 완악하고 (15:4; 27:22), 싸움을 좋아한다 (20:3). 교훈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는 명철과 모략을 얻으려고 열린 마음을 가진 지혜자와 대조된다.
2. 서문 (1:8-9:18)
1. 부모의 첫 권면: 나쁜 친구를 조심하라 (1:8-19)
아버지가 자식을 지혜로 가르치는 본문 중 첫번째 것이다 (2:1이하; 3:1이하; 4:1이하). 이 본문들이 1-9장의 중추를 이룬다. 이 단락은 공통점이 많다.
이 첫 교훈은 기본적으로 "명령형"과 "동기절"(ki)로 제시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교훈하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부모의 첫 가르침은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폭행과 강도질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식은 부모의 가르침과 불량배들의 유혹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전자는 장수와 명예를, 후자는 무죄한 자를 살해하여 신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지만 치명적인 보응이 있다.
이런 가르침은 가정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지만, 스승이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볼 수도 있다. 지혜를 얻는 데 있어서 "속이는 남자" (1장)와 "속이는 여자" (2장)가 있다. 이들은 방해자들이다. 이 둘은 "합성어"로서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즉 "지혜를 얻는 데 있어서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이 단락은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내 아들아, ~ 하지 말라. 왜냐하면...."(8절)의 형식이 10절과 15절에 나타난다.
11-14절에서는 악한 자들의 의도가 나타나며, 15-19절에는 그들의 행동이 나타난다.
"가다" (11, 15절)
"매복하다"와 "기다리다" (11, 18절)
"아무 까닭 없이" (11, 17절).
(1) 서론 (1:8-9)
(2) 불량배 그룹에 들어가지 말 것 (10-14절)
(3) 다시 경고함 (15-16절)
(4) 불량배 그룹에 들어간 자의 무서운 파멸 (17-19절)
1). 서론 (1:8-9)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 절은 "내 아들아"라는 부름으로 시작된다. 여기의 "아들"은 혈족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어머니의 가르침"이 "아버지의 훈계"와 평행을 이루는 모습은 이집트와 바벨론의 교훈집에는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이다. 잠언서에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해 준다. 부모가 함께 아이를 가르친다.
잠언에서는 어머니가 스승으로 가르친다 (6:20; 31:1). 여기에서 어머니는 유아를 가르치고, 아버지는 더욱 심각한 교육을 한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아버지의 훈계"와 평행을 이루는 "어머니의 법" (torat 'immeka)이 이런 해석을 비판해준다. "법"은 기본적으로 "가르침"을 뜻하지만, 이 단어는 대단히 높은 비중을 제시해 준다.
"들으며 떠나지 말라"에는 발전이 있다. 지혜를 습득하는 행동의 강도에 발전이 있다. 가정이 옛 지혜와 오늘날 젊은이의 필요를 이어주는 산 고리이다.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부모-스승의 가르침에 마음을 두고 (8절), 순종해야 하는 동기를 제시한다 (9절). 부모의 가르침은 값비싼 보석과 같다.
"아름다운 관"은 부모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자녀에게 주어질 영예를 말한다. 이집트에서는 원수를 물리친 용사의 머리에 씌워준다. "관" (liwyat)이란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여기와 잠언 4:9에서만 나타나며, 높은 직책을 시사해 준다.
"아름다움"(chen)이란 명사는 여기에서 형용사적으로 사용된다. 잠언 31:30에서 "아름다움" (매력)은 "속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존귀, 존영"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아름다운 관"은 "우아한 화관"(임승필)으로 제시된다.
"금사슬". 이집트에서는 높은 재판관과 대신들이 그들 목에 사슬을 걸고 모범적 봉사를 상징해 준다. 이것은 70인역에서 "금사슬"로 번역된다. 그러나 그냥 "목걸이" (<표준>, <공동>, 임승필)로서 "영광의 사슬" (chain of honor, REB)이다.
"아름다운 관"과 "금사슬"은 부모의 가르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시사해 준다. 이것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3:21-24에 나타난다.
2).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1:10-19)
(1) 아들이 세상에서 명성을 얻으려고 할 때, 닥치는 유혹이 그려진다. "죄인"은 상습범이다. 폭력과 심지어 강도질까지 개의치 않는다. 냉정하게 계산하고 실행한다. 강도들과 사악한 살인자 집단이다. 그들은 "음부"(스올)로 자신을 비유한다. 욕심이 끝이 없는 괴물이다 (잠27:20). 살인과 폭력에 대한 그들의 욕망이 끝이 없다.
(2) 이들은 "꾄다". 흥분 (11, 12절), 많은 돈(13절), 동지애 (14절)이 교묘하게 깔려 있다.
(3) "싫다고 말하라". 상관 말라 (10, 15절). 딱 잘라 거절하라.
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10절은 너무나 짧으며 마치 하반절에 무엇이 빠진 것 같다. 11절은 너무나 길다.
"내 아들아"는 새로운 교훈을 시작할 때 나타난다 (1:10, 15; 3:11; 5:7; 7:24). 이거은 상황을 묘사한 후 스승의 경고를 다시 시작하거나 (1:15; 5:7; 7:24), 잠간 주제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시작할 때나 (5:20), 새로운 경고를 시작할 때 나타난다 (3:11). 아마 아들은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나 독립적인 인생을 살려고 한다.
"좇지 말라"(tobe')는 "동의하다, 기꺼이 하려고 하다"는 동사('abah)의 3인칭 단축명령형(jussive)이다 (GK 68h, 75hh). 많은 사본들과 역본들은 보다 정상적인 형태(tabo')로 읽는다 (BHS 각주). 멏몇 사본들은 "너가 가다"로 읽는 데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동의하지 말라"는 뜻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부패한 말을 대적하라 (요일 4:4). 10절하의 명령이 15절에 다시 반복된다.
11-14절은 죄인들의 유혹을 설명한다. 그들의 유혹 (11절), 계획 (12), 목적 (13), 투구?? (14)로 이어진다.
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은 조건절이다. 주절은 15절에 나타난다.
"그들은 너를 이렇게 꾀리라"라는 번역은 좋은 의역이다 (<공동>).
"우리와 함께 가자"는 유혹자의 첫 말이다 (창3:-5). 이들은 그룹을 좋아한다.
"우리가 피를 위하여 엎드리자"(ne'erbah ledam)는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로 의역된다 (<개역>). 외스털리는 "피"(dam)를 하반절에 나오는 "죄없는 자"와 평행을 이루기 위해 "온전한 자"(tam)로 수정하여 읽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11절의 의미는 16절과 18절에서 계속되고 있다.
상반절의 "(사람의) 피"는 하반절에서 "죄없는 자"와 평행을 이룬다.
하반절의 "까닭 없이" (chinnam)는 어렵다. 이것은 주동사인 "우리가 숨어 기다리자"와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숨어 기다리는 데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부사는 "아무 이유 없는 적대감으로 닥치는 대로 죽이자"는 뜻을 담고 있다. 이리하여 이 불량배들이 폭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개인적 가책이 없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폭력을 위한 폭력"을 즐기고 있다.
겜서는 여기에서 지주제의 폐악과 사업의 탐욕과 법적인 부패를 찾지만, 맥케인은 이런 구체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이 구절은 아직 미성숙한 젊은이들의 이성 없는 폭력에 너무나 잘 어울리고 있다.
12 음부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이 구절은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며 평행법을 따라 제시된다. 먼저 이 절은 "우리가 삼키자"는 구호로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앞 절에서 "우리가 숨어 기다리자"와 멋있게 연결되고 있다. 그들은 "숨어 기다리다가 삼키자"고 호소하고 있다.
"산채로"(chayyim)는 "통째로" (temimim)와 좋은 평행을 이룬다. 이 폭력배들은 사람들의 목숨에 가치를 두지 않으며 신선한 고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산 채로" 먹기를 원하고, 야수들처럼 "통째로" 먹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의 먹이를 철저하게, 예기치 않게, 부당하게 삼킨다 (마 21:38).
"음부"(she'ol)는 "무덤"(bor)과 평행을 이룬다 (시편 주석에서 이 평행법을 가져올 것). 여기에서 "음부"와 "무덤"은 가나안 신화적인 영상을 깔고 있다. 가나안 신화에서 죽음의 신 모트(Mot)는 바알을 삼킨다 (문헌적 증거). 구약성서에서 "고라와 그 일당들"은 산채로 땅에 삼킨바 되어 죽으며(민 16:30), "주님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의 대적을 삼킨다" (출15:12). 또 다른 곳에서는 스올이 그 입을 열고 게걸스럽게 그 먹이를 삼킨다" (사 5:14;합 2:15;잠 27:20; 30:16 등).
여기에서 "음부"는 "장소라기 보다 힘"을 뜻한다 (Clifford 38; 사 5:14).
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다시 한번 "동지의식"과 "패거리 의식"이 나타난다. "우리가 얻고"는 "우리가 채우리라"와 이어진다. 그들의 중심 관심은 "온갖 보화"에 있다. 이것은 "온갖 값진 것" (<표준>), "온갖 값진 재물" (<공동>)로 제시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 만을 가질려고 하지 않고, 자기 집을 더욱 치장하기 위해 "남의 보물"을 탐내고 있다.
상반절의 "온갖 보물"은 하반절에서 "빼앗아 온 것" (shalal) 혹은 "털어온 것"으로 제시된다. 이 용어는 전쟁에서 이기고 빼앗아온 "노획물"이지만, 여기에서는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 도적질하여 탈취한 것이다.
"우리 집"이란 표현은 은유적일 수 있다. 와이브레이는 이 절에 근거하여 이들이 "방랑자"나 "추방자"가 아니라, 한 동네에 같이 살고 있는 "시민"이라고 본다 (40쪽). 맥케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해마다 동네의 공동 용지에서 수익을 재분배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인 불의"가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269쪽). 우리는 자본가들의 합법적인 폭력에 익숙하므로, 이런 사회적인 해석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게 된다. 이들은 "땀을 흘리지 않고 수고 없이 단번에 벼락부자가 되길 꿈꾸며," 멍청한 젊은이를 가담시키고 있다.
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불한당들의 마지막 호소가 제시된다. 그들은 젊은이에게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자"고 제안한다. 히브리어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으로 특정한 것을 얻도록 하는 방법이며, 그것은 땅이나, 훔친 옷이나, 집이나, 구체적인 의무나 재앙에 대한 책임일 수 있다" (Whybray 40). 따라서 여기에서 "함께 제비 뽑자"는 말은 "운명을 같이하자"는 은유적인 뜻이 아니라, "훔친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자'"는 뜻이다. 이 도둑들은 무죄한 자를 죽이고, 돈을 나눌 때는 공평하게 하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는 제안은 상반절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해준다.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지파별로, 가족별로 제비를 뽑아 각자의 기업을 나눈 것처럼, 이제 제비를 뽑아 한지파-한가족처럼 "공동재산"을 가지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 불량배들의 초청은 뒤에 나오는 "계집 우매"의 초청과 여러모로 유사하다 (7장). 둘 다 "오라," "기다리자," "찾다," "스올" 등의 단어들을 사용한다. 둘 다 사람들을 설득하여 한 패거리가 되자고 한다.
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이제 지혜의 스승은 10절에서 시작한 경고를 다시 가져온다. 그는 이 소절에서 자신의 이유를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내 아들아"를 통하여 (70인역에는 생략됨), 보다 엄숙하게 경고한다.
상반절의 "길"(dereq)과 하반절의 "길" (netiba)는 다른 의미의 폭을 가진다. 이 둘은 여러 구절에서 평행을 이루며 나타난다 (욥 24:13; 잠 3:17; 7:25; 8:2; 12:28; 사 42:16; 43:16; 58:9; 렘 6:16; 18:15; 애 3:9; 호 2:8). 사전학자들은 하반절의 "길"을 "짓밟힌" (trodden)이란 형용사형이 명사화 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소로"로 본다 ('행로' 임승필)
"네 발을 금하라"는 "네 발을 들여놓지 말아라" (<표준>, <공동>, 임승필)로 제시된다.
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데 빠름이니라
16-17절은 둘 다 "왜냐하면" (ki)으로 시작한다. 대부분 경고 다음에는 하나의 "이유 구문"이 나타나는 데 여기에서 두개가 나타나는 것이 이외이다 (1:8-9; 3:1-2; 4:1-2; 5:1-3 등).
이 구절은 "그의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라는 이사야 59:7절 상반절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 절은 상태가 가장 좋은 두개의 70인역본 (바티칸 사본과 시내산 사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BHS 편집자는 이것을 첨가로 생각하고 "삭제하라"고 제안한다. 클리포드도 이 절이 이사야 59:7에서 가져와 수수께끼 같은 17절을 설명하려고 한다고 본다.
16절은 "그들의 발"을 통해 15절과 이어지며, "길을 가다"에서 "줄달음치다"로 발전한다. 악인들이 악을 시행하기 위해 "서두르며, 달음박질하고 있는 모습"이 잘 그려진다. 원래 전쟁에서 "발이 빠르다"는 것은 큰 자랑이고 영광이지만, 여기에서 그들의 "빠른 행마"는 그들의 악을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17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이 절은 해석이 어렵다. 먼저 "그물을 치다"에서 "치다"라는 동사(mezora)의 해석에 이견이 있다. 70인역과 대부분의 역본들은 이 동사가 "넓히다, 펴다"는 뜻으로 번역한다 (벌게이트는 예외임). 70인역은 "분수에 벗어나게 그물이 새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다"로 번역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그물에 걸릴 것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리아역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 새 (무죄한 자) 앞에 (몰래) 그물을 쳤다"로 번역한다.
토마스 (W. Thomas)는 "(씨를) 뿌리다"라는 어근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zrh의 푸알분사형, 아랍어 dr', '키질하다, 던지다, 흩다')[1] 이렇게 보면, 여기에서는 "새를 잡기 위해 미끼를 던져 놓고 그물을 펴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드라이버는 어근을 mzr로 보며 (동족언어에서 '압축하다'는 의미), "그물을 단단히 잡아당기다"로 해석한다.[2] 토마스와 드라이버는 새를 잡는 것과 연관하여, 전자는 "첫 단계에서 그물을 치는 것"을, 후자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물을 잡아당기는 것"을 강조한다(McKane 270).
왜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인가?" 새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그물을 치는 것을 보고도 그 안으로 뛰어들기 때문에 헛일인가?" 혹은 "새들조차도 그물을 치는 것을 보면,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물치는 것이 헛일인가?" 현재 우리말 번역들에 따르면, "보잘 것 없는 날짐승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그물 쳐놓은 것을 알아채고서는 그리로 날아들지 않는다"로 보며 두번째 해석을 지지한다(//NIV).
여기에서 또 하나의 어려운 문제는 "새"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있다. 이 새는 불량배들을 가리키는가? 혹은 그들의 희생자를 가리키는가? 혹은 제자나 경찰을 가리키는가? 만약 '제자'로 본다면, 유혹자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불량배'로 본다면, "악인은 악한 운명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쁜 짓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어리석은 새처럼" 결국 그물에 던져지고 말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Whybray 42).
클리포드는 여기에 사용된 동사 (zarah의 피엘 분사형)가 "(곡식을 키질하려고) 높이 던지다"는 뜻이 아니라, "명백하게 보여지도록 높이 들다"는 뜻이므로 "신성한 수동태" (divine passive)를 뜻한다고 보며,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잡기 위해 쳐 놓은 그물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쳐들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의역한다. 즉 "하나님의 보응 ('그물')은 보이지 않게 역사한다" (39쪽).
18 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8절은 17절의 은유를 예증하고 있다. 17절에서 '만약 새가 자기를 잡는 그물을 치는 것을 본다면, 헛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18절은 갑자기 "불한당들"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다. 즉 17절의 새와 18절의 불한당들은 동일한 운명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17절은 "새들이 그물을 치는 것을 보지만, 그 안에 있는 미끼 때문에 그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불한당들도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것을 알고도 그물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으로 18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하며 경계해야 할 모든 이유를 다 갖고 있었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욕심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곡식을 먹으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노상강도들도 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없었으며, 경고에서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을 파멸시키는 길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McKane 271).
11절에 제시된 "엎드리다" ('arab)와 "숨어기다리다" (tsapan)이 정확하게 여기에도 나타나 수미일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숨어 기다리며, 매복하여" "무죄한 자의 피"를 노렸지만, 결국 "자신의 피"를 흘리고, "무죄한 자의 생명을 노렸지만," 오히려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심판"을 받는다. 즉 죄인은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이 해하려고 하였던 방법 대로 심판을 받는다. 즉 "죄의 부메랑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19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19절은 18절에 대한 결론을 제시한다. "이와 같다" (ken). 플뢰거 (Ploeger)는 지혜의 스승이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예를 가져와서 그의 경고를 더욱 인상깊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Whybray 42에서 인용).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유형의 폭력을 범세계적으로 보고 있다.
"이를 탐하는 자"(botse`a batsa`)는 "부당한 이득을 탐하는 자" (<표준>), "모리배" (<공동>)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탐하다"는 동사는 "(목숨을) 자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욥 27:8; 사 38:12), "남의 목숨을 끝내는 자는 자기 목숨을 끝내는 자"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Whybray 42).
많은 주석가들은 "길"('orchot)이라는 단어의 발음을 약간 수정하여, "끝" ('acharit)으로 읽자고 제안한다. 욥기 8:13상도 이 절과 시상이 아주 유사하며, 70인역은 "종말" (ta eschata)로 읽고 있다 (히브리어는 여기와 동일하게 'orchot이다). 이렇게 본다면, "폭력으로 재물을 얻은 자의 운명은 이와 같을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이 절의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번역이지만, "길"도 "운명"과 "종말"을 뜻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19절 하반절의 주어는 "그것"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말 새번역들은 "그가 얻은 재물" (<표준>), 혹은 "재산" (<공동>)을 주어로 본다. "남 등쳐 먹고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사는 자들은 다 이러하니, 결국은 그 부당한 재산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리라" (<현대어성경>).
폰 라드는 "보응"(retribution)이라는 용어의 적절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3] 왜냐하면, 그것은 심판을 추가적인 법정적 행위로 보기 때문이며, 이런 입장은 여기와 다른 구약성경의 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행동 자체가 선과 악의 결과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즉,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와 '그 나쁜 결과'는 법정적인 판결과 심판의 결과가 아니라, 내적이고 필연적이라는 점이다" (McKane 271에서 인용함).
2. 어리석은 자에게는 두번째 기회가 없다 (1:20-33)
이 단락도 다양하게 분석된다.
클리포드는 (1) 배경 (20-21절), (2) 지혜의 철수 (22-32절), (3) 지혜의 임재 (33절)로 나눈 후, 다시 둘째 부분은 (1) 책망과 선언 (22-23절), (2) 첫째 이유와 거부 (24-27절), (3) 둘째 이유와 거부 (28-31절)로 나눈다.
1). 여선지자 지혜의 호소 (1:20-23)
교사가 직접 지혜에 대해 말하지 않고 지혜가 스스로 나서서 모든 사람에게 돌아오라고 말한다. 귀부인 지혜가 말한다. 더욱 효과적이고, 극적으로 호소한다. 지혜의 연설이 시작된다. 이것은 아주 잘 짜여진 시이다. 트리블은 여기에서 동심구조를 발견한다 (Trible 1975:509-18).
여기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권위로 말하고 있다. 마치 신명기와 선지서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생사를 결정하듯이, 여기에서는 지혜의 가르침을 받는냐 혹은 거부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라진다 (23, 28절을 보라). 이런 점에서 '여인지혜'는 '선지자'와 같다.
클리포드는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를 "회개의 요청"으로 볼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tashubu + le)는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명료하지 않다 42쪽을 보라).
(3) '나의 신을 부어주리라'도 선지자적이다.
여기에서 "여인 지혜"가 공공장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돌발적이며 충격적이다. 여인이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소리를 들으라고 외치는 모습은 너무나 비동양적이다.
랑은 여기에서 '지혜'가 "교사"로서 "교실의 배경"을 이 시가 담고 있다고 하지만(Lang), 아직까지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교육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이 문장은 "주어 + 장소의 부사 + 동사 // 장소의 부사 + 동사 +목적어"의 구문구조로 짜여져 있다. 즉 주어 "지혜"와 목적어 "그 소리"는 "이중기능" (double-duty)으로서 상반절과 하반절에 함께 걸리고 있으며, 문법적으로 대칭적인 평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지혜"가 여기에서 복수형(chokmot)으로 나온 것에 대해 대부분의 학자들은 "강조형의 복수" (.pluralis intensitatis, 임승필), 혹은 "종합성의 복수"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며, 유창하고, 진실하며 고결한 지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Gemser; McKane 272에서 인용). 그러나 올브라잇은 이 복수형은 "가나안어의 영향"으로서 마치 히브리어 여왕 (milkat는 원래 milkot였음)에서와 같은 언어적 현상으로 본다 (즉, 원래 chukmatu가 chokmat를 거쳐 chokmot로 변했다는 것이다 (McKane 363을 보라).
"부르다" (taronna)는 형태는 "즐거운 소리를 내다"는 동사 (ranan)의 "권유형", 혹은 "칼미완료의 드문 강의형"으로나, 혹은 "간청, 간구, 선포, 기쁨으로 소리를 지르다" (rana)는 동사의 미완료형 (3인칭 여성 단수)으로 여겨진다 (잠8:3). 후자는 타조가 "찢어지는 목소리를 낼 때" 사용되며 (K&B), 욥기 39:23에서는, "(화살통이 신나게) 덩그렁 거리고" (<공동>)라는 뜻으로 제시된다.
"길거리"와 "광장" (<개역개정>, <표준>)은 "거리"와 "장터" (<공동>)으로 제시된다. 전자(chuts)는 기본적으로 "집이나 도시나 진지의 밖"을 뜻하며(K&B), 후자(rechobot)는 "사람들이 모여 장사를 하는 성문 안의 넓은 광장을 뜻한다" (Whybray 45).
클리포드는 여기에서 "공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비범한 지혜로서 권위 있게 말하는 이스라엘의 여인들의 행동이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삼하 20:16-9; 4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시의 문학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21 훤화하는 길 머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 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가로되
이 절은 "장소의 부사 + 동사 // 장소의 부사 + 목적어 + 동사"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훤화하는 길 머리" (bero'sh hommiyot)는 직역하자면, "시끄러움의 머리"로서, "시끄러운 길목" (<개역개정>, <표준>), "떠들썩한 네거리" (<공동>), "북적대는 저잣거리" (<현대어>), "법석대는 거리 모퉁이" (임승필)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머리"는 "성의 가장 높은 부분" 이라기 보다, "성문 입구"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RSV는 "시끄러움"을 70인역을 따라 "성벽"(chomot)로 수정하나, 히브리어 자음 h가 ch로 변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GK 75v는 사 22:2과 여기의 본문을 통해 이 형식을 확증한다).
"훤화하다" (hommiyot)는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므로, "성문 앞에서 떠들석한 소리가 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하반절의 "성문 어귀와 성 안"은 두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라 "성 안 문의 입구에서"라는 한 장소이므로, "성문 어귀"로 번역하는 것도 충분해 보인다.
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그 동안 2행(bi-cola)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갑자기 3행(tri-cola)으로 변하며 또한 2인칭에서 3인칭으로 전환하고 있다.
여인 지혜는 그녀의 청중들이 "지혜" 대신에 "어리석음"을 더 좋아한 죄를 범했다고 꾸짖는다.
시편을 열어주는 1편에서는 "죄인"이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로 나타났는 데, 잠언을 열어주는 1장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과 "거만한 자들"과 "미련한 자들"이 삼총사로 나타난다. 이 두 본문에서 "오만한 자들"은 중첩되고 있다.
여기의 세 부류들은 "어수룩한 사람들아, 비웃는 사람들, 미련한 사람들" (<표준>)과 "철부지들, 거만한 자들, 미련한 자들" (<공동>)로 새롭게 제시된다. 여기에서 구태여 "자들"을 "사람들"로 바꿀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호칭 속에 이미 경멸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자"는 "둔감하고 무모한 자들"을 가리킨다 (Clifford 42).
동사의 관점에서 보면, "좋아하다" ('ahab), "기뻐하다" (chamad), "미워하다" (sana')에로의 발전과 변화가 나타난다. 원래 "사랑하다"와 "미워하다"는 반의어인 데, 이 대립적인 단어들 사이에 "기뻐하다"가 끼워져 있다. 여기의 "기쁨"은 " 간절히 사모하며" (desire), "탐내는" (lust) 느낌이다. "어리석음"과 "거만"을 이렇게 좋아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절에서 "어리석은 자들(petayim)은 어리석음"(peti)을, "거만한 자들(letsim)은 거만"(latson)을, "미련한 자들(kesilim)은 지식(da'at)"을 이라는 구문 속에 (주어 + 목적어) 주어와 목적어가 상반절과 중반절에서는 동족을 이루며 (마소라 사본은 상-중반절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하반절에서는 반의어를 취한다. 따라서 하반절에 큰 변화가 있다. 즉 "어리석은 자들이 어리석음을 좋아하고, 거만한 자들이 거만을 기뻐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상-중반절의 질문에 담긴 답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면, 하반절의 답은 더욱 힘든 일이다.
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에서 "나의 책망" (<개역개정>, <표준>)은 "나의 훈계" (<공동>, 임승필)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교육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 단어 (tokachat)는 "비난, 견책, 징계, 꾸지람, 책망, 논증" 등의 뜻을 모두 포함하지만, "바르게 하다"라는 기본적인 뜻(yakach)를 갖고 있으므로 "훈계"가 좋아 보인다.
"돌이키라"는 동사는 명령형이지만, 마소라 사본은 "너는 돌아오리라"는 미완료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에머톤(Emerton)은 첫 단어인 "언제?" (matay)가 22절의 "어리석음" (peti)와 homoioteleuton으로 생략되었다고 본다 (자음으로는 pty와 mty). 이렇게 보면, "너희들은 언제 돌아올 것인가?"가 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이 절을 조건절로 보며, "(내 훈계를 듣고) 돌아서면" (<공동>)으로 제시한다 (GK 159b-d).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주며"에 대해 <공동역>은 "내 속마음을 부어 주고"로 제시하여, "나의 신"의 정체성에 대해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성령론"과 연관된 문제로서 "나의 신"(ruchi)이 가지는 의미의 폭과 연관된다. "신" 혹은 "영"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신"도 될 수 있고, "정신, 지성, 총명"이라는 정신적 능력도 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의 신" (혹은 '영')으로 번역하는 자들은 "지혜의 영"으로서 "성령"을 가리키며, 따라서 "예언적 성격"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사 11:2; 44:3). 마치 선지자들이 "주의 영으로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처럼" 여기에서는 "여인 지혜가 여선지자로서 그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지혜의 영'을 약속하고 있다."
여기의 "나의 신"을 "내 속마음"으로 번역하는 자들은 의인화된 지혜가 자신의 생각을 "전수해 주는 것"으로 본다. 와이브레이는 "부어주다" (naba')라는 동사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언어로 전달해 주는 데 사용된다"고 본다 (시 94:4; 잠 15:2, 28). 또한 상반절의 "나의 생각"은 하반절의 "나의 말씀" (debaray)과 평행을 이루기 때문에, "내 생각을 쏟아부으리라"는 번역(RSV)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위의 두 번역과 해석은 문법적으로 모두 가능하지만, "나의 신을 부으리라"는 전통적인 번역이 문맥에 나타난 "지혜"의 모습에 더욱 가깝게 나타난다. (1) "나의 영"과 "내 말씀"은 예언문학에서 자주 평행을 이룬다. (2) "내 신을 부어주다"에서 동사의 용법은 예언과 연관하여 자주 나타난다. (3) "내 말을 가르치리라"의 용법과 예언 관계. (4) "돌아오라"는 권면과 "권면의 거부에 대한 심판"은 예언서의 성격에 일치한다.
2). 지혜의 거절 (1:24-33)
여기에서 경고하고 있는 지혜의 성격에 대해 와이브레이는 지혜의 책망이 "예언적 심판 장면과 별로 같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지혜는 재앙의 시행자가 아니라 그것을 경멸하며 관찰하는 자"임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47쪽). 또한 그는 "더 넓은 문맥에서 볼 때, 이 단락은 정죄 보다는 설득의 기교를 수사학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연설의 끝부분에서 지혜에게 귀귀울이는 자에게는 여전히 피할 길이 있음을 제시하므로" 지혜는 선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왈키는 '여선지자'로서 지혜를 본다. 임승필 역시 같은 입장이다. "지혜는 예언자처럼 꾸짖고 경고하고 위협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처럼 '지혜'의 메시지도 무관심과 배격만을 불러 일으킨다." (25. 각주 25).
(1) 어리석은 자의 거절은 주님을 거절한 것이다 (24-25절)
(2) 내가 비웃으리라 (26-28절). 고집스러운 자에게 파멸이 온다.
[1] 생각지 않은 때에 재앙이 온다. 끔직한 두려움이 덥친다.
[2] 폭풍과 광풍 같다.
(3) 재앙이 올 때 깨달으면, 너무 늦다.
(4) 그들은 재앙을 자초하였다 (31절)
(5) 그들의 잘못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32절).
24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 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이미 22절에서 "언제까지"('ad-matay)라는 탄식은 "청중들이 지금까지 지혜를 거부하였다"는 점을 가정하며, "23절에서 여인지혜는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었지만" (Whybray 47) 그들의 반응은 적절하지 않았음을 이제 지적한다. 여인 지혜는 아픈 가슴으로 통렬하게 자신이 받은 거부를 말하면서 그들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근거를 "왜냐하면" (ya'an)으로 제시한다 (24절). 이 전치사는 "항상 인과적인 뜻으로 나타난다" (Williams 61).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24-25절의 시제를 과거로 본다 (KJV, NIV, RSV, <개역개정>, 임승필, '불렀건만, 내밀었건만'). 그러나 우리말 번역의 대부분은 24절에서 지혜의 활동은 현재로 청중의 반응(24-25절)은 과거로 번역한다 (<개역>, <표준>, <공동>). 문제는 "내가 부르다" (qara'ti)라는 완료형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다. 이것은 "완결성" 보다는 상황을 전체로 보는 것이며, "지속적 완료" (persistent perfective)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동안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불러 왔으며, 손을 펴왔지만 너희들은 싫어하고, 거부하였다"는 뜻이다.
평행법의 관점에서 보면, "부르다"(qara')와 "손을 펴다"(nata yad), "듣기 싫어 하다"와 "돌아보지 않다"가 평행을 이룬다. 문법적으로 보면, "완료 + 미완료" (상반절)와 "완료 + 미완료" (하반절)의 균형성에서 "칼형 + 피엘형" (상반절)과 "칼형 + 히필 분사형" (하반절)의 비대칭성으로 변화한다.
"손을 펴다"는 숙어는 선지서에서 주로 하나님의 "펴신 손"으로 "은총"과 "심판"의 문맥에서 여러 번 나타난다 (사 5:25; 9:11, 16, 20; 10:4; 14:26, 27; 23:11; 31:3; 45:12; 렘 6:12; 15:6; 21:5; 32:21; 겔 6:14; 14:9 등). 또한 이 동사는 "귀를 기울이다" (nata + `ozen)라는 숙어로도 나타난다 (시 17:6; 102:3; 116:2; 단 9:18).
"듣기 싫어하다"(ma'an)는 기본적으로 "거부하다, 거역하다"는 뜻이며, "돌아보지 않다" ('eyn maqshib)는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표준>),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공동>)로 새롭게 번역할 수 있다.
이 절은 이사야 65:1-2절과 유사하다. 후자는 야웨의 심판 메시지를 시작하는 부분이다.
25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구문론적으로 볼 때, 이 절은 앞 절의 대칭성을 깨뜨리고, 교차대귀법으로 나타난다 (동사 + 목적어 // 목적어 + 동사; A:B::B':A'. 부사 "모든"은 단지 "교훈" 뿐 아니라 하반절의 "책망"까지 포함하여 꾸미고 있다. 즉 청중들은 "전체적인 거부"를 하고 있다. "모든"은 "온갖" (<공동>)으로 번역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전자는 "총체성"을 후자는 "다양성"을 드러내어 준다.
"교훈"(`etsa)과 "책망"(tokachat)은 "충고와 책망" (<표준>), "충고와 훈계" (<공동>, 임승필)로 새롭게 제시된다 ('책망'에 대해서는 1:23을 보라).
이 두 단어의 평행법은 1:30에도 나타난다.
ותפרעו כל-עצתי ותוכחתי לא אביתם
לא-אבו לעצת נאצו כל-תוכחתי
26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이 절 역시 동심구조로 아름답게 짜여져 있다. 즉 "너희의 재앙 때에 [A] 내가 웃을 것이며 [B] // 내가 비웃으리라 [B'] 너희들의 두려움의 때에 [A']". 이리하여 "재앙"('eyd)과 "두려움" (pachad)이 대칭을 이룬다. 전자는 어떤 사건을 (신32:35; 욥30:12; 렘18:17; 46:21; 겔 35:5; 옵 1:13), 후자는 그에 대한 심리적인 반응을 잘 드러내어 주며, 동일한 평행법이 구약에서 몇 번 나타난다 (욥31:23; 잠 1:26, 27).
"웃다"와 "비웃다" 역시 구약에서 몇 번 평행을 이루며 나타난다 (대하 30:10; 시 2:4; 59:9; 나의 <시편주석> I을 보라). 지혜는 앞으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완전히 알고 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나도" (gam-'ani)가 문두에 나타나 강조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상관어구" (correlative)로서 "내 편에서도"도 번역되는 것이 적절하다 (Williams 64; Whybray 48; 삼하 12:13를 보라; 창 4:4; 삼상 1:28 참조). 청중들은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지혜'의 부름을 거부하였으므로, 이제 '지혜 편에서도' 그들에게 재앙이 올 때 비웃을 것이다.
27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라
이 절은 이례적으로 길며, 앞 절을 불필요하게 반복하고 있으므로 어떤 주석가들은 세번째 소절을 삭제하라고 제언한다 (BHS 각주). 이렇게 본다면, 26절에서 "재앙" (A), "두려움" (B)이 27절에서는 "두려움", "재앙"으로 순서가 바뀌어 동심구조를 이루며, 마치 4행을 이루는 것 같다. 앞 절의 청중의 "재앙과 두려움"이 이 절에서는 "광풍과 폭풍" (<개역개정>, <표준>; '태풍과 폭풍' <공동>)으로 묘사된다. 전자는 구약에서 단 한번 나타나며 (BW), 후자는 여러 번 나타난다 (욥 21:18; 27:20; 잠 10:25; 사 5:28; 렘 4:13; 암 1:14; 나 1:3 등).
여기에서 '지혜'는 재앙을 가져오는 자가 아니라, '재앙이 오는 것'을 알고 있다. 재앙이 올 때, 그녀는 단지 철수할 뿐이다. 그동안 그들은 지혜에게 응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혜도 응답을 거부한다.
이제 2인칭에서 3인칭으로 전환한다. 지혜는 자기 청중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거리를 둔다. 자신을 거부한 자들은 그들의 행동과 계획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24절에 나타난 '지혜'와 '청중'의 역할이 완전히 도치된다. 그동안 '지혜'가 '청중들'을 '불렀고' 나아가 "손을 펴며 찾았지만"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제 "재앙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자 비로소 그들은 '지혜'를 찾는다. 그러나 지혜는 응답하지 않는다.
하반절에 있는 "찾는다"(shachar)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darash)와 달리 희소하게 나타난다 (피엘형, 여기와 호 5:15; 사전 확인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를 찾으면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신 4:29; 렘 29:13). 그러나 호세아 5:6에서는 범죄한 백성들에게 비록 그들이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여기에서는 지혜의 유기가 나타난다. 지혜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거부되면, 어리석은 자를 유기한다.
29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이 절과 다음 절은 심판의 이유를 설명한다 (tachat ki는 '이유의 전치사구'를 이끈다. Williams 59). 어리석은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였다"는 동사(sana')는 강한 적대감을 내포한다 (나의 시편 89편 주석을 보라).
하반절에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에서 "즐거워 하다"는 동사(bachar)는 기본적으로 "선택하다"는 뜻이다. 언약과 연관하여 주로 나타나는 동사가 여기에서 "여호와를 경외함"과 연관되어 나타난 것이 흥미롭다.
30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이 절에 대한 주석은 앞의 25절을 보라. 한가지 흥미로운 변화는 "모든"(kol)이 앞 절과 달리 "교훈"에 걸리지 않고, "책망"과 이어진다. 이것은 다시 한번 "이중기능"(double-duty)을 말해준다.
31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개역>과 여러 역본에 나타난 "그러므로" (<표준>, RSV, LXX)는 접속사와 미완료를 "결과적"으로 본 번역이다. 다른 번역본에는 "그러므로"가 나타나지 않으며, 일반적인 금언 형식으로 제시된다 (<공동>, 임승필, NIV).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우리말로 "자업자득"이란 뜻이다 (잠 18:21; 사 3:10과 비교하라). 즉, "자신이 뿌린 씨를 자신이 거둔다"는 뜻이다 (갈 6:7).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는 "사람은 제가 꾸민 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법" (<공동>)으로 제시된다.
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이제는 지혜의 초청이 생사를 결정하는 문제였음을 강조한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meshubat petayim)에서 "퇴보"로 번역된 단어는 단지 "후퇴"가 아니라, "곁길로 가는 것"이다 (NIV, NRSV, 'waywardness'). 우리말 새번역에서는 "내게 등을 돌리고 살다" (<표준>), 혹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공동>), "배반" (임승필)로 제시된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항상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며, 배도하는 것"을 뜻한다 (Whybray 49).
"어리석은 자들"의 "퇴보" 혹은 "안일"이 처음에는 별로 문제되는 것 같지 않지만, 자신을 "죽이고"(harag의 칼형), "멸망시키는"('abad의 피엘형) 심각한 결과를 만들고 있다. 주님에 대한 태도 뿐 아니라, 지혜에 대한 태도에 따라 생사화복이 결정된다.
33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마지막 결론을 이루는 이 절은 "접속사 we + 분사형"으로 시작된다.
여인 지혜는 위협이 아니라, 약속으로 자신의 연설을 끝낸다. 지혜의 친구들에게 지혜는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을 것이다.
"평안히 산다"는 언약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안연히"()과 "평안히"()는 "평안히"와 "평온히"로 번역해도 좋아 보인다. 여기에서 "재앙"(ra'a)은 윤리적으로 "악"을 뜻하기 보다, "해"와 "불운"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