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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가?
단어 '정토' 외에는 불교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는 방이다.
'정토'는 불교에서 추구하는 이상세계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일상적 용어인 것 같은데.
더욱이, 세이초노이에의 신도라면 코보대사의 불교에 심취해서 헨로무료야도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며, 이승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겠다는 뜻일 것이다.
간 밤에 도착하여 통화를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했기 때문에 메모만 남겨놓고 나선 시각은
06시 40분쯤.
이요키 산골은 온통 과수 농원지역이다.
배와 복숭아를 생산, 직매한다는 미야타농원(宮田/숙소의 안내판)과 관련이 있는 듯 생각
되어 379번국도변의 과수원들을 자세히 살피며 걸었다.
와다터널(和田)을 지나 꽤 되는 카케키다리(掛木橋 /小田川) 앞까지 그랬으나 허사였다.
다리 건너기 전에 좌측 길 야산지역도 과수원이다.
헨로미치는 이 길과 다리를 건너가는 379번국도, 2길인데 오세(大瀨)를 벗어나면 합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전자를 택하여 오세 직전까지 살폈으나 이 독특한 종교의 신도와의
만남은 끝내 불발이 되었다.
오세 마을의 오다강가에는 야숙하기 좋은 정자(개눈에는 O만 보인다?)가 2개나 있다.
오다강(小田川) 신나루야하시(新成屋橋) 북쪽 끝과 동쪽 100m 남짓의 위치에.
헨로코야가 아니고 마을 정자지만 두번째의 벽에는 정확하게 가동중인 괘종시계도 있다.
걷기 1시간쯤 지날 때까지 통증이 없었으므로 오늘은 무사하나 싶었는데 지각했나.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문안 인사하듯이 찾아와서 괴롭히는 마(魔)를 감당하기 안성맞춤인
이 정자에서 한참을 보내야 했다.
이 구간의 헨로미치는 현도324번을 달고 있다.
우치코 타운의 전통색인 하얀 벽은 아니지만 우치코타운 내의 비좁은 거리들 중 하나처럼
보이는 길이다.
도농, 귀천 불문하고 대대로 이어오는 올곧은(?) 등교방식이 실현되고 있는 월요일 아침의
오세소학교 정문 앞을 지난 후 오다강과 나란히 가며 국도379번과 재결합한다.
현도241번이 분기하는 짧은 다리(河口橋) 건너편에도 헨로휴게소가 있다.
버스정류장을 헨로휴게소로 활용하라는 것인데 일본인들의 공치사는 수준급이다.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움막 정도를 몇개의 회사가 기부했다고 알리고 있으니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왼손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가.
작은 마을 오츠나리(乙成)를 지난 헨로미치는 오다강을 다시 건너는 하치오교(八王橋) 앞
에서 국도를 떠나 좌측 소로가 된다.
국도를 따라도 곧 다시 합치는데 국도의 직선화 신설에 따른 자투리 길 현상이다.
오다강을 따라 무심코 걷고 있는데 "キリストは すぐに 來る"(크리스토가 곧 오시리라).
개천에 다름 없는 좁은 강가, 산자락 마을(石積?) 길가에 자리한 낡고 평범한 농가의 창고
위, 2층벽에 붙어있는 이 글귀가 내 걸음을 붙들었다.
어제는 크리스토의 대속(代贖)을 알리는 성구가 그랬는데 오늘은 그 분의 재림이다.
이 허름한 농가의 가족이 크리스토의 재림을 갈망하고 있는가.
크리스토의 재림신앙은 감당하기 벅찬, 곤고한 현실을 전제로 성장해 왔는데.
일본에서 불교는 재래종(토착신앙)인 신토(神道)와 타협했다.
습합에 성공함으로서 단연코 신토에 버금가는 종교로 성장은 하였으나 경계선이 애매한
(신토와 불교의) 불교가 되었다는 느낌인데 기독교는 어떠한가.
전래 5세기가 넘었는데도 신도가 전체 인구의 0.5%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일본의 기독교.
불교와 달리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인가 극심했던 박해가 원인인가.
후자로 본다면 오진(誤診)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기독교신약성서(요한복음12 : 24)의 이 구절은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사이비제외)와
박해의 관계를 말해주는 명구다.
이카디야의 두 얼굴
헨로미치는 오다강을 다시 건너온 국도와 미야마구치다리(深山口橋) 끝에서 재결합한 후
곧 헤어진다.(中屋敷橋 앞에서)
교량공사가 지난했던 때에 쉬엄쉬엄 강과 동행할 수 밖에 없던 길들은 교량공법이 혁명적
발달을 한 이 시대에는 하나같이 토막날 운명이라 묘책이 없다.
바이패스(by pass)하는 379번국도와 1.5km전방에서 합류한다는 사설 안내판이 있다.
오리지널 헨로미치라 해도 바이패스를 많이 하기 때문인가.
2곳 대사당(千人大師堂200m,樂水大師堂1300m)에 대한 사설 안내판이다.
쿠카이노미치(空海の道/遍路道)에 호노(奉納)하고 가라는 안내에 다름아니다.
시코쿠순배자 천인숙기념(四國順拜者千人宿記念)이라면 헨로상 천명이 자고 갔다는 뜻?.
까미노에는 도나띠보(donativo) 알베르게가 있다.
형편대로 내고 자거나 능력이 없으면 거저 자고 가도 되는 숙박소다.
시코쿠헨로의 미니 도나띠보 알베르게로 봐도 될 듯.
이 길 진입지점 좌측에 서있는 "川登筏の里交流センターいかだや'(카와노보리이카다노
사토 교류센터 이카다야) 안내판을 보고 왔다.
마을 공동체의 단합과 발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기대했는데 실망했다.
까미노에서는 음식점이 휴업하는 주말 밤에 손님을 포함한 마을의 온 주민이 마을회관에
모여 실비 음식을 먹는 광경을 이따금 만난다.
주민간의 친교와 우의를 다지고 마을의 발전을 도모하며 이 식사를 통해 생기는 이익금을
공공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마을 기금으로 저축한다.
시골 마을에서 주말의 실비 데이트 장소와 시간으로도 활용하는 듯 한데 메뉴가 다양하고
워낙 저렴해서 내게는 모처럼 포식하고 다음날 음식까지 충분하게 장만하는 날이었다.
내가 뻬레그리노인 것을 알게 되면 합석을 원하는 팀과 따로 음식을 선물하는 팀도 있다.
개인과 단체, 소규모 가족과 규모 큰 가족, 연인과 업무관계 기타를 배려하며 잘 훈련되고
충분하게 확보된 볼런티어(volunteer)들이 민첩해서 불편함이 전혀 없다.
벤치마킹하고 싶은 마을 프로그램인데 카와노보리(川登) 마을의 이카디야도 그런 유형이
겠거니 기대했다가 그의 두 얼굴에 실망했다.
농산촌의 비싼 숙박업소에 불과하며 음식류의 값도 그렇다.
수량(水量)이 많았던 예전에는 여기 오다 강에 뗏목이 떴다 해서 이카다(筏)로 불렸던 듯.
라쿠스이(樂水)대사당은 88레이조에서 마주하는 대사상에 대한 개념을 달리 하지 않으면
마주하기가 거북하겠다.
재건축인지 리모델링인지 봉납리스트가 있는데 소유, 관리자는 누굴까.
산자락에 밀착한 반평 크기로 지은 것은 작고 초라해야 한다는 어떤 계시 때문인가.
내게는 전무한(후무 여부는 아직 모르겠고) 최소 대사당이다.
헨로미치에서 노변의 미니 보살당(?)을 보기는 까미노의 길가 또는 코너에 자리한 초미니
에르미따(ermita/마리아상 또는 천사상이 있는) 보기 보다 흔치 않다.
한데, 이 1.5km 옛길 구간은 시코쿠헨로의 성로(聖路)인지 대사당도 보살당도 흔하다.
아직 1.5km 오리지널 헨로미지가 계속되는 노변, 국도379번으로 다가가는 지점에 훈장을
받은 일본 육군 보병 고초(伍長/하사)의 비석이 서있다.
마모가 심해 시기를 알 수 없으나 그들이 일으킨 2차 세계대전 때 받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어떤 연유(緣由)로 생각하게 되면 아직도 문득문득 경기(驚氣)를 갖게 하는 악몽의 주인공
쿠로타도 일본 육군의 훈장 받은 보병 고초였는데.
가장 중요한 성명이 다른데도 같은 육군이며 같은 보병, 같은 고초라는 이유만으로도 아직
껏 몸서리치게 하는 사람이다.
야나세(柳瀨)터널을 나와 오다강을 건너온 국도379번에 다시 합류했다.
이카다나가시다리(筏流し橋)에 새겨진 그림으로 보아 추측대로 예전에는 뗏목이 이 강(小
田川)에 떠서 상류의 목재 등을 하류지역으로 운송했다.
이 일대가 심심산골, 오지였음을 의미한다.
다시 하기모리의 권고를 따르다
과일류의 무인 판매대가 도로 양편에 있으나 빈 대(臺)만 있다.
이른 아침(09시 이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우메즈(梅津)마을 정류소도 헨로상 휴게소로 활용하라고 권하고 있다.
잠깐잠깐 쉬라고(一休み一休み/히토야스미)
이 일대는 과일과 야채 등의 무인판매대가 군거하는 지역이다.
판매대를 헨로상 휴게소라 이름짓고,
"오츠카레사마데스(おつかれ樣です/수고하셨습니다)
스코시야슨데이카레마센카(少し休んでいかれませんか?/잠깐 쉬지 않으시렵니까?")
일본인들의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는 총체적이다.
우메즈터널 직전에 오다강을 건너가는 국도와 또 헤어지는 헨로미치.
오다강에 다리가 놓이지 않았고 터널이 뚫리지 않았던 예전에 다른 길이 있었겠는가.
이즘에는 10시 방향으로 오다강과 나란히 가다가 터널을 통과해 오는 국도(379번)와 다리
이치노세(一の瀨) 끝 지점에서 다시 만난다.
헨로미치는 국도를 횡단한 후 곧 다리 요시노가와(吉野川橋)를 건너는데 나는 이 다리 앞
에서 또 잠시 망설였다.
다시 둘로 나뉘는 헨로미치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379번을 따르는 길(鴇田峠遍路道)과 터널을 나온 후 분기한 국도380번과 함께 가는 길(農
祖峠遍路道) 중에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하기모리가 화살표를 그어놓은 후자와 X자를 마구 써댄 전자 중 택일 때문이었는데 그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미 체험한대로 그의 조언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걷기는 하였지만 전화위복이
된 해안길과 달리 산간로에서는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에.
후자를 택한다면 터널을 통과하는 379번을 따르다가 분기하는 380번으로 갈아탄 후 츠기
아와세 다리(突合橋)를 건너면 된다.(상당히 단축된다)
약간의 시간 낭비가 있었지만 국도380번으로 갈아탄 시각은 아침 9시 40분쯤.
2개의 길은 애교스럽다고 봐줄 정도로 적응이 되었기 망정이지 복수의 길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언감생심, 영성훈련 운운할 수 없는 길을 단지 걸을 뿐이라고 정리하면 되레 편한 길이다.
정서를 떠나 남의 나라 길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한 짓이니까.
잠시 국도를 따르던 헨로미치는 국도를 떠나 오다강과 함께 가는 무명의 이면로를 따라서
동진을 계속한다.
신작로(국도) 이전에는 요긴한 도로였으며 고객(차량)을 몽땅 국도에 뺐겼다 해도 엄연한
길이며 헨로상에게는 되레 잘 된 일이겠다.
국도보다 한결 편안한 길이니까.(이면도와 국도를 각기 따라도 오다에서 합류된다)
미즈모토(水元) 버스 정류장을 비롯해 이시야마다리(石山橋) 등을 지나 국도380번과 결합,
간논교(觀音橋)를 건넜다.
행정구역 개편의 상수(上手) 답게 개편으로 옛 오다 초(舊小田町)가 된 마을에 당도했다.
슈퍼마켓(A.Coop오다점)에서 아침 겸 점심용 먹거리와 맥주1캔을 구입 식사를 마친 때는
오전 11시쯤.
오르는 길이기는 해도 13km쯤 남은 44번 다이호지(大寶寺)가 오늘의 목적지지만 오늘도
더 늘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고무되어선지 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키타 군 우치코 초에서 카미우케나 군 쿠마코겐 초로,
식사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출발.
오늘이야 말로 5시간 동안에 헨로상은 아무도 만나지 못한 나홀로의 날이다.
우측의 고등학교와 좌측 소학교, 중학교를 차례로 보는 걸음에 또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퇴락해 가기 때문인지 통폐합당했으며 겨우 3천명 안팎의 인구인데도 거물급 교사들(校
舍群)에 샘이 났는가.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요란만 떤다고 원대한 소망이 달성되는가.
주목할 것은 이 큰 규모의 학교들이 현립(県立)고등학교, 정립(町立) 소.중학교인 점이다.
내 자녀만을 위한 사교육비 투자는 거시적으로 보면 개도 물어가지 않을 짓이다.
애써서 길 닦아놓으니까 문둥이가 먼저 지나가고 어렵사리 차려놓은 상에 망나니가 먼저
앉는 꼴이 되고 만 우리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엉덩이에 뿔나는 못된 송아지들이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시대는 백년하청인가.
순박한 민초들도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 하는데 내가 우선인 자들.
나라가 어찌 되든 잠시 위임받았을 뿐인 대소 권력을 조자룡 헌 창 쓰듯 하다가 망가지는
모양 피안의 구경거리가 아니다.
서서히 오를(上向) 차비를 하는 국도380번이 오다의 미치노에키(道の驛) '세세라기'(細
流)를 지나고, 현도52번이 분기하는 북단을 벗어났다.
잘 지었으나 이용자가 별로 없는 듯 한 휴게소에 잠시 앉았다.
피로감 때문이 아니라 취락의 휴게소로는 마지막이며 해발600m대를 향한 지속적 오름이
시작되는 시, 지점이라 그러는지 왠지 앉았다가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오다 강은 오히라 강(大平川)으로 바뀌었고 오다 마을에서 여기(휴게소)까지 오는 동안에
9개의 다리를 건넜다.
강의 꿈틀거림이 극심함을 의미한다.
휴게소 이후에도 몇번이나 그래야 하는 길이다.
교량 건설학교 실습 현장이라면 알맞는 이름이겠다.
정오에 휴게소에서 출발.
국도지만 노폭이 좁아지고 중앙분리선이 사라지고 교행이 어려운 길이 된다.
소규모라도 마을구간만 넓히고 종종 교행이 가능한 지점들을 확보한 편법 국도지역이다.
고원으로 치닫는 길인데도 인가가 있는 곳에는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버스정류소가 있다.
대개 반 통나무로 지은 목조시설인데 인근 산에서 솎아낸 간벌목의 재활용임을 밝힌다.
기증자와 건축자의 선행 밝히는 것을 잊을 리 있는가.
정상의 미시마진자(三島神社)를 정점으로 해서 내리막길이다.
구절양장에 다름아닌 길의 양 끝을 연결하면 길이가 엄청 단축될 샛길이 있다.
여기에서는 6분의 1쯤으로 줄어들 것 같은데 유혹임이 분명한 길.
2번째라면 당연히 그 길을 택하겠지만 초행이라 유혹으로 간주했다.
전체의 길이가 길지 않기 때문에 겨우 1km쯤의 단축 효과로 울창한 내리막 숲길에 미련을
갖게 하려는 못된 유혹이라고..
내리막길이 끝나갈 무렵에 또 하나의 헨로미치 안내판이 있다.
하다노도헨로미치畑峠遍路道)가 시작되는 분기점이다.
이 길의 임무는 아침에 요시노가와 다리에서 갈라섰던 노소노도(農祖峠)와 히와다도(鴇田
峠), 두 헨로미치를 연결하는 역할이다.
다이호지에 당도하기 전에 어느 쪽으로든 재결합하거나 서로 바꿔 타거나.
내리막 끝에도 출발지와 유사한 분위기의 헨로휴게소가 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터널이 있다는 것.
헨로미치도 국도380번과 함께 이 마유미터널(眞弓)을 나와 정상으로 복귀했다.
행정구역은 마유미터널을 지나는 동안에 키타 군 우치코 초에서 바뀐 카미우케나 군(上浮
穴郡) 쿠마코겐 초(久万高原町)다.
바야흐로, 지지노 강(父野川)과 짝한 동진이 시작되었다.
오다에서 토기노시로 산(登議城山/655m?)을 넘어가는 길 13km를 지난 지점.
산골 밋밋한 국도가 현도42번을 갈라놓고 가는 츠유미네정크션(露峰交差点/junction)이며
후지미네(父二峰) 소학교와 진료소가 있는 곳이다.
44번 다이호지는 백제로부터 전래된 사찰이다
하기모리의 영향력은 이 지점에서도 발휘되었다.
지도대로 라면 9시 방향의 현도42번을 따라야 하는데 그의 볼펜은 그 쪽에다 무례한 XX를
그었으며 국도380번을 좀 더 따르라는 것.
헨로상으로 하여금 헨로를 두고 헨로 아닌 길을 걷게 하려 한다면 고약한 훼방꾼 아닌가.
그러나, 시코쿠헨로 외의 전체적 길로 보면 그를 앞섰으며, 그 분야에는 노회한 늙은 니의
눈에도(지도를 본) 그의 권고에는 순도100%의 진정성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새삼, 고마운 마음으로 그의 권고를 따랐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한가로운 국도를 여유롭게 걸으며, 이따금 나오는 자투리길
(국도의 직선화로 파생된 짧은 이면로)도 걸으며 걷고 걷다가 휴게소에 앉았다.
낮 익을 뿐 아니라 한판인 휴게소와 홍보판이 세번째 만에 한 깨달음을 주었다.
오다 들머리와 마유미 앞 날머리에 이어서 세번째 보는 이요지(伊予路).
'이요'(伊予)는 옛 지명이다.
지금은 에히메현(愛媛県)의 이요 시, 이요 군을 말하지만 옛 시코쿠(四國)시대에는 이요노
쿠니(伊予の國)였다.
이요는 그렇다 해도 여기 휴게소 안내판에 붙어있는 '이요지'(伊予路/주변안내도에등장한)
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본의 음식점, 일본 음식의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는 이요지와 달리 자기에 대해서 침묵
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마고코로오 도로데 무스부 후레아이노 미치"(まごころを 道路で結ぶ ふれあいの道)
휴게소를 짓고 주변안내도(周邊案內圖)를 제작하는 등 정성을 도로에 쏟아부어 서로 교류
하는 길을 만들면서도 일본인 답지 않게 아무 것도 알리지 않는 정체는?
국도도 모처럼 무료하지 않겠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이다
국도380번은 국도33번이 관통하는 T자 길 교차로(落合)에서 나갈 길이 없다.
수명을 다한 길 앞에서 9시 방향으로 틀어 33번국도를 따라야 한다.
이전 사거리 이후 동행해 온 니묘 강(二名川)과도 작별하고.
아득한 길 앞에서는 무한한 길로 느껴지는데 막상 명이 다한 길 앞에서는 야릇한 감정이다.
쿠마강(久万川)과 짝하여 북상하는 국도33번이 미사카도로(三坂)라는 이름으로 오치아이
(落合)터널을 통과한다.
현도153번을 우측에 갈라놓고 직진을 계속하는 한가로운 국도(33번)는 이 하루의 무료한
구간을 마감하는지 노변의 건물이 연달고 있다.
해발400m대로 내려갔다가 다시 600m대로 올라가는 쿠마코겐 초의 다운타운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에 다름아니다.
지나온 미시마진자(登議城山의)와 다른 미시마진자를 지난 헨로미치는 33번국도를 떠나
국도와 구마 강(久万川) 사이의 이면도로와 짝한다.
우측의 카미우케나고교, 쿠마소학교, 정립병원(町立), 오모고여관(おもご) 등을 지난다.
여관 이후 전방(북쪽) 100m 안팎 지점에서 3시방향(표석)으로 돌아서(동진) 구마 강 다리
(總門橋)를 건너면 다이호지(大寶寺)의 산문(山門)을 절로 통과하게 된다.
난간이 빨간 미니 다리(勅使橋)를 건넘으로서 44번레이조에 당도한 시각은 오후3시반경.
우리나라에서는 산간의 절에 들어가는 마지막 다리를 속세를 떠난다는 뜻인 속리교(俗離)
또는 이속교(離俗)라고 하는데 칙사교는 이색적이다.(우리에게는)
저승과 이승을 뻔질나게 왕래하는 염라대왕의 심부름꾼인 저승사자(使者)의 비위를 맞춰
주려고 고상한(?) 이름을 달아주었는가.
다리 이후는 본격적인 참배의 길인가.
'하래 표삼도'(下來表參道)가 낯설고 뜻이 나오지 않아서 되뇌기를 거듭했는데 '삼'을 '참'
으로 대체하니까 답이 나오는 듯 했다.
도보 참배길(오모테산도/表參道)
메이세키지에서 도보로도 70km에 육박하며 꼬박 2일이 걸린 44번째 레이조,
해발600m대의 고원지대에 자리하여 또 하나의 '헨로코로가시'(顚倒者)라는 다이호지.
거리로는 진즉 반환점을 돌았으나 레이조의 수(數)에서도 반을 넘어서는 후다쇼다.
44번이나 되는데도 소위 납경과 무관한 나의 레이조 방문은 횟수를 더해갈 수록 매너리즘
화(mannerism化)도 더 굳어지는 것 같아서 매우 유감스럽다.
몸가짐이라도 조신하려고 유의하지만.
한데, 다이호지는 백제로부터 전래된 사찰이란다.
히로시마(廣島)의 아키(安藝)에서 멀리 사냥을 나온 하야토(隼人/옛 九州남부 거주 종족)
형제(明神, 右京)가 간풀숲(菅草)에서 11면관음상을 발견한다.
아스카 시대(飛鳥)의 요메이천황(用明/585~587) 때에 백제의 한 승려(僧侶)가 이 산중에
안치한 불상이다.
그들은 초가 암자를 짓고 이 관음상을 모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몬무천황(文武/재위697~707))은 칙령을 내린다.
그 관음상을 모시는 사찰을 짓고 사명은 연호를 따르도록.
다이호 원년(大寶元年/701)의 일이다.
그래서 사명(寺名)이 연호와 동일한 다이호지가 왼다.
그리고, 백제의 관음상을 본존으로 모시고 창건하였다 해서 백제에서 전래된 사찰이라고
하는 것인데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인 것은 내가 백제의 후손임을 의미하리라.
13번다이니치지에서는 한국여인이 주지인 것을 영예롭게 생각하는 많은 한국인들과 달리
야릇한 수치심을 느꼈는데.
성삼문의 절의가(絶義歌)를 읊고 있을 시대는 아니지만 한국의 전도있는 무용수가 일본의
습합 불교 사찰의 주지로 변신하는 과정에 민족적 수치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로부터 120년 후인 코닌(弘仁) 13년(822), 사가천황(嵯峨/재위809~823) 때 이 곳을
방문한 코보대사가 밀교를 가르쳐서 시코쿠레이조의 후다쇼 중 하나로 정했단다.
또한, 이를 계기로 종파가 천태종에서 진언종으로 바뀌었고.
정녕, 백제 덕에 굴러온 코보대사의 불로소득이다.
창건의 수고와 번거로움 없이.
그러나 불로소득이 결코 호사(好事)는 아닌 듯.
화마에 시달리는 것이 숙명인 듯 대화(大火)로 인한 대화(大禍)가 끊이지 않았다니까.
우치모도리의 효시
마감해도 되련만 더 나아가고 싶다면 억제는 하책이다.
내버려두는 것(as will)이 상책은 아니라 해도 하책 보다는 나으니까.
경내 살피기를 서둘러 마감하고 45번 이와야지(岩屋寺) 길에 나선 이유다.
꽃에서 푸대접하면 잎에서 쉬어가고, 잎도 없으면 앙상한 가지라도 없는 것 보다 낫고.
단, 이와야지 길 진입이 자칫 혹떼러 갔다 하나 더 달고 나오는 형국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경솔을 금물로 해야 한다.
이 루트에서 하기모리가 또 끼어드는 듯 했다.
해발730m 하츠초사카(八丁坂)길이 원형적인 자연을 만끽하는 최고의 루트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미련을 버리라고.
이 길에 대한 미련은 돌연적인 것이 아니고 44번다이호지로 향하는 도중,츠유미네 교차로
에서 42번현도를 버릴 때 함께 버렸다.
노소노도 길의 연장이며 붕괴와 낙석의 위험이 많다는 구간이라.
그처럼 위험하다면서도 보수와 통행제한 등 대책은 없고 통행중 사고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며 책임회피에만 급급하고 있기 때문에 아쉬움 없이 버린 것.
다이호지에서 진입했던 산문으로 나가지 않고 다이호지를 뒤에 남겨두고 스고잔(菅生山)
을 넘어서 가는 산길 헨로미치.
길을 잃거나 링반데룽(Rringwanderung/環狀彷徨)에 걸릴 염려는 없겠으나 붕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들에 경고 또는 주의환기판들이 붙어있다.
그 경고판이 이미 소규모의 사태를 입어 망가진 곳도 있다.
대형 산사태가 일어난다면?
화마에 이어 수마(산사태)까지 부를 작정인가.
그러나 이같은 위험지대 외의 산길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길을 걷게 하는 인력이 있다.
위험은 찰라 후일 망정 미래의 불행이지만 울울창창한 숲에 심취해 걷는 것은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당장의 희열이다.
12번현도와 토노미도(峠御堂) 터널을 버리고 이 숲길을 걷게 한 하기모리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보내며 터널을 빠져나오는 지점으로 넘어갔다.
긴 숲길을 조금 내려서면 터널에서 나온 현도12번을 만나게 된다.
오늘의 목표지(國民宿舍 古岩屋醬)가 6km 전방에 있다고 알리고 있다.
서두르면 어두워지기 전에(오후6시 안에) 당도할 수 있겠다.
현재시각이 오후 4시 반이니까.
꿈틀거리는 내리막길이 중간지점을 돌아갈 무렵에서 헨로미치는 현도12번을 떠나 숲길이
되었다가 현도153번으로 내려선다.
2개의 현도가 접점 직전에 한쪽은 밀어내고 다른 쪽은 잠식하기 때문인 현상이다.
아직 숲길인 지점에 헨로휴게소가 있다.
현도만(12번)을 따르면 접할 수 없는 휴게소다.
예전, 한 때는 이 근처 카와이(河合)의 헨로숙소가 15채나 늘어서 있었으며 성수기에는 한
밤에 300명의 헨로상이 묵고 갔단다.
그들은 짐을 이 숙소에 맡기고 이와야지(岩屋寺)를 두드린 후 갔던 길을 되돌아와서 짐을
찾아 다음 행선지로 갔단다.
그래서'우치모도리'(打ち戻り/두드리고돌아오다)라 불리는 진기한 순례코스가 되었단다.
체력과 시간의 선용은 순례자의 ABC다.
그 현도들이 만나는 지점의 슈퍼마켓(株-松山生協畑野川店)에서 오늘밤의 먹거리를 구입
했는데 다른 마켓보다 엄청 싼 일부 품목에 현혹되었는가.
저렴한 이유가 생협 구판장이라는 점이겠거니 했는데 음료수 등 일부 품목 외에는 오히려
바가지 쓴 느낌이니.
현도와 숲길을 번갈으며 걷는 헨로미치에는 코겐(高原)골프클럽 지역도 들어있다.
여가선용의 한 장(場)이며 현대에는 스포츠로 발전하여 IOC의 구기 중 하나로 등장했지만
사회적 또는 경제적 강자들의 전유물 처럼 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실정이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넓은 면적을 점유해야 하는 기본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권력과 부
(富)의 형성과 이동이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아무나, 아무때나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국내외의 무수한 골프장을 통과하면서도 무상무념했는데 바삐 걷는 이 시간에 왜 골프가
칼잡이 앞의 조상육(俎上肉) 신세가 되었을까.
까미노도, 헨로미치도 골프장신(神)에는 적수가 되지 못하며, 굳이 척지을 일도 없다.
소유자의 위력을 과시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골프장 권력자도, 골프장 설계자도 하나같이
역지사지의 배려를 하는데 왜 적대시 하겠는가.
백두대간에도, 정맥들에도, 도농 산어촌에도, 심지어 수도 서울의 북한산둘레길에도 개인
소유지라는 이유로 철조망으로 막고 멀리 우회하게 하는 우리와는 다른 세계인데.
내가 늙은이이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봉변으로 성한 데가 없을 것이다.
요절내고 말 듯이 달려왔다가 되레 통사정하기 다반사인 국내와 달리 서로 편한 해외.
골프장뿐 아니라 농장도, 목장도 자기의 소유권 행사로 인해 불편을 겪게 되는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길을 열어주는 소유자들이어.
복 받을지어다!
자투리길이 심심찮게 있으나 즐길만큼 한가롭지 못했고, 저녁놀 시간인데 마니아는 아직
라운딩 중인가 머리 위로 카트(golf cart)가 지나가는 듯 했다.
코겐골프장을 벗어난 삼거리의 후루이와야소(古岩屋莊) 1.5km 알림판이 반가웠다.
예상 대로 18시 이전에 종료할 수 있으니까.
여유로우니까 또 보였나.
작은 개천, 작은 다리, 버스 스톱 이름까지 모두 사가(嵯峨)천황의 황명으로 되어 있는 곳.
에히메 현 카미우케나 군 쿠마코겐 초 시모하타노카와(下畑野川) 마을이다.
어떤 연유가 있길래 산도 아닌 것이 산 행세를 하며 겁 없이 천황 이름을 마구 사용할까.
황명 사용은 불경죄에 해당하는 것 아닌지.
1.200년 전의 천황이지만 황명의 사용 금지에 시효가 있는가.
우리나라의 왕조시대에는 왕자의 이름을 아주 까탈스런 외자로 지었다.
백성들이 따라서 짓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불경죄를 짓는 일 없게 하려는 배려가 내포된 작명이었는데 일본의 이름 문화는 다른가.
일부러 맞춘 듯 6시 정각에 목적지에 당도했다.
목표지는 국민숙사 후루이와야소지만 목적지는 그 앞 버스 스톱의 대합실이다.
거리는 40Km안팎인데도 산 하나를 휘돌아 왔기 때문인지 아주 먼 길을 돌고돌아서 당도한
느낌이며 후다쇼 간의 거리가 하루치 이상인 곳이 완료됨으로서 가벼워진 느낌도 들었다.
민슈쿠(民宿) 외에도 후루이와야 온천이 있으므로, 잠 자리는 비박(bivouac/biwak)으로
족할 망정 필요한 목욕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것은 보상이다.
목욕을 겨냥하고 이 곳을 목적지로 택한 것이 아니므로 보상이다.
아침에 이요키의 오헨로젠콘야도를 나설 때도 이 곳은 없었다.
무작정 힘껏 걸은 결과가 예상보다 일찍 다이호지에의 당도였으며 그 결과로 남은 시간도
선용했을 뿐인데 목욕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보상이다
그래서 체력과 시간의 선용은 순례자의 ABC다. <계 속>
양의 동서를 망라해서 도나띠보(donation/기부제 또는 무료) 숙소들의 공통점은 2박은 안된다는 것.(위1)
걸을 수 없는 환자 외에는.
1박하고 간 한국인의 사례글(위2)에 내 마음이 실린다면 오죽 좋을까.
귀여운 목각상들이(위 아래) 밤 이슬을 맞고 있나. 아침 7시40분인데 새벽같이 진열했을리 없고.
조각가를 만나고 싶었으나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이른 아침인 것이 아쉬웠다.
헨로상에게 쉬었다 가라고 하나 버스정류소다.
인근 산에서 나오는 간벌목과 5개 공공기관과 업체의 협조로 지었단다.
지자체의 공치사가 이만저만 아니지만 공금(세금) 축내지 않아 다행 아닌가.
우리 지자체들은 어떤가?
담을 헐고 주차장을 만든다면 전액 지원한다는 지자체.
비용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차장을 자기네(지자체)가 만들어 준단다.
건설비가 시중 업체의 견적보다 배가 넘는데, 조달청 단가 기준이기 때문이란다.
이하 생략.
"키리스토와 스구니 쿠루"(그리스도는 곧 오십니다)
재림을 갈망하고 있는가.
절실한 느낌을 주는 것은 헨로미치에 자리한 마을이기 때문일까.
내가 일본땅 시코쿠헨로를 걷고 있는 것은 신심의 발로가 아니며, 한가로운 늙은이의 소일
거리나 건각 자랑이 아니다.
오로지 세월호의 현실에서 잠시라도 멀어져서 힘겹게 걸음으로서 속죄하지 않고는 자신을
추스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랬음에도 일본이라는 특수 관계로 인한 갈등이 예상 이상으로 심각하기 때문에 포기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까미노가 진정제 역할을 해서 현재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보는 것이 없으면 생각할 일도 없다.
그래서, 걷는 길 외에는 보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많이 보이고 더 잘 보임으로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안타깝기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수의 헨로상들이 신설된 국도를 이용하기 때문인지 오리지널 헨로미치 안내판이 국도와
분기하는 두 지점에 각각 서있다.
보다 많은 수입(奉納)을 위해서는 많은 헨로상이 2곳 대사당(千人宿大師堂과 樂水大師)이
자리한 헨로미치를 걸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하는 안내판이 경유지의 반대방향을 지시하고 있다면?
누군가 안내판을 역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다(위)
국내에서 이따금 이같은 경우를 겪었다.
어느 심통 사나운 사람의 몹쓸 짓에 고생한 것인데 일본땅에서 겪을 뻔 하다니.
국가적, 국민적 정서와 달리 개인 심성은 선량하다는 믿음에 상처를 준 짓을 누가 했을까.
이후의 사진들은 메모리칩의 관리 부주의로 사용 불능상태인데 복원이 가능할런지?
첫댓글 건안하시온지요? 잘읽고 감사한 마음을 어쩌지요?
양주께서 다 평안하시지요?
제가 오늘 늙은이임을 이유로 투표권을 반납했는데 인정을 나누는 일까지 그런 건 아닙니다.